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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8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유(瑈) · 자는 수지(粹之)다

12세인 1428년 진평대군(晉平大君)으로 처음 봉해진 후

17세인 1433년에 진양대군(晋陽大君)으로 29세인 1445년에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불렸다

문학과 활쏘기 · 말타기에 있어 독보적으로 뛰어났으며, 천문 · 수학 · 음악 · 의술 · 기예 등 다방면에 능했다

 

 

세조(世祖 · 1417~1468 · 재위 1455~1468)

수양대군으로 널리 알려진 세조는 조선의 제7대 국왕이다

본인의 형제와 많은 신하를 죽인 정변으로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좌에 올랐다

도덕성과 명분이 결여된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반면, 통치와 업적은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체제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 전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 정치 · 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을 함께 선보인다

또, 세조란 묘호(廟號 ·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가 의미하듯

그의 사후 왕릉(광릉 光陵)과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에서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 숭배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야심차고 비정한 군주로 알려진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고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각기 정치력을 강화하며 세력을 강화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 세력이 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재상들과 안평대군 세력을 제거하며

수양대군은 단종을 대신해 나라의 중요한 일을 모두 통치하는 정치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星州 世宗大王子胎室) 사진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세종의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다

 

 

 

 

세조 태실 사진

성주 세종대왕자태실(星州 世宗大王子胎室) 중 세조 태실이다

 

 

 

 

세조의 태지석과 태항아리 / 1438 · 세종 20 · 서삼릉 출토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태내 · 외항아리와 태지석이다

경주 성주군 월항면에 있던 세조의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

태지석에 아래와 같이 써있다

"皇明永樂十五年丁酉九月二十四日生 晋陽大君諱瑈正統三年 戊午 三月 ㅁ十日藏"

태여난 영락(永樂) 15년(1417년) 9월 24일생, 봉작인진양대군(晋陽大君) 이름 유((瑈)의 태를, 정통(正統) 3년(1438) 3월 ○○에 묻다

 

 

 

 

선원록(璿源錄 · 1681년)

조선 왕실의 족보로 세조가 1417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역대병요(歷代兵要 · 1456년 이후) · 진법(陣法 · 15세기 말 이후)

중국와 우리나라의 역대 전쟁과 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병서이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작업을 지휘하였으며 정인지 · 유호통 · 이석형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편찬했다

*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문종의 명으로 육지에서 벌이는 전투의 진을 짜는 방법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첫머리에 직접 지은 서문이 실려 있다

 

 

 

 

문종이 세조에게 내린 활에 제한 시

 

 

 

 

세조의 왕릉광릉과 봉선사 사진

광릉은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들었다

두 능이 위치한 언덕 아래의 중간 지역에 '정(丁)'자 모양의 제사 건물(정자각)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은 대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졌다

무덤 둘레에도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돌로 된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광릉의 사례는 조선 초기 능 제도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세조의 왕릉 광릉의 석물 문 · 무인석

 

 

 

 

정조가 광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 봉선사 유리원판 사진

광릉에 대한 책과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정조가 광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 1792년

1792년(정조 16) 정조가 광릉을 참배하고 양주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세조를 칭송하며 지은 글이다

서정수가 왕명을 받아 쓴 현판으로 광릉의 재실에 걸려 있었다

 

 

 

 

봉선사 유리원판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봉선전도 《강화부궁전도》 / 국립중앙박물관 · 19세기 · 복제

강화도의 봉선전을 묘사한 그림이다

후금의 위협을 받고 있던 1622년(광해군 14)에 세조 어진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것을 1858년(철종 9)에 다시 건립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로 소실되었다

 

 

 

 

'광릉'이 새겨진 함

광릉에서 행해진 제향에 쓰인 물품을 보관한 함으로 앞면에 사용처인 광릉(光陵)이 새겨져 있다

 

 

 

 

'광릉'이 새겨진 술잔

술을 올리는 데 사용한 제기이다

잔의 바닥면에는 '광(光)'이 새겨져 있어 광릉 제향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광릉지(光陵誌) / 1936년

광릉의 제반 사항을 모아 엮은 것으로 1796년(정조 20)에 편찬된 원본을 1936년 이왕직에서 베겨 만든 책이다

 

 

 

 

영조가 광릉을 참배 후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 / 1755년

1755년(영조 31) 영조가 세조의 능인 광릉을 참배하고 난 뒤의 감회를 손수 지어 쓴 글을 현판에 새겨 광릉 재실에 건 것이다

*

금년(1755년)은 세조께서 즉위하신 해의 회세(回歲)이니 표석을 세우고 전알(展謁)함으로써 선대왕을 추모하는 작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친다

이때는 나의 회갑 이듬해 봄이니 또한 어찌 꿈속에서나마 생각했던 일이겠는가 친히 써서 재실의 북쪽 벽 한가운데에 걸어 둔다

 

 

 

 

정묘어제(正廟御製) / 1814년

정조의 시문을 모은 책으로 정조가 광릉을 참배하면서 운(韻)자를 뽑아 수행한 54인의 신하들과 함께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세조 어진(世祖御眞) / 복제

세조 어진의 초본을 바탕으로 일부 없어진 선을 보완하여 완성한 복제본이다

 

 

 

 

세조의 어진의 봉안과 수장

1468년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 동쪽에 세조 진전(숭은전) 건립 · 1954년 12월 용두산 화재로 소실

 

 

 

 

나라를 다시 세운 왕으로 숭배된 세조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예종은 세조가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을 인정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묘호로 '세조(世祖)'를 올렸다

비정한 피의 군주라는 세간의 인식에도 세조의 후손인 후대 왕들은 '세조'란 묘호가 시사하듯 이성계에 버금가는 임금으로 숭배했다

세조는 조선 전기의 왕 중 태조를 제외하고 진전에 공식적으로 어진이 모셔지고 제향이 행해진 유일한 임금이다

예종은 세조가 묻힌 광릉에 능을 지키는 사찰인 봉선사를 두고 그 옆에 진전(봉선전)을 세워 시조의 어진을 봉안했다

후대 왕들은 종종 광릉과 봉선전에 들러 제향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 세조 어진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태조, 원종 어진과 함께

한양(현 서울)의 영희전(또는 남별전)에 모셔졌으며 정기적으로 왕이 방문해 술잔을 올렸다

조선 후기 왕들은 광릉에도 자주 거동하여 친히 참배했다

 

 

 

 

세조 어진의 전승 내력과 〈세조 어진 초본〉

세조 사후 첫 기일을 앞두고 예종은 광릉 옆에 진전을 세워 세조의 어진 한 점을 봉안했다

이 어진은 임진왜란과 뒤이어 일어난 두 차례의 호란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1637년에는 병자호란을 피해 땅에 묻어 숨기면서 생긴 찢어진 부분에 대한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1669년 · 1692년 · 1713년에 손상된 부분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졌다

영조 대인 1735년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그림이 희미해지자 모사본을 제작했다

이후 원본과 모사본을 함께 보관했으나 1872년 원본을 세초(洗草)하여 1735년 모사본만이 남았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이왕직은 세조와 원종 어진의 모사를 결정했다

이 해 5월 말 김은호가 세조 어진의 초안을 베껴 그린 후 6~7월에 걸쳐 비단에 옮겨 그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세조 어진 초본〉은 이 때 김은호가 1735년의 세조 어진 모사본을 옮겨 그린 초본이다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 국악원 창고로 옮겨 보관되었던 조선시대 어진 대다수가 1954년 12월 용두산 화재로 소실된 상황에서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

*

국립고궁박물관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의 최초 공개다

 

 

 

 

세조 어진의 보수와 모사

 

 

 

 

세조 어진을 모사하는 김은호 / 1935년

 

 

 

 

세조 어진을 모사하는 곳이다

 

 

 

 

선원전영정모사등록 / 1936년

1935년 4월부터 1936년 1월까지 창덕궁 신선원전의 〈세조 어진〉과 〈원종 어진〉을 모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세조 영정모사도감의궤 / 1735년

1725년(영조 11) 영희전 제2실에 모셔져 있던 세조의 어진을 새로 옮겨 그린 후 봉안하는 전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영정수보등록 / 1713년

1713년(숙종 39) 영희전 제2실에 모셔져 있던 세조의 어진을 수보하는 절차와 소용된 물품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정축개장등록 / 1637년

병자호란 때 손상된 〈세조 어진〉에 대한 보수 내역을 기록하였다

보수가 필요한 다섯 가지 사안들에 대해 언급하고 영정 보수에 소용된 물자와 참여한 관원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복위 사건의 그늘

1455년 윤6월 세조는 단종을 강요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1456년 집현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 시도를 진압하고 이를 주도한 여섯 신하(사육신)와 관련자를 참혹하게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었으며

1457년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후 단종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단종과 그를 위해 목숨을 건 신하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사육신 · 생육신으로 충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세조는 조카의 왕위와 목숨을 빼앗은 비정한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낙화암도 / 18세기 말~19세기 초 · 장릉도 / 18세기 말~19세기 초

왼쪽부터 낙화암 · 민충사 · 금강정이 그려져 있다

동강을 백제가 망할 때 수많은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는 '금강'에 비견하는 등 충절의 이념을 화폭에 재현해 내고 있다

*

단종의 묘역에는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 충신 · 내시 · 궁녀 등을 제사하기 위한

제단(배식단)과 이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충신사 · 배식단사)이 설치되어 있다

 

 

 

 

자규루도 / 18세기 후반

단종이 영월 유배시 소쩍새(자규 子規)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빗댄 시를 지은 자규루를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단종과 관련된 유적들을 묘사하였다

 

 

 

 

장릉사보 / 1796년 간행 · 1915년 후쇄 · 장릉지 / 1711년 간행 · 19세기 후쇄

1791년 정조 대 이루어진 단종의 사적 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간행되었으며 정조가 직접 쓴 어제(御製)가 기록되어 있다

*

정조의 명으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의 단(壇)을 만들면서 단종과 관련된 사적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세조의 통치와 업적

세조는 집권 이후 국왕을 핵심으로 한 중앙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여러 제도를 가다듬었다

토지와 인구 비례에 맞도록 군현제를 정비했으며 호적과 군적을 바로 잡고 호패제를 시행해 인민에 대한 파악과 지배력을 강화했다

또 토지, 군사제도에 대한 개혁으로 재정과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제를 확립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세조는 즉위 직후부터 왕명을 직접 작성하고 써서 신하들에게 내려주었으며

시를 매개로 소통하며 신하의 뜻을 살피거나 충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열성어필

역대 왕들의 글씨 탁본을 모아 놓은 첩에 실린 세조의 친필로 「효경」의「응감장」을 옮겨 쓴 것이다

 

 

 

 

열성어제 / 1755년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지은 시문을 모은 책에 실려 있는 세조의 시로 '신숙주에게 내린 표주박 술잔시' 부분이다

 

 

 

 

어제병장설 / 1462년 이후

세조가 지은「병장설」에 신숙주 등이 그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과 부록을 덧붙여 1462년에 간행한 책이다

 

 

 

 

경국대전 / 1485년 이후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나라 전반의 통치 규범을 담고 있다

세조 즉위 후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1466년에 대강의 내용을 마련하였으나 보완과 수정 작업을 거쳐 1485년(성종 16)에 완성되었다

 

 

 

 

세조의 불교 후원

세조는 조선의 다른 왕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불교를 옹호하고 사원을 지원했다

또한 불경의 간행을 전담하는 기구인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을 간행했다

간경도감에서는 한문본 불경 외에도 주요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행했다

간경도감에서 나온 한글 번역 불경은 세조가 직접 번역하거나 토를 단 경우가 많다

법화경 · 능엄경 · 아미타경은 세조가 직접 한글로 번역한 불경이다

이들 한글 번역 불경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직후의 국어를 반영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능엄경언해 / 1461~1462년 이후

중국 송나라 때의 승려 계환이「능엄경」의 핵심 부분을 풀이한 책에 세조가 직접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것이다

 

 

 

 

선종영가집언해 / 1464년 이후

선종의 핵심 불전인「선종영가집」을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세조가 친히 한글로 토를 달고 효령대군 등이 번역하여 1464년 감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월인석보 / 1568년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에 세조 자신이 지은「석보상절」을 덧붙여 쉽게 풀이한 것이다

 

 

 

 

묘법연화경언해 / 1463년 이후

대승불교의 기본 경전인「묘화연화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세조가 한글로 토를 달고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세조의 장례를 지낼 때 그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글(애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