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읍성(沔川邑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은 세종 21년(1439) 윤2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11월에 완료되었다
또한, 면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활발하게 축조 논의가 이루어진 읍성으로
왜구에 약탈에 대한 방어와 면천의 행정적 중심지 기능을 담당해 왔던 그 가치가 매우 큰 기념물이다
조선 후기 읍성은 사실상 기능이 상실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관아 자리에 면사무소를 건립하고, 객사를 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다
이후에도 읍성의 돌로 각종 시설을 보수하거나, 저수지 건립에 사용하는 등 읍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면천읍성은 90년대 이후 풍락루와 서벽이 복원되면서 복원정비가 시작되었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과 정비가 시작,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천향교(沔川鄕校) / 충청남도 기념물 제141호
면천향교는 1392년(태조 1)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건립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향교의 구조는 제사공간과 교육공간으로 구성되어 대성전 · 동무 · 서무 · 동재 · 서재 · 명륜당 · 내외삼문 등이 있다
1716년(숙종 42)에 대성전 등을 중수하였으며, 1966년에 대성전과 동재를 다시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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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다
골정지 건곤일초정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제직하면서 향교 앞 골정지를 정비하고 섬을 만들어 그곳에 정자를 지었다
면천군수 박지원이야기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신으로, 1797년(정조 21)부터 38개월 동안 면천군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천주교도를 교화하고, 과농소초 · 칠사고 · 한민명전의 등을 저술했다
그는 골정지를 깨끗이 정비하고, 연못 가운데 건곤일초정을 짓고 유생들에게 강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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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들이 골정지 펜스에 걸려 있다
전전교우촌황익주선생공적비(前典校愚村黃益周先生功績碑) · 해암장의환선생공적비(海巖張義煥先生功績碑)
구절산 입구 · 면천읍성 갈림길에 있다
용팔이와 숙이네 집
골정지에서 면천읍성으로 가는 길이다
면천읍성 동문지(東門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 읍성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면천읍성 동문 성벽
면천읍성 동문 성벽
안쪽은 비바람 등으로 허물어지고 있다
대숲바람길
면천읍성 동문지가 들머리다
대숲바람길
대숲의 벤치가 새로운 느낌이라 잠시 앉어 보았다
영랑효공원(令娘孝公園)
복지겸의 딸의 효성이 공원 이름으로 지어진 것 같다
안샘이 왼쪽에 있다
안샘(內井)
면천읍성 안에 유일하게 있어 안샘 또는 꽃샘(花井)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들어 위독할 때 백약이 무효하여 그의 영낭(令娘)이 배미산(아미산)에 올라가 백일기도 중
마지막 날에 신령이 현신하여 아미산에 핀 진달래꽃을 따서 안샘 물로 백일주(百日酒)를 담아 아버지께 드리고
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으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안샘물이 아니면 두견주(杜鵑酒)가 제 맛을 낼 수가 없다고 하며 부락 공동우물이 논 가운데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1992년 당진군에서 내고향 으뜸가꾸기 새마을사업으로 샘안을 석축하고 지붕을 만들어 보수 · 관리해 오고 있다
안샘 · 육각정자
당진 면천주조 면천 샘물 생막걸리공장
물 맛이 좋아 막걸리도 좋을 듯하다
조종관(朝宗館)
면천읍성 객사(客舍)는 1433년(세종 15)에 처음 세워진 이래, 다섯 차례 중수를 거쳐 1622년(현종 3)에 다시 지어졌으며
1911년 일제강점기 시절 면천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다가 1972년 면천초등학교가 확장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2022년 새롭게 복원된 객사 규모는 정청 3칸 · 서익헌 3칸 · 동익헌 5칸 등 11칸으로 그 면적은 207㎡이다
조종관(朝宗館)
면천읍성 객사(客舍) 왼쪽에 복지겸 은행나무가 있다
조종관(朝宗館)
면천읍성 객사 옆에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조종관(朝宗館)
면천읍성 객사이다
면천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551호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년 정도 된 것으로, 면천두견주와 함께 면천의 명물로 손꼽힌다
동남쪽에 서있는 나무는 운동장을 정리할 때 1m 정도 흙을 덮었다 하나 성장이 좋은 편이다
면천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551호
운동장 안쪽에 서있는 나무는 밑줄기가 썩어 커다란 구멍이 있었으나 치료한 후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
이들 은행나무에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이 면천에 귀향하여 병을 얻어 앓고 있었는데 모든 약이 효과가 없었다
그의 딸이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아미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과 안샘 물로 술을 빚어 드리고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드리면 나을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016년 9월 6일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되었다
면천 은행나무 · 복지겸 은행나무 · 무공공유허비(武恭公遺墟碑) · 면천은행나무 안내판
조종관(朝宗館)
조종관(朝宗館) 현판
문인석 · 탑 지붕동
객사 마당에 있다
면천초등학교 정문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관아자리에 면사무소를 건립하고, 객사를 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다
1972년 면천초등학교가 확장되면서 없어졌다가, 2022년 새롭게 복원되었다
책방 오래된 미래 · 진달래상회
책방 오래된 미래
자전거 수리점에서 책을 읽고 구매하는 책방으로 변신한 곳이다
책 외에도 엽서 · 문구 등을 구입할 수 있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또한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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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상회
「희망집」이라는 오래된 대폿집에서 다양한 이야기와 작품 · 장식품 등을 전시 · 판매하는 곳으로 변신하였다
면천공립보통학교 3 · 10학생독립만세운동 추모비
원용은(1902~1951) · 박창신(1900~1950) · 이종원(1899~1985)의 추모비
원용은 선생은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 · 1운동을 직접 눈으로 보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는 지역의 이종원 · 박창신 선생과 함께 3월 10일,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날 만세운동은 서울 외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학생만세운동으로 기록되었다
면천전파사 · 자양다방
풍락루(豊樂樓)
지금은 사라진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누각으로 정확한 기록이 없어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반월루라 하였으나 1852년 면천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고 풍락루기를 남겼다고 한다
풍락루라 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한 것이라 한다
그 후 노후와 붕괴될 위험이 있어 1943년 철거하였다가 2007년 철거 전의 사진을 토대로 하여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풍락루(豊樂樓) 현판
황선자 헤어샵
면천세탁소 · 터미널이용원 · KW시스템
면천읍성 서문지(西門址)
내포문화숲길 안내판
가야산 주변의 4개시군(서산시 · 당진시 · 홍성군 · 예산군)이 내포지역에 남아 있는 많은 불교성지들과 내포 천주교 성지
내포지역의 동학 · 역사인물 및 백제 부흥운동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지점들을 옛길과 마을길 · 숲길과 임도 · 하천길을 따라서 연결한
충청남도 최초 · 최대의 장거리 도보트레일로서 약 320km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내포문화숲길 내포동학길 1코스 안내판
면천읍성 서문지(西門址) 앞에 있다
면천읍성 서문지(西門址)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당진의병의 면천성 공격을 이끈 최구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4월 당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막혀 물러났다
최구현은 면천성 전투 후 36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다가 8월 24일 인본군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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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군지(沔川郡趾) 빗돌이 앞에 있다
면천읍성 복원정비계획 조감도
면천읍성은 둘레 1,336m로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면천읍성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으로 적이 성 밑에 접근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면천읍성은 성벽에 7개의 치성이 설치됐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외관상으로 4개만이 확인된다
면천읍성 각자성돌(刻字城石) · 석성종면(石城終面)
면천읍성에는 읍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각자성돌이 남겨져 있다
각자성돌은 면천읍성 공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돌에 책임 군현의 이름을 새긴 성돌이다
면천읍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연도 · 구간 책임 군현 · 축성구간 등이 새겨져 있는데
공사실명제로 공사가 끝난 후 그 구간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진다는 표지다
「조선왕조실로」 세종실록에는 50여 군의 장정들이 면천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면천읍성의 축성에 많은 군현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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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의 서벽에는 「석성종면(石城終面)」이라고 새겨진 성돌이 확인된다
「석성(石城)」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군현의 축성 흔적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 각자성돌(刻字城石) · 기미년 옥천시면 장육십척 사촌(己未年 沃川始面 長六十尺 四寸)
서치성(西雉城)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로 기미년은 세종 21년(1439)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 확인하는 축성기록과 일치한다
옥천은 충청북도 옥천으로 해당구간부터 옥천현이 축성한 구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면천읍성
성상사거리
읍성 위에서 봤다
면천우체국
읍성 위에서 봤다
농협
면천읍성 안이다
몽산(299.4m)
면천읍성 안에서 봤다
면천읍성 서치성(西雉城)
면천읍성 · 은영슈퍼 · 한주조경
면천읍성 서문지(西門址) 앞에 있다
면천읍성 남서치성(南西雉城)
서문 옆에 있는 서치성(西雉城)과 남문 사이에 있다
면천서문2길
남서치성과 남문 사이에 있는 길이다
면천자율방범순찰 · 금성전파사
원기루(遠寄樓)
면천읍성 남문 왼쪽으로 한옥체험관이 보인다
원기루(遠寄樓)
면천읍성 남문이다
원기루(遠寄樓) 현판
면천읍성 남문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려 성문에 접근하는 적이 성문을 쉽게 돌파할 수 없도록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원기루(遠寄樓)
면천읍성 남문 안쪽에서 봤다
면천읍성 남문 옹성(甕城)
현재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에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하여 전체 길이가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옹성 1개소 · 문지 4개소 ·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로
군자길
남문 옆이다
원기루(遠寄樓)
면천읍성 남문이다
한옥체험관
김가(金家) 면옥
이른 여름, 면천읍성 성안마을에서는 각 식당마다 특별한 비법을 가지고 있는 콩국수가 대세다
또한 근처 원동저수지가 있어 어죽과 추어탕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콩국수 · 어죽 · 추어탕뿐만 아니라 청국장 · 곱창 등도 빠질 수 없는 면천 별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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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콩국수를 했다
면천읍성 장청(將廳)
조선시대에는 왕궁(王宮)과 병영(兵營) 및 진(陳)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 · 현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兵房) · 군교(軍校)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
1872년 면천면 고지도에도 면천읍성 내 장청이 확인된다
특히 2017년 면천읍성 성안마을 조성을 위해 추진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1호건물지 내 이총통이 출토되었다
이 총통은 세종 30년(1448) 제조되기 시작하여 《국조오례서례》가 편찬된 성종 5년(1474)까지 제조된 것으로 면천읍성 축성연대와도 일치한다
손으로 들고 사용할 수 있는 총 중에서는 가장 큰 편이며 읍성 발굴조사에서는 처음 출토되었다
당진시에서는 2017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조하여 2018년 장청을 다시 복원하였다
면천콩국수
옛날그집 콩국수
오래된 그림책 야외전시관 · 면천읍성 지도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 역량 강화 사업 중 어르신 그림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면천읍성 치성
이곳에서 서치성 방향으로 돌아간다
면천읍성 남문 옹성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후에는 누각이 허물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이 지어졌으나
2009년 이후 시작한 면천읍성 복원정비사업으로 원기루 등 누각을 비롯한 남문의 여러 시설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2014년에 완료하였다
면천읍성 남문 옹성
면천공립보통학교 3 · 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
영세불망비 · 선정비군
관찰사 심의신 영세불망비(觀察使沈公宜臣永世不忘碑)
군수 박대화 청덕선정비(郡守朴公大華淸德善政碑)
군자정(君子亭) / 향토유적 제1호
고려 공민왕 2년(1352) 지주사(군수) 곽충룡이 관아 동쪽 은행나무 아래에 연못(군자지)을 수축하였고
그 후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 가운데 원형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정을 짓고 연못에 연꽃을 심었는데
진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군자와 같아서 군자정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옛 선비들이 머물러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었던 곳이었는데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면천복씨 종친회장 복진구가 원래의 주춧돌을 둔채 규모를 축소하여 6모정을 지었다
이후 이것도 퇴락하여 1994년 당시 당진군에서 6모정을 헐고 8모정으로 다시 지었다
군자정으로 건너는 돌다리는 자연석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길이 7.4m · 폭 65cm로 1803년 축조된 것이다
군자정(君子亭) 현판
낭관호(郎官湖) 빗돌
낭관호는 일명 남호(南湖)로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한양(漢陽)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당나라 이백(李白)이 야랑(夜郞)으로 귀향을 가
그의 친구 상서랑(尙書郞) 장위(張謂) · 면주목(沔州牧) 두공(杜公) · 한양재(漢陽宰) 왕공(王公)과 더불어 남호에서 술을 마셨다
장위가 이백에게 호수의 이름을 좋게 지어 영구히 전하게 할 것을 전하니, 이백이 술잔을 들어 물에다 붓고 나서 남호의 이름을 낭관호로 개정하였다
이백이 지은 범면주성남낭관호(泛沔州城南郎官湖) 시에
사좌취청광 위환고래무 낭관애차수 곤호낭관호(四坐醉淸光 爲歡古來無 郎官愛此水 困號郎官湖)라고 하였다
「사방에 앉은 사람이 맑은 빛에 취하니, 고래에 없는 즐거움을 누렸네. 낭관이 이 물을 좋아하기에, 그로 인해 낭관호로 불렀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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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명명지호재면주(李白命名之湖在沔州) · 을묘 이봉(乙卯 李俸)이 빗돌 좌우에 써있다
초원콩국수
면천읍성안 그미술관
예전 면천우체국 건물을 최소한의 리모델링한 것으로 현관 옆에 빨간 우체통과
페인트로 덮었지만 현관 이마에 「면천우체국」 글자가 남아 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3 · 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