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4대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敬嬪)으로 맞이하여 헌종 13년(1847)에 낙선재를 이듬해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황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였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왕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이 영역은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었다
낙선재(樂善齋) 일원
상량정(上凉亭) · 낙선재(樂善齋)
상량정은 낙선재 후원 화계 언덕 위에 있는 육각정으로 조선 궁궐을 기록한 궁궐지(宮闕志)에는 평원루라 기록되어 있으며
장대석 기단 위에 육각형 돌 기둥을 세운 뒤 보화당초문양을 투각한 계자난간을 두루고 툇마루를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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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순종과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도 이곳에 거처하였고
영친왕의 비 이방자여사도 1989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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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다
석복헌(錫福軒)
헌종은 첫 번째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16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에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명헌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되었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경빈 김씨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집이다
석복헌 옆 마당
수강재(壽康齋)
1785년(정조 9)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으면서
공사하고 남은 자갈과 벽돌을 모아 산을 만들었는데 이를 철거하고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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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일본에서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돌아온 뒤 1989년 4월 21일 돌아가실 때까지 생활하신 곳이다
당시 낙선재에 사시던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시누이 올케 사이로 같이 의지하며 사시다 같은 해에 돌아가셨다
낙선재 일원은 그 분들이 돌아가신 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수강재
우물 2개가 밖에 있다
하나는 낙선재 일원에 사는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되었고
하나는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할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낙선재 후원
칠분서(七分序) · 삼삼와(三三窩) · 승화루(承華樓)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동궁 일대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 28)에 없어졌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 · 6각 누각인 삼삼와 · 승화루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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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으로 가면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