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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왕가의 역사)

국립고궁박물관은 국외 왕실 특별전시의 하나로 12월 5일부터 내년 2월 1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과 1층 기획전시실에서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자리한 국가로 가문의 성(姓)이 곧 국가의 공식 명칭인 나라 중 하나다

영토의 크기가 서울의 1/4 정도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작은 국가이며 ‘대공’을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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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근방 귀족 가문에서 시작된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1608년 카를 1세가 대공 지위에 오름으로서 기반을 다졌다

이어 셀렌베르크와 파두츠 지역을 구입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실의 연방국가로 인정 받았고

라인동맹(1806) · 독일연방(1815) 등을 거쳐 완전한 독립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대공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작지만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리히텐스타인 왕가의 보물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가문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왕실컬렉션」을 조성해 왔다

지금도 이어지는 미술품 수집의 전통은 예술의 후원 가문으로서 왕가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은 왕실컬렉션을 통해 리히텐슈타인의 긴 역사와 유려한 문화를 선보이는 전시로

왕가의 기원을 보여주는 문헌자료와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 · 화려한 생활용품과 바로크 시대의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작지만 빛나는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역사와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다

 

 

 

 

리히텐스타인 공국

리히텐스타인 왕가의 보물을 보기 전에 리히텐스타인 공국 공부하기다

 

 

 

 

리히텐슈타인 공국

유럽의 입헌군주국이자 공국(公國)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있다

영토의 크기가 서울의 1/4 정도인,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작은 국가이다

가문의 성(性)을 국가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로서

리히텐슈타인은 유럽의 수많은 왕가 사이에서 900년 동안 가문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역사

1120~1130년경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프란츠 1세 대공 / 1930년 경

14대 대공 프란츠 1세(1853~1938)의 초상사진이다

프란츠 1세는 학업을 마치고 군에서 복무한 후 외교 임무를 맡았다

1894년부터 1898년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대사로 재직하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 개선, 학술 교류에 기여하였다

대공의 지위를 물려받은 후에는 경제 개혁을 지속하여 리히텐슈타인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프란츠 요제프 2세 대공 · 게오르나 대공비 사진 / 1943년

15대 대공인 프란츠 요제프 2세(1906~1989) · 게오르나(1921~1989)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프란츠 요제프 2세는 1938년 공국의 통치를 맡으면서 왕가의 거처를 파두츠로 옮겼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체코 지역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재산을 몰수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왕가의 소장품을 파두츠로 안전하게 이전하였으며 공국의 경제 회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16대 대공 한스 아담 2세(1945~ ) · 대공비 마리(1940~ ) 초상사진

한스 아담 2세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2세를 도와 전쟁 이후 피폐해진 공국을 재건하였으며 주요 예술품을 새로 구입하였다

대공에 오른 뒤에는 UN과 유럽경제지역(EEA)에 가입하였고 2003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공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2004년 이후 대공의 실질적인 권한을 아들인 알로이스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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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위 계승자 알로이스(1968~ ) · 부인 조피(1967~ ) 사진

알로이스는 한스 아담 2세 대공의 장남으로 잘츠부르크대학교에서 법리학을 공부한 후 런던 소재의 회계 법인에서 근무하였다

1996년 파두츠로 돌아와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였고 2004년 이후 아버지 한스 아담 2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대공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대공들

 

 

 

 

요제프 벤첼 1세 대공(1696~1772)

리히텐슈타인 4대 · 8대 대공이자 안톤 플로리안 1세 대공의 조카인 요제프 벤첼 1세의 초상이다

3대 대공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의 뒤를 이어 6년간 통치하다가 삼촌인 안톤 플로리안에게 왕위를 내주었고

이후 5촌 조카인 네포무크 카를 1세의 뒤를 이어 24년간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1725년부터 1740년까지 파리와 베를린 황제 특사로 임명되는 등 다양한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1657~1712)

리히텐슈타인 3대 대공인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의 초상이다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는 파두츠와 셀렌베르크 지역을 구입하여 현재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영토를 확보했고

예술과 문화를 적극 후원하여 루벤스의 작품을 다수 구매하는 등 리히텐슈타인 왕실컬렉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최초로 대중을 대상으로 한 미술품 전시를 열어 빈의 도시궁전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안톤 플로리안 1세 대공(1656~1721)

리히텐슈타인 5대 대공인 안톤 플로리안 1세의 초상이다

합스부르크 카를 6세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하여 황실에서의 영향력을 키웠다

1713년 황실 의회의 의석을 얻었으며 1719년 파두츠와 셀렌베르크를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1세 대공(1726~1781)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9대 대공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이다

젊은 시절 삼촌인 요제프 벤첼 대공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고 다양한 외교 활동을 하는 등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다졌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황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도 황금양모 기사단의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경제 발전과 왕실컬렉션 수집에 힘썼다

 

 

 

 

알로이스 1세 대공(1759~1805)

10대 대공인 알로이스 1세의 초상이다

알로이스 1세는 여행과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공국을 근대화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모라비아 지역에서 산업으로 자금을 모았고, 도서를 수집하여 리히텐슈타인 도서관을 확장하였으며

건축가 요제프 하르트무트를 고용하여 빈 헤렌가세에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알로이스 2세 대공(1796~1858)

12대 대공 알로이스 2세의 초상이다

알로이스 2세는 빈의 도시 궁전을 로코코 복고 양식으로 개조했으며

아이스그룹(체코 레드니체)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을 신고딕 양식으로 개조했다

예술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미술 작품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요한 2세 대공

13대 대공 요한 2세의 초상이다

요한 2세는 1921년 의회 민주주의에 기반하여 헌법을 개정하였고 그가 개정한 헌법은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뛰어난 안목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를 후원하였으며 파두츠 성 왕가들의 선조들이 거주했던 거처를 재건하였다

 

 

 

 

카를 1세 대공의 초상 / 1625년 경

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의 창립자이자 1대 대공인 카를 폰 리히텐슈타인 1세(1569~1627)의 전신 초상이다

캬를 1세는 1622년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 처음으로 황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았는데 이 초상화에서 그 훈장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마티아스 황제는 1608년 카를 1세에게 대공의 지위를 수여하였으며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그를 보헤미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역사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오스트리아 빈 근방의 귀족 가문에서 시작되었다

왕가의 시조인 후고는 12세기 초 빈 남쪽에 성을 짓고 세력을 키웠으며 점차 빈과 체코 모라비아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1608년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 대공 지위를 받음으로써 왕가의 기반을 다졌다

이어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가 현재 리히텐슈타인 공국인 셀렌베르크와 파두츠 지역을 구입하고

1719년 안톤 플로리안 1세가 두 지역을 합쳐 황실의 연방국가로 인정받으면서 공국으로서 리히텐슈타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실을 외교 · 군사 · 금융 등의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문의 입지를 넓히고 독립국가의 토대를 만들어 나갔다

1815년에 독일연방에 가입하였고, 요한 2세 대공 통치기에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국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866년에 독일연방을 탈퇴하여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프란츠 요제프 2세와 한스 아담 2세의 노력으로 재정을 회복하고 금융업을 발전시켜 1인당 개인 소득이 최상위인 부국으로 성장하였다

 

 

 

 

마리아 엔체르스도르프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성 / 페르디안트 룽크 · 1813년

중세 시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성과 새로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 그리고 원형극장을 그린 그림이다

오스트리아 빈 남쪽에 위치한 마리아 엔체르스도르프는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첫 시조인 후고가 처음으로 가문의 성을 지은 곳이다

그림 오른편에 묘사된 무너진 건물이 바로 그 성터이다

 

 

 

 

옛 리히텐슈타인 성의 세부를 그린 수채화 습작 / 루돌프 폰 알트 · 1850년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시조인 후고가 1135년에 세운 리히텐슈타인의 옛 성을 그린 수채화이다

후고는 제후국의 백작 라포트-디에폴팅을 따라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 왕조에 봉직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가 세운 첫 성의 이름이 바로 리히텐슈타인으로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 되었다

 

 

 

 

카를 리히텐슈타인 1세 가톨릭 개종을 축하하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편지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캬를 1세 대공의 가톨릭 개종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이다

카를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실에 봉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가문의 입지를 넓혔다

그는 개종 직후 루돌프 2세 황제의 황실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 1세가 니콜스부르크 지역의 영토를 하사받은 문서 / 1249년 1월 14일

리히텐슈타인의 선조 후고의 손자 하인리히 1세가 모라비아의 영주 오토카르 프르제미슬 2세로부터

니콜스부르크(미쿨로프) 지역의 영토를 받은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하인리히 1세는 보헤미아의 프르제미슬 왕가에 봉직하며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1세와 그의 아들인 오토카르 2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였다

이에 오토카를 2세는 영토를 하사하였고, 니콜스부르크는 1580년에 매매되기 전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중심지였다

 

 

 

 

하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 1세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이름으로 발행한 최초의 문서 / 1260년 4월 24일

하인리히 1세가 오스트리아의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프르제미슬 왕가의 오토카르 2세로부터 받은 뒤

공국 수장 자격으로 발행한 문서로 빌돈 성의 소유권 이전에 관한 내용이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이름으로 발행하여 지금까지 전해지는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하인리히 1세의 투구 모양 문장은 리히텐슈타인 가문 최초의 문장이다

 

 

 

 

요한 폰 리히텐슈타인 1세에게 모라비아의 영주 욥스트가 마을을 매도한 문서 / 1382년 6월 21일

모라비아의 영주 욥스트가 요한 폰 리히텐슈타인 1세에게 모라비아 남부의 마을을 매도한다는 문서이다

요한 1세는 푸르크마니츠와 아이스그룹(레드니체), 룬덴부르크(브르제츨라프) 등 남부 지역의 영토를 취득하여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크리스토프 폰 리히텐슈타인이 마이사우의 오토 4세로부터 빌페르스도르프 지역의 영토를 상속 받은 문서 / 1436년

요한 폰 리히텐슈타인 1세의 종손인 크리스토프 폰 리히텐슈타인 2세가

1436년 마이사우의 오토 4세로부터 오스트리아 서부 빌페르스도르프의 성과 영토를 상속받은 문서이다

빌페르스도르프의 성은 지금도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소유하고 있으며 인근의 영지와 사업을 관리하는 사무실 · 와인 양조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르트만 폰 리히텐슈타인의 재산 등록부에 수록된 리히텐슈타인 가문 가계도 / 1553~1562

게오르크 하르트만 폰 리히텐슈타인 1세가 1553년부터 1562년까지 소유했던 오스트리아 지역의 옛 성지와 현재의 영지를 기록한 재산 등록부이다

게오르크 하르트만 1세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첫 번째 대공이었던 카를 1세의 조부이며 등록부에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 왕인 마티아스 카를 1세를 대공으로 임명한 문서 / 1608년 12월 20일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헝가리의 왕인 마티아스가 오스트리아의 황위 세습 다툼에서 자신을 도운 캬를 1세를 대공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카를 1세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 최초로 대공이 되었다

1614년에는 슐레지엔 지역의 트로파우(오파바) 공국을 취득하였고 대공의 지위로 슐레지엔 의회의 의석과 투표권을 지닌 대표자가 되었다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왕관과 보석 / 1756년

카를 1세 대공이 황제에게 대공의 지위를 인정 받은 후 지위에 걸맞게 제작한 왕관과 보석을 그린 그림이다

왕관은 1626년 완성되었는데 요제프 벤첼 1세 대공이 1756년에 왕관을 비롯하여

가문의 중요한 보석을 양도할 수 없도록 칙령을 내리면서 이를 기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현재 왕관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카를 1세 대공의 어머니 아나 마리아 폰 오르텐부르크의 귀족 증명서 / 1600년 경

하르트만 2세의 부인이자 카를 1세 · 막시밀리안 · 군다커의 어머니인 아나 마리아 폰 오르텐부르크의 귀족 증명서이다

아나 마리아의 장남인 카를 1세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첫 대공이 되어 왕가의 기초를 세웠다

이후 둘째 · 셋째 아들인 막시밀리안과 군다커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대공 지위에 올랐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깃발 / 1606년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영지인 체코 모라비아 지역을 지키기 위해 모집한 군대의 깃발이다

황금양모 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상징인 붉은 색과 황금색을 사분할로 배치하였다

카를 1세 대공이 1606년 모라비아를 칩입한 트란실바니아 공작의 군대를 막아낸 기념으로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발흥과 17~18세기 셀렌베르크와 파두츠 지역의 획득

 

 

 

 

 

페르디난트 2세 황제가 막시밀리안을 대공으로 임명한 문서 / 1623년 9월 12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크 2세가 막시밀리안을 대공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막시밀리안은 카를 1세의 동생으로, 1600년 초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황실 가문에 봉직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에 기여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대공의 지위에 올랐다

 

 

 

 

요한 아담 안드레아 1세 대공이 셀렌베르크 지역을 구입한 문서 / 1699년 1월 18일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이 1699년 셀렌베르크의 영지를 취득한 것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매수인인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와 매도인인 아크프 하니발 폰 호에넴스 3세의 서명이 있다

셀렌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직속 관할령으로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이 지역을 획득함으로써 제국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지도 / 요한 아코프 헤버 · 1721년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그린 첫 번째 지도이다

1719년 안톤 플로리안 1세 대공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부터

파두츠와 셀렌베르크를 공국의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국경이 확정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에 제작한 지도이다

상단에 라틴어로 방위가 · 독일어로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지명이 쓰여있다

 

 

 

 

카를 6세 황제가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의 파두츠 지역 구매 계약을 승인한 문서 / 1712년 3월 7일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 황제가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의 파두츠 구매 계약을 승인하는 문서로 붉은 벨벳으로 제본한 양피지 소책자이다

파두츠는 신성로마제국의 직할령으로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이 지역을 소유함으로써 제국의회 의석과 투표권 획득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파두츠 성 / 루트비히 한스 피셔 · 1907년

리히텐슈타인의 파두츠 성을 그린 수채화이다

13세기 전반에 건립된 이 성은 18세기 이후 방치되었다가 요한 2세 대공이 재건하였으며

1938년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빈에서 이주하면서 현재까지 왕가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이 그림은 요한 2세가 파두츠 성 재건축위원회의 의장이었던 한스 빌크체크 백작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성립을 캬를 6세 황제로부터 인정받은 문서 / 1719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6세 황제가 파두츠와 셀렌베르크를 합쳐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승격한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파두츠와 셀렌베르크는 현재 리히텐슈타인의 영토이다

1719년 정식으로 공국이 성립된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붕괴(1806)하고 독일 연방이 해체(1866)된 이후 공국이 자주권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카를 에우제비우스 1세 대공의 마이엥크루그 뚜껑 달린 병 / 1639년

카를 에우제비우스 대공이 직접 주문한 마이엥크루그로, 연수정 한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 제작하였다

카를 에우제비우스 1세는 연수정 덩어리를 직접 구입한 후 유명한 보석 세공사 디오니시오 미세로니에게 병의 제작을 주문하였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이 마이엥크루그는 당시 왕가의 명성을 반영하고 있다

 

 

 

 

면에 선을 새진 갑옷 / 1520년 경 · 끝이 뾰쪽한 투구(모리온) 3점 / 1570 · 1550~1580 · 1560~1580년경

오스트리아 제벤슈타인 성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갑옷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양식에 따라 조화로운 비례로 제작되었고

가슴가리개 · 넓적다리가리개(퀴스) 등 갑옷을 구성하는 각 부분은 못이나 끈을 사용하여 연결하였다

표면에는 새로로 주름선을 넣었는데, 이는 1500년대 초반에 유행한 양식으로 보인다

 

 

 

 

튀르크 군과의 전투 장면 / 아크나츠 엘하펜 · 1688~1695년 경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이 주문한 부조로 추정된다

유럽의 신성동맹과 오스만제국 간의 대 튀르크 전쟁 중 1687년 헝가리에서 벌어진 모하치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동맹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함스부르크가문의 헝가리 왕위세습이 공인되었고 이슬람교도들이 헝가리 · 슬로베니아 · 트란실바니아를 떠나게 되었다

 

 

 

 

카를 1세 대공의 미늘창 / 1620~1623년 경

창 옆에 도끼 모양의 날이 붙어 있는 무기인 미늘창으로 근위병이 사용하였다

1622년 카를 1세의 보헤미아 왕국 총독 임명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창의 날에는 가문의 문장을 새겼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에서 사용했던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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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우제비우스 1세 대공의 미늘창 / 1623년

창 옆에 도끼 모양 날이 붙여 있는 무기인 미늘창으로 카를 에우제비우스 1세 대공의 근위병이 사용하였다

창의 날에 새겨진 다이아몬드를 망치로 내려치는 모습은 거센 충격을 견뎌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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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헝가리 왕 페르디난트 1세의 미늘 창 / 1558년

창 옆에 도끼 모양의 날이 붙어 있는 무기인 미늘창으로 근위병이 사용하였다

1558년 3월 24일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할 때 만들어졌으며

리히텐슈타인 왕실컬렉션에서 소장하고 있는 미늘창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호이처 대포 모형 / 1672년

왕실 무기고에 소장되었던 대포 모형으로, 병사의 훈련이나 신무기 개발을 위한 표본으로 사용되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황실 군대에 소속되어 여러 전투를 겪었고

전쟁에서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대포의 성능 향상을 위해 모형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목제 포가(砲架)가 포신과 함께 남아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하프-카르토우베 대포 모형 / 17세기 후반

왕실 무기고에 소장되었던 대포 모형으로, 병사의 훈련이나 신무기 개발을 위한 표본으로 사용되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황실 군대에 소속되어 여러 전투를 겪었고

전쟁에서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대포의 성능 향상을 위해 모형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목제 포가(砲架)가 포신과 함께 남아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코끼리거북 등껍데기 방패 / 16세기 후반

코끼리거북의 등껍데기로 만든 방패이다, 표면을 화려하게 꾸민 의식용 방패로 보인다

방패의 가장자리에는 사자 머리 모양 매달 21개를 둘렀고 중앙에는 선원들의 안전한 항해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장식하였다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의 초상을 새긴 메달 / 필리프 하인리히 뮐러 · 1694년

갑옷을 입은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대공의 흉상을 새긴 황금 메달이다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는 황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착용하고 있는데 그는 1694년 레오폴드 1세 황제에게 기사단 입회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 메달은 합스부르크 황실이 부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황금양모 기사단 입회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대공과 전쟁

 

 

 

 

오스만 제국의 기병 / 1526년

합스부르크 황실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1526~1791) 관련 팸플릿에 묘사된 제국의 기병(시파히)이다

오스만 기병은 적군의 측면을 포위하여 보병대(예니체리)가 주둔한 위치로 몰아가는 역할을 했다

 

 

 

 

말을 탄 오스만 제국의 수상 무스타파 파스하 / 피터르 스테번스 판 군스트 · 1676~1702년 경

베네치아 공국을 침략하여 키프로스를 점령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오스만 제국의 수상 무스타파 파스하를 그린 삽화이다

무스타파 파샤는 용맹하고 잔인한 성정으로 유명하여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여 17세기 회화의 주제로 자주 다루어졌다

 

 

 

 

말을 탄 타타르 장군 / 야코프 폰 잔드라르트 · 1664년 경

용맹스럽게 말을 탄 채 화살을 쏘는 타타르의 장군을 주제로 한 판화로 배경에 여성을 납치하고 양민을 학살하는 오스만 제국의 병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유럽인들에게 가장 공포의 대상이었던 튀르크인은 '기습하고 불을 지르는 자'였던 비정규군 기병부대였다

몽골제국의 한 민족이었던 타타르인을 오스만 제국의 일원으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튀르크 근위병 / 요제프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 1700년

말을 탄 튀르크 궁전의 근위병을 묘사한 판화이다

튀르크에 대한 두려움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로 접어들면 점차 호기심으로 변모하였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열풍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예술계에서 '터키풍'의 유행으로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과 포로로 잡힌 수도승

튀르크인 병사에게 사로잡힌 수도승의 모습이 불타는 성당을 배경으로 묘사된 삽화이다

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유럽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 수 세기간 지속되면서

튀르크인은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이처럼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요한 1세 대공이 함께 한 프란츠 2세 황제와 나폴레옹의 회담 / 피에르 폴 프뤼동 · 1815년 경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 황실 연합군이 패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1805) 이후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사이에 이루어진 회담 장면을 묘사하였다

황실 군대 소속이자 외교관의 역할을 맡은 요한 1세 대공이 회담 성사를 주도하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요한 1세는 프레스부르크평화조약(1805)을 체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슈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캬를 대공과 요한 1세 대공 / 요한 피터 크라프트 · 1820년

1809년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빈에서 벌어진 프랑스 군과 오스트리아 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총사령관 캬를 대공이 있으며 그 바로 뒤로 리히텐슈타인 대공 요한 1세가 그려져 있다

기병 예비부대를 지휘했던 요한 1세는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파두츠 성, 리히텐슈타인 파두츠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의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으로, 파두츠의 상징이다

13세기에 요새로 지어졌으며 1712년에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20세기 초 요한 2세가 재건하였으며 1938년 프란츠 요제프 2세의 주도하에 거주지를 이곳으로 옮긴 후부터

현재까지 대공 가문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