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鄭昌孫 1402~1487)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자는 효중(孝仲) · 호는 동산(東山)이다
조선 세종 8년(1426)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 문과 중시에 등제한 후
집현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 ·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 · 세종실록 · 치평요람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조선조 오대조 다섯 명의 임금을 섬기며
세 번의 영상에 올라 삼위 수상과 삼훈공신에 오른 역사 속 인물로 성종 18년(1487) 86세로 별세하였다
*
사위 김질이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와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김질이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이 되고
보국숭록대부가 더해졌으며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어 대사성 · 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정창손 묘역 /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5호
사당 겸 재실 · 신도비 · 뒤쪽은 정창손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다
경기도문화재 지정서 비
정창손 묘역 석물(鄭昌孫 墓域 石物) 일괄 7점이다
정창손 신도비(鄭昌孫神道碑)
동산재(東山齋)
사당 · 재실 정문이다
충정사(忠貞祠)
정창손 사당이다
정창손 묘역
정창손 묘가 오른쪽 맨 위에 있다
정창손 신도비각(구 비 · 舊 碑)
조선 초기의 양식인 원부형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원래 1488년 서거정이 지었으나 깨어져 부서졌고
인조 1년(1623) 개장 때 외손 이원익이 재건하고 한준겸의 추찬(追瓚)과 심열이 글을 써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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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크기는 높이 186.5cm · 폭 73cm · 두께 24.5cm이다
정창손 묘
정창손 묘역은 정창손이 세상을 떠난 후, 연산군 10년(1504)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신도비와 석물이 함께 파손되었다
중종 원년(1506)에 원래대로 되어 다시 장례를 치르면서 석물도 세웠으며 인조 원년(1623)에 신도비를 세움으로써 묘역이 완성되었다
*
정창손 묘역 석물(鄭昌孫 墓域 石物) 일괄 7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창손 묘
왕조에서 사패지로 명시한 초장지인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에 안장되었다가
강남권 개발사업으로 1970년 이곳 하개산에 천묘하였으며, 2005년 지금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16세 계함 묘
16세 주함 묘
위에서 본 묘역이다
16세 주함 묘
17세 석 묘
17세 석 묘
충정사와 묘역이 보인다
18세 응운 묘
19세 종경 · 흥경 묘
충정사(忠貞祠) · 동산재(東山齋) 건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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