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소래습지생태공원(수도권해양생태공원)까지 걸었다
갯골생태공원 버스정류장
시흥시청역에서 왔다
시점이다
제7회 대한민국 조경대상 환경부장관상(생태조경부문)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사업으로 경기도 시흥시가 받았다
시간의 언덕
2014년 3월 1일, 「시흥」이라고 불리운지 1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시민의 꿈과 희망이 깃든 2,114점의 수장품을 담고 있는 「시흥 100년 타임캡슐」은 36,524일 동안 긴 시간여행을 떠난다
시흥갯골생태공원 갯골체험장
수상자전거
갯골체험장 호수를 돌 수 있다
갯골체험장
소금창고
1934년 기준, 시흥의 소래염전에 속하였던 인천출장소의 소금 판매 인원은 조선인 23명 · 일본인 6명이었다
이들 특약판매원에게 넘겨진 소금에 이윤이 붙어 소비자에게 전달되었다
일제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밀염(密鹽), 즉 비밀리 만들어내는 소금, 그리고 중국에서 들여오는 밀수 소금에 관해 취채를 엄격히 하였다
소금값이 형편없는 오늘날에는 소금창고에서 훔쳐갈 물건이 없을 수 있지만, 당대에는 고가의 전매품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던 셈이다
이러한 보물창고가 갯골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새우개마을 쪽으로 23동 · 북쪽으로 17동이 배치되었다
배로 운반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갯골을 중심으로 일렬로 배치된 것이다
멀리서 볼 때는 소금창고들이 갈대밭 속에서 위용을 자랑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으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남은 창고는 2동뿐이다
소금창고 전시장
소래 · 군자 염전이 걸어온 길 · 소금의 생산과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래 · 군자 염전이 걸어온 길
1906년 염세규정 제정(광무 10) · 1907년 일제통감부 시험용 주안염전 축조 · 1920년 염세규정 폐지
1924년 군자염전 축조 · 1926년 군자염전 제방 배수구 설치 확정 · 1930년 일제총독부 염수 이입관리령 제정
1934년 소래염전 축조 · 1937년 수인선 부설(협궤열차) · 1956년 조선염 전매령 폐지
1963년 염 관리법 제정 · 대한염업주식회사법 제정 · 대한염업주식회사 설립
1964년 전매청에서 염업공사로 염업자산 이관 · 1967년 염업조합법 제정 · 대한염업조합 설립
1971년 대한염업주식회사 · 상법에 의한 주식회사로 전환 · 정부 소유주식 매각에 의한 민영화
1986년 대한염업 남동지사 폐쇄 · 1987년 군자염전 폐염 · 1890년 염 수입 자유화
1992년 대한염업 (주)성담으로 상호 변경 · (주)성담 소래지사 폐쇄 · 소래염전 폐염
남동 · 소래 · 군자 염전 지도
면적 · 생산량 등이 있다
소래염전 염부 / 1970년대 · 고명재 기증
동료인 이성복 염부의 아버지가 무자위를 돌리는 모습이다
소금창고 단상
염전의 풍광은 정갈함을 넘어서 황량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조로운 모습이다. 그 단순함 속에 염전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 숨겨져 있다
소금꽃은 그늘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온전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피어난다
염전에서 유일하게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은 소금창고뿐이다
염분에 침윤되고, 세월의 무게를 오롯이 감내해온 소금창고는 그 건축적 태생이 목적부터 다르다
소금창고에는 치장이나 외장을 위한 군더더기가 없다. 널처럼 이어붙인 판자만 바닥과 벽면을 채우고 있다
오롯이 염전에서 채염된 소금들이 부려질 나무 바닥만 있으면 족하다. 누추하고 허름해도 비바람에 소금이 녹아내리지만 않으면 그저 족할 뿐이다
오늘도 폐염된 염전에 남아있는 소금창고의 벌겋게 녹이 슨 함석지붕과
삭아가고 있는 바람벽의 판재는 흑백사진처럼 무채색의 서글픈 모습으로 시대의 한 편으로 비켜서 있다
송홧가루 내리면 소금꽃이 핀다
염전에서는 구정이 지나 사람을 모집해서 소금 성수기에 일을 시키고, 수확기가 지난 10월 말에 염부들을 내보낸다
그래서 대부분의 염부들은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2월 중순이 되면 힘들게 겨울을 보낸 염부들이 하나둘씩 염전으로 돌아온다. 3월 중순부터 준비하여 3월 20일이 지나면 소금을 안치기 시작한다
이때는 염도가 90%로 물맛이 쓰다. 이때 나오는 소금이 죽 소금이다. 죽 소금은 소금꽃이 적게 피어 소금 입자가 작고 맛이 쓰다
죽 소금은 4월 초까지 나오고,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아카시아꽃이 필 무렵에는 구덩이에 노랗게 송홧가루가 내려앉는다
그런 날은 소금이 무한정 나오는 날이다. 이때 생산된 소금이 뒷맛이 달아 제일 맛이 좋다
소금이 네모 반듯하고 서글서글하여 이때는 소금이 술안주가 되기도 한다. 소금꽃이 염도 60~70%일 때 소금맛이 가장 달다
삼일 천기를 보는 염부
비가 오면 개도 집으로 간다. 그러나 염부들은 비가 오면 비설거지를 하기 위해 밤이고 새벽이고 부리나케 염전으로 뛰어가야 했다
소금판의 물이 빗물에 섞여 맹물이 되면 낭패여서 비에 젖지 않도록 함수 구덩이에 넣어야 했다
밤에 비가 올 것 같으면 집에도 안가고 염전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염전에는 '삼일천기'를 봐야 반장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경험 많은 염부장들이 물을 잡으라고 하면 그날 밤에는 어김없이 비가 왔다
염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해 넘어가고 바람이 스쳐만 가도 날씨를 알아 차렸다
왜가리가 북쪽으로 날아가거나, 바람이 덥다가 찬바람이 불거나 하면 비가 왔다. 당시에 일기예보는 안 맞아도 경험 많은 염부들의 감은 언제나 정확했다
비설거지를 할 때 높은 데로 나가는 물은 남자 작업수들이 하고, 느테로 나가는 약한 물을 퍼올릴 때는 여자 작업수가 수릿채를 밟는 경우도 있었다
바닷물이 맹물보다 무거워 수릿채를 밟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초보들은 수릿채에서 굴러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몇 년은 해야 겨우 익숙해진다
비가 온 다음날 비설거지하고 로라로 토판을 다지고 물을 잡아 소금을 내면 가장 깨끗한 소금이 나온다
아버지의 훈장 · 가시렁차의 추억
소금밭에서 소금을 그러모으면 목도를 메고 소금창고까지 옮긴다. 목도에 달린 소금 광주리에는 앞뒤로 100kg이 넘는 소금을 담았다
소금밭에서 그날 만들어진 소금은 간수가 덜빠진 상태여서 무겁다. 무거운 소금이 목도를 멘 염부들의 어깨를 고통스럽게 짓눌렀다
미끄럽고 좁은 둑길에서 소금창고까지 무거운 목도를 메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라 젊은 신참들이 주로 도맡아 했다
요즘에는 외발수레로 바뀌어 목도를 사용하지 않지만, 나이가 든 염부들의 어깨에는 훈장처럼 목도를 맨 흔적이 시커멓게 남아있다
*
가시렁차가 오면 소금창고에 있던 소금들을 마포부대에 60kg씩 달아서 까대기 하는 사람들이 쌓아 올렸다
보통 가시렁차 한 대에 40포대씩, 10개의 화차에 400포대를 옮겼다
소금을 옮길 때에는 포장비를 따로 챙겨주어 젊은 염부들이 서로 하고 싶어 했다
가시렁차는 1963년부터 염전 기차가 사라진 1996년 폐염될 때까지 운행한 화물열차로
시속 20km정도의 느린 속도로 10~20량 정도의 화차를 끌고 염전에서 수인선의 소래역으로 소금을 운반하였다
소금밭을 지키는 사람들
염전은 염부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희망이었다
염부의 몸은 바닷바람에 삭거나 늙어 소금밭을 떠난다
그러나 소금은 늘지 않고 늘 바닷속에서 일어나 뭍으로 나온다
가시렁차
이곳 소래염전 일대(시흥 장곡동 · 포동 · 월곶동)에서 생산한 천일염을 집하지까지 실어 나르던 작은 화물열차이다
가솔린엔진 기관차에 쇠바퀴 위로 두꺼운 널판대기를 놓은 화차를 쇠갈고리로 쭉 연결하여 사용하였다
수로를 이용하여 소금을 운송하던 것을 가시렁차 도입 이후 점차적으로 육로로 소금을 운송하게 되었다
염전에서 일하던 염부는 기관차가 "가릉가릉"하는 엔진 소리를 내서 가시렁차라고 불러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가시렁차
가시렁차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가시렁차
소금을 가시렁차로 운반하는 사진이다
엄마없는 하늘 아래 / 감독 이원세 · 원작 염재만 · 개봉일 1977년 6월 23일 대한극장
이제는 사라져버린 소래염전과 군자염전을 만날 수 있는 영화이다
염전 사택에 살며 염전 일을 하는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에게 아픔이 찾아왔다
염부인 아버지는 병이 들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된 염부 일을 하다 세상을 뜨게 된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서 어린 삼형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달프고 눈물겹지만
절망적인 가정환경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영화에 그려냈다
*
수차를 돌려 소금을 생산하는 염부, 길게 늘어진 소금창고, 소금을 운반하는 가시렁차의 장면이 등장하며
시흥의 옛 소래염전과 군자염전, 오이도 일대를 영화에 고스란히 담았다
소금놀이터
소금밭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아이들을 위한 무료 인형극 공연이 소금창고에서 있다
염전체험장
옹패판 / 1955년~1980년 초
타일이 대중화가 안된 시기에 소금의 청결성과 채취작업의 편리를 위하여 항아리 등 옹기조각을 결정지역에 깔아 사용했다
토판(土板) / 1955년 이전 염전
옛날 소금판(결정지역)은 현재와 같은 타일이 깔려 있지 않아 소금에 갯벌흙이 섞여 검은 색을 띄었다
이곳에서 채취된 소금을 토판염이라 하며, 현재 소금에 비해 청결성은 떨어지지만 각종 미네랄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여 고가에 매매되고 있다
아직도 전남 신안군에 소재한 일부 염전에서 토판소금을 생산하는 곳이 있다
흔들전망대
높이 22m · 6층 규모의 목조전망대, 흔들거리지만 구조적으로 안전한 전망대로
갯골의 뛰어난 자연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갯골생태공원의 랜드마크이다
흔들전망대 망원경
소래 논현동아파트단지
소래포구와 수도권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이 갯골 양편에 있다
흔들전망대에서 봤다
학미산
포리초등학교가 있는 포동 방향이다
학미산
예전에는 갯골을 통하여 새우 · 조기배 등이 포리포구로 들어와 소래포구 보다 더 큰 파시를 이루었다
태산아파트가 있는 포동 방향이다
양지산
시흥갯골습지센터로 가는 다리가 있다
시흥장현아파트단지
군자봉
해수 · 염전 · 갯골체험장이 앞에 있다
시흥에서 소래포구로 이어지는 갯골이다
시흥갯골습지센터로 가는 다리다
흔들전망대
다리 위에서 봤다
갯골습지센터
전시관인데 문이 잠겨져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솟대 쉼터
갈대밭 쉼터
바라지다리
포동빗물배수펌프장
철새전망대
셀프 탐조를 할 수 있게 철새 안내판이 붙어있다
철새전망대
탐조용 망원경이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학미산
시흥시 포동 방향이다
자전거다리
(주)성담 사유지 철문
1964년 전매청에서 염업공사로 염업자산 이관 · 1967년 염업조합법 제정 · 대한염업조합 설립
1971년 대한염업주식회사 · 상법에 의한 주식회사로 전환 · 정부 소유주식 매각에 의한 민영화
1986년 대한염업 남동지사 폐쇄 · 1987년 군자염전 폐염 · 1890년 염 수입 자유화
1992년 대한염업 (주)성담으로 상호 변경 · (주)성담 소래지사 폐쇄 · 소래염전 폐염
방상대교를 토끼굴을 지나 부인교로 가는 길이다
포도밭
예전 없었던 포도밭이다
부인교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가는 다리 옆으로 데크길이 생겼다
소래산
신천을 건너는 부인교에서 봤다
빨간풍차
높이 7.5m · 날개 길이 7.2m · 동력 전기모터 · 설치년도 2009년
오봉산이 뒤에 있다
인천둘레길 안내판
새로운 안내판이다
소래산
인천서창지구 아파트단지가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 해수족욕탕
요금 무료 · 운영시간 3월~11월(10시 ~ 17시) · 매주 월요일 · 강풍이나 우천시 쉰다
소래습지생태공원 전시관
갯벌체험지구가 앞쪽에 있다
소염교 변천사
소염교
1933년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소금을 가져가기 위해 만들었다
*
(1997년 12월 25일)
대영건설산업(주)
레미콘 제조업을 하는 회사인데 공장은 폐쇄되었다
논현동 호구포식당 뒷편이다
논현유호엔시티1단지 아파트 앞이다
호구포식당
호구포식당
소래역 맞은 편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이다
논현교회 연혁에 1947년 1월 15일 구 전매청사에서 창립예배를 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새로운 교회를 짓기 전 이곳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매청사로 지은 건물로 지은 듯하다
예전 소래역사(조광산업)
호구포식당 맞은 편이다
걸은 거리 9.1km · 소요시간 3시간 49분
*
(2023. 0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