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년 태종 때 건립한 조선왕조 왕궁으로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활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삼삼와(三三窩) · 승화루(承華樓)
승화루는 조선시대 세자를 위한 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의 부속 건물로서 삼삼와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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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을 통해 들어왔기에 창덕궁은 낙선재로부터 돈화문으로 나간다
낙선재(樂善齋) 일원
낙선재(樂善齋 · 보물 제1764호)
조선 24대 헌종이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 지은 것으로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에서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헌종의 면모가 느껴진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다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 이은이 이곳에서 사망하였고, 영왕의 비 이방자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다
석복헌(錫福軒)
헌종은 첫 번째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16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에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명헌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되었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경빈 김씨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집이다
수강재(壽康齋)
1785년(정조 9)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으면서
공사하고 남은 자갈과 벽돌을 모아 산을 만들었는데 이를 철거하고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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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일본에서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돌아온 뒤, 1989년 4월 21일 돌아가실 때까지 생활하신 곳이다
당시 낙선재에 사시던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시누이 올케 사이로 같이 의지하며 사시다 같은 해에 돌아가셨다
낙선재 일원은 그 분들이 돌아가신 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수강재 밖으로 나오면 우물이 2개 있다
하나는 낙선재 일원에 사는 사람들의 식수로, 다른 하나는 빨래같은 허드렛일을 할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시문(資始門)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문 왼쪽에 있는 문으로 만물이 힘입어 비롯한다는 뜻이다
집희(緝熙)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15세 고종의 어필 현판이 걸려있다
성정각(誠正閣)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보춘정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으로 보춘(報春)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의미다
희우루(喜雨樓)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이다
조화어약(調和御藥) ·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은 임금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고 보호성궁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성정각(誠正閣) · 조화어약(調和御藥)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성정각에서 나와서 봤다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이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인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 유리창문 ·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여춘문(麗春門)
희정당에서 대조전으로 가는 문으로 아름다운 봄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청향각(淸香閣)
대조전 뒤뜰에 있는 건물이다
대조전 뒤쪽 문이다
왕비의 침전이자 생활공간인 대조전 뒷쪽이다
대조전(大造殿) · 경훈각(景薰閣)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조전(大造殿 · 보물 제816호)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移建)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선정문(宣政門)
선정문에서 복도각을 통하면 선정전에 이른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 업무보고 ·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세조 7년(1461)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혼전(魂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인정전인정전(仁政殿) 내부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 커튼 ·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답도(仁政殿 踏道)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인정문(仁政門 · 보물 제813호)
태종 5년(1405)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진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숙장문(肅章門)
인정문을 나와 왼쪽에 있다
인정전 외행각(仁政殿 外行閣)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정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고려 말 내시 출신이었던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에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게 되었다
창덕궁뿐 아니라 제릉 · 건원릉 · 경복궁 수리 · 청계천 준설 · 경희루 · 무악이궁 · 현릉 등의 공사를 수행하였고
이후 공조판서 ·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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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호위청 · 상서원 · 정청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진선문(進善門)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를 두두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렵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두리기 힘들었을 신문고를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 조정의 골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느티나무
우리나라 고목 중에는 느티나무가 가장 많으며 창덕궁에도 느티나무 고목 30여 그루가 있다
동궐도에서는 성정각 뒤를 비롯하여 지금도 살아있는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을 확인할 수 있다
금천교(錦川橋 · 보물 제1762호)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활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태종 11년(14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 불렀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돈화문(敦化門 · 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정문에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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