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寧陵)은 조선 제7대 효종(孝宗 · 1619~1659 ·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 1618~1674)의 능이다
효종대왕이 1659년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구리시 동구릉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에 틈이 생기는 문제가 일어나자 1673년(현종 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에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 조성하여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다
영릉(英陵)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12지를 한자로 새겼다
과거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세우지 않던 전통이 선릉(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가, 영릉에서부터 또다시 사라지게 된 셈이다
여주 영릉과 영릉(麗州 英陵 · 寧陵) 안내판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능)과 후릉(정종과 정인왕후 능)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영릉 · 영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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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영릉길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숲이다
영릉 재실(寧陵 齋室) / 보물 제1532호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 · 종9품)과 령(令 · 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효종 영릉 재실은 원래 현종 즉위년(1659)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능을 만들 때 근처에 지었던 것을
현종 14년(1673) 이곳으로 옮기면서 함께 지었으며, 안향청 · 제기고 · 재방 · 행랑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없어져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 ·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재실은 2007년 11월 27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행랑채
대문 · 하인방 · 마굿간 · 창고 등이 있다
행랑채 부속동
제방
평상시에는 참봉이 머물며, 제사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 천연기념물 제459호
회양목은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은 사철 푸른 나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와 같이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 온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2005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기고
제사에 쓰는 그릇을 보관하는 곳이다
제기고
안향청
제사에 쓰는 향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향청 행랑채
대문 · 하인방 · 마굿간 · 창고 등이 있다
제기고 · 제방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영릉(寧陵) 향 · 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에 약간 높은 길은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香路)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고 한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넘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선왕의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정자각(丁字閣) · 금천교(禁川橋)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영릉의 금천교는 홍살문을 지나 향어로 중간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각(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자취를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정자각(丁字閣) 내부
제상(祭床) · 향상(香床) · 축상(祝床)이 있다
영릉 표석(寧陵 表碑)
신도비는 태조 대부터 세종 대까지만 세웠고이후의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다
현종 대부터 다시 세울 필요가 논의되어 숙종 8년(1682)에 조선 왕릉 중 처음으로 영릉에 표석(表石)을 세웠다
표석 앞면의 글은 이정영이 썼고, 뒷면의 글은 심익현이 썼다
영릉 표석(寧陵 表碑) 번역문
기해년(1659) 5월 4일(갑자일)에 효종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 훙(승하)하여
같은 해 10월 29일(병진일)에 양주 건원릉(태조의 능) 근처 오른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계축년(1673) 10월 7일(계묘일)에 여주 영릉(세종의 능) 동쪽 홍제동 자좌오향(남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다음 해 갑인년(1674) 2월 24일(무오일)에 인선왕후 장씨가 훙(승하)하여 같은 해 6월 4일(무술일)에 (대왕릉) 왼쪽 아래에 장사지냈다
수복방(守僕房)
수라간(水刺間)
수라는 원래 몽고어로서 탕미(湯味)를 뜻하며 수라를 짓는 주방을 의미한다
영릉(寧陵)
조선 제17대 효종대왕(孝宗大王)과 인선왕후 장씨(同妃 仁宣王后 張氏)의 능(陵)이다
효종대왕은 인조(仁祖)의 제2자(第2子)로서 광해군(光海君) 11년(1619년) 5월 22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漢城府 中部 慶幸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 · 호(號)가 죽오(竹梧)이며 모후(母后)는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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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에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 조성하여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다
영릉(英陵)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12지를 한자로 새겼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5.7km, 소요시간 2시간 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