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순교성지는 1797년(정사박해)부터 1872년까지 박해가 있었던 곳으로서
조선시대의 순교자 약 1만 명 가운데 충청남도 서북부(내포)지역의 교우 1천여 명이상이 순교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름을 모르는 순교자로 남아 있으니
그 이유는 당시 해미현은 무관영장이 지역통치를 겸한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조정의 시책과는 무관하게
자유로이 박해를 하면서도 중앙에 보고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이며 이가운데 인언민(마르티노) · 이보현(프란치스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부이신 김진후(비오) 3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었다(2014. 8.16)
그리고 이곳은 처형 방법이 사약 · 몰매 · 교수 · 참수 · 동사와 함께 사람을 살아 있는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트려 죽이는 수장형장이었다
1935년 프랑스 발오(Barraux · 범베드로)신부님에 의해 순교자 유해를 찾게 되었고 뼈와 치아 · 머리카락을 모신 기념관에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다
생명의 책
프란치스코 교황(2014. 8. 14~14)이 이곳 해미순교성지에서 이루어진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조형물이다
작품 속 호야나무는 과거 천주교 박해의 아품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염원하고자 하였다
*
재료 스텐레스 스틸 헤어라인 · L 4,000×B 3,000×H 450 · 제작년도 2014
생명의 나무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하는 기념물로 교황이 방문기간 동안 남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나무에 새겼다
기단석은 서산시의 지형을 형상화 시켰으며, 기단석의 띠석은 바티칸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나무 열매는 교황의 메시지인 사랑 · 희망 · 소통 · 협력 · 존중 · 평등을 종으로 제작하여 메시지의 울림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빗돌
신앙 선조들의 죽음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온 한티고개에 있던 돌이 이곳으로 옮겨져
이제는 생매장 순교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대성당 일주문
대성당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한국 해미 순교자들의 교구성지를 국제성지로 설정하며
2020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탄생 200주년 희년에,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에서
*
교회법전이 말하는 것처럼(제 1231조, 제1232조 참고) 성지의 종류는 세 가지다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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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에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상
소성당 입구다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안내도
마르첼리노의 기적(The Miracle of Marcelino)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시르바의 전기적인 소설
마르첼리노, 빵과 술에 등장하는 주인공 어린이 마르첼리노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
*
전후 황폐한 스페인 산촌의 한 수도원에 남자아이가 하나가 버려진다
아이를 길러본 경험이 없는 12명의 수사들은 갓난애를 키워줄 가정을 찾지만 여의치 않자 몸소 그 아이를 키운다
훌쩍 5년이 흘러 귀여운 악동이 된 마르첼리노는 누구나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엄마를 그리워하게 된다
어린 마르첼리노는 다락방에 있는 십자가에 어떤 아저씨가 못 박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빵을 가져다주는데
그 때마다 예수님이 그 빵을 드신다
다락방 출입이 잦아진 마르첼리노는 주방 수사 몰래 훔친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주고 예수님은 마르첼리노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다
마르첼리노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고, 예수님은 그러면 잠을 자야 한다며 마르첼리노를 품에 안고 재운다
그런데 마르첼리노를 미행하던 수사가 이 기적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다른 수사들에게 알리고, 다른 수사들 역시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잠시 후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르첼리노는 소원대로 하늘에 계신 엄마를 보기위해 잠든 상태에서 엄마를 만나러 천국으로 가며 죽음을 맞이한다
*
해미 순교 성지 대성전 입구에 걸려 있다
팔각의 탑
세상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고 계시는 주님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탑으로 파수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를 상징하는 대성전과 다리(브리지)로 연결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는 파수꾼
해미순교성지기념관(유해참배실)
유해들을 왕릉의 형태를 본 따 떼를 입힌 봉분 형태로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다
말하자면 묘지인 셈이다
성모마리아
팔각의 탑 맨 윗 층이다
소성당
대성당을 축소한 형태이다
소성당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본받아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천정의 십자가와 함께 밝은 톤의 문창살로 벽을 꾸며 환한 집 안을 나타내고 있다
시복기념비
인언민(印彦敏 · 마르티노) / 김진후(金震厚 · 비오) / 이보현(李步玄 · 프란치스코)
형구돌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지시로 고안된 잔혹한 형구다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쪽에 세운 다음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 구멍에서 잡아당겨 죽이는 끔찍한 교수형구다
순교 자리개 돌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이다
1956년 3월 오기선(요셉)신부와 서산본당 신균식(도미니코)신부가 찾아내어 서산 동문동성당으로 옮겨 보관하다
1986년 9월 원래 위치로 옮겨 놓았는데 해미도시계획 도시개설로 인하여 2009년 1월 8일 생매장 순교성지(여숫골)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감(縣監)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군무참의(軍務參議) 등의
애휼선정비(愛恤善政碑) ·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청덕불망비(淸德不望碑) · 충절전망비(忠節不望碑) 등
뒤에 누워 있는 빗돌을 합해 11개의 빗돌이 있다
병사이후택애휼군졸선정비(兵使李侯澤愛恤軍卒善政碑)
진둠벙(죄인둠벙)
팔을 묶여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둠벙 속에 쳐박혀 죽게하였다
이 둠벙에 신자들을 빠뜨려 죽였다 하여 마을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 이라 일컬어지다가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리어진다
유해 발견 당시,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다
발견 장소인 진둠벙교 다리 밑과 기념관 옆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야외성전
야외성전 십자가
진둠벙 빗돌
이 돌을 1988년 7월 14일에 대전교구 신학생들이 세웠다
십자가의 길 제3처 호야나무에 달린 순교자
십자가의 길 조형물은 죄수의 목에 채우던 큰칼 형상으로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묘사하였다
야외제대 · 복자상 · 순교탑 · 무명순교자의 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가 앞에 있다
해미순교탑 · 무명순교자의 묘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이곳 해미 생매장터에서 발굴하여 1935년 4월 2일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원위치로 옮겨 모셨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경갑룡 요셉
진둠벙교(유해발굴지)
순교탑 · 복자상 · 팔각의 탑 · 기념관
순교탑 · 무명순교자의 묘 · 복자상
인언민(印彦敏 · 마르티노) / 이보현(李步玄 · 프란치스코) / 김진후(金震厚 · 비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하신 해미순교자 3위 복자상이다
여숫골 빗돌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마리아" 기도소리가 구경을 하던 외인들에게는 "여수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수골》이라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렇고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해미지역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말씀
*
해미순교성지기념관(유해참배실) 앞이다
유해참배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1935년 프랑스 발오(Barraux · 범베드로)신부님에 의해 순교자 유해를 찾게 되어
순교자들의 뼈와 치아 · 머리카락을 모신 유해참배실이다
*
발굴된 유해가 상홍리 공소 쪽에 모셔져 있다가 다시 본래의 장소인 생매장 터로 모실 때
김종수 주교의 의견으로 진토된 유해는 순교탑 앞에 모시고
아직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치아와 유골은 직접 뵙고 참배할 수 있도록 투명한 아크릴로 진공 포장해서 따로 모셨다
이름없는 집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성서 이어 쓰기를 하고 있다
쓰기 성경 방이다
성경쓰기는 기도이다
이 기록물은 이곳에 영구 보존한다
황사영백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1775~1801)이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국내 사정을 알리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기입한 밀서다
그 속에는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증언도 담겨 있었다
원본은 의금부에서 압수하였는데 1894년 이후 우연히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입수해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교황에게 전달했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실제 크기로 복사한 것이다
성모자상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7.4km, 소요시간 4시간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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