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鳳儀山 · 300.3m)
춘천분지 중앙에 우뚝 솟은 잔구(殘丘)로 마치 상서로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것 같다고 해 유래하였다
춘천분지는 북쪽 오봉산(779m) · 서쪽 삼악산(654m) · 동쪽 대룡산(899.4m) · 남쪽 금병산(652.2m)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분지이다
춘천 번개시장
유림모텔이 시점이다
번개시장 벽화문화거리
소양정길 문화명소 안내판
소양로비석군 앞에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하사목
옛 소양로파출소가 있던 자리에 있다
소양로 비석군 / 향토유형문화유산 제2017-1호
소양1교 주변과 춘천 관내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1940년과 1983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보호하고 있다
비 가운데는 조선시대의 종이품직으로서 지금의 도지사급인 관찰사비 3기
종삼품직으로서 시장급인 부사비 15기 · 종사품직인 군수비 2기 등 총 26기가 있다
강원도지사 이범익 영세불망비 · 친일파 이범익 단죄문
일제강점기 대표 친일파인 이범익의 비는 그가 강원도지사로 재임하던 1934년 3월에 세워졌다
이범익은 1912년~1913년 춘천군수 · 1929년 11월~1935년 3월까지 강원도지사를 지냈다
특히 강원도지사 재임 전후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앞장서 옹호하였으며, 여러 번 포상을 받았다
1937년에는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다 그해 11월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省長)에 임명되었다
1938년 9월에는 그의 제안으로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가 창설되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살해하였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을 체포 · 강간 · 약탈 · 고문한 부대다
1942년 5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조선 최대의 감격, 영예 완수에 최선을 다하자"라는 환영담화를 발표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그해 8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 후 6 · 25전쟁 중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이승만 탄신기념비( 李承晩大統領閣下 第八十一回誕辰記念)
소양정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춘천 절기 전계심묘비(春川 節妓 全桂心墓碑)
춘천에서 태여난 관기 전계심 무덤 앞에 있던 묘비이다
외형적으로는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훼손되어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비석에 불과하나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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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심은 조선 22대 정조 때 천한 가정에서 태여나 기생이 되었으나 17세 되던 해 춘천부사의 소실이 되었다
행복도 잠시 부사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나 기회를 보아 데려가겠다는 약속만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 소식도 없는 약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서울의 기방에 팔아버렸다
계심은 어쩔 수 없어 기방에 있게 되었으나 이미 부사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부사가 자신을 찾아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고결한 성품과 곧은 절개를 꺽어보려는 사내들의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은장도를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모진 마음을 먹고 정숙하게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폭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유린 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게되자
사랑했던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계심이 자결하던 날, 계심이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와 보니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부사는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 봉의산록에 장사지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순찰사가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을 세워주었고
1796년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뜻을 모아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춘천절기 전계심묘비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생의 묘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무덤은 본래 봉의산록 소양강변에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 이곳으로 옮겼다
소양정 전망대
소양2교
삼성아파트 · 동부아파트가 소양강 건너에 있다
공병중대 전적지
6 · 25동란 초기 이곳에 배치되었던 6사단 공병대 1중대가 소양교를 건너 공격해 오는 적과 혈전을 전개했던 장소다
소양정 전망대 옆에 있다
소양정(昭陽亭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
창건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말 문인 운곡 원천석의 시에 「소양정」이라는 명칭이 쓰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인 15세기에는 「이요루(二樂樓)」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1647년(인조 25) 춘천부사 엄황이 정자를 수리하면서 현재의 소양정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소양정은 본래 소양강변에 있었으며, 1780년(정조 4) 부사 이동형이 홍수로 유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6년 현재의 위치에 정면 4칸 ·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재건립되었다
소양정(昭陽亭) 현판
재건립 당시 강원도지사였던 박경원(朴敬遠)의 글씨다
소양정(昭陽亭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
소양정은 소양1교 옆 자락에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된 이후
후평동과 소양로 간 도로가 개설되면서 1966년 봉의산 중턱의 현재 자리로 이전 중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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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문화원은 소양정과 관련된 78편의 시문을 발굴 · 정리하였다
기문 2편 · 한시의 한 갈래인 부 1편 · 한시 75편이다
이 중 시대별 · 시문별로 우수한 작품을 선발해 판각으로 제작해 걸어 놓았다
2012년, 소양정에는 1966년 중건 당시 기록인 기문과 부 등 5개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등소양정(登昭陽亭) /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鳥外天將盡(조외천장진) 날아가는 새 따라 하늘은 끝나려는데
吟邊恨不休(음변한불휴) 시름따라 한스러움은 그치지 않는구나
山多從北轉(산다종북전) 산들은 북쪽에서 굽이쳐 내려오고
江自向西流(강자향서류) 강물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雁下沙汀遠(안하사정원) 기러기 내리는 모래톱은 저 멀리에 있고
舟回古岸幽(주회고안유) 배 돌아오는 옛 언덕은 그윽하구나
何時抛世網(하시포세망) 언제나 세상 그물을 던져버리고
乘興此重游(승흥차중유) 흥을 타고 다시 여기 와서 놀아볼거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석축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봉의산성이 있던 곳 같다
정상 · 충원사 갈림길 방향안내판
운동시설
정상 바로 밑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운동시설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봤다
안내문
정상부에 1973년부터 운용하던 통신시설을 2013년 산림생태복원을 통해 철거하고
봉의산의 옛 모습을 되찾고자 산림으로 복원한 곳이다
정상 바위
일본어가 새겨져 있다
봉의산(300.3m) 정상 빗돌
4년전 올랐을 땐 없던 빗돌이다
전망대
순의비로 내려가는 길이다
춘천시내
북쪽 오봉산(779m) · 서쪽 삼악산(654m) · 동쪽 대룡산(899.4m) · 남쪽 금병산(652.2m)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레고랜드 코리아리조트
오른쪽으로 보인다
춘천 봉의산성 / 강원도 기념물 제26호
이 산성은 언제 쌓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세기 이후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217년(고종 4) 거란족 일파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고려사에서는 1253년(고종 40) 몽고병이 침입하자 춘천 주민이 이 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는데
몽고병의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성안의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소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게 되는 등 비참한 광경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돌파구 마련을 위해 교주도 안찰사 박천기가 조직한 결사대의 공격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산성이 함락되자 대부분의 군 · 관 · 민이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진을 쳤던 곳이며 6 · 25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춘천 봉의산성 / 강원도 기념물 제26호
산성 둘레는 약 1,280m에 달하며 높이는 5~6m 내외이나 지형에 따라 다르다
성벽은 대체로 붕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에는 석축이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1991~1994년에 복원공사를 하였다
봉의산신 위(鳳儀山神 位)
봉의산순의비 옆에 있다
봉의산순의비(鳳儀山殉義碑)
고려 고종 40년(1253) 몽고군이 춘천에 침입하였을 때에는 이 고장의 관민이 봉의산성에서 몽고군과 대치하여 줄기찬 항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군세가 적에게 미치지 못한데다가 식수마저 끊기어 소와 말의 피로 해갈을 하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기로 굽힐줄 모르는 항거를 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참전했던 군민이 함께 이 산에 피를 뿌리고 전사를 했으며 끝까지 생존하였던 관민들은
적에게 굴하여 욕되게 사느니 보다 깨끗한 대의에 순하겠다고 가족과 함께 자결을 결행했던 곳이 바로 봉의산이다
나라를 지키려다 뿌린 선열의 숭고한 피가 스며있는 산성은 허물어진채 오늘까지 그 잔영이 전하고 있으나
대의에 순한 이름모를 수많은 선열들의 절의는 세월속에 잊혀져 가고 있기에
여기 이분들의 고혼을 달래고 그 충절을 길이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1983년 6월 2일
삼악산
봉의산순의비 앞에서 봤다
춘천 혈거유지로 가는 길이다
한림대학교로 내려오는 계단이다
춘천 혈거유지(春川 穴居遺址)
신석기시대 사람이 살던 생활유적으로, 1962년 춘천 성심여자대학(현 한림대학교)의 건축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당시 세 사람의 뼈가 동굴 가운데로 발을 모은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봉의산 동쪽 산허리에 위치한 이 동굴은 천장에 연기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처음에는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가 나중에 무덤으로 이용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세 사람의 뼈와 함께 돌도끼 · 돌칼 · 돌화살촉 · 이음낚시 등의 도구
옥 · 수정 조각 · 백마노 조각 등의 장신구 그리고 바닥이 평평한 질그릇 5점이 나왔는데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춘천 혈거유지(春川 穴居遺址) /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호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의 집터(움집)는 여러 곳에서 발굴되어 있으나 인공적으로 동굴을 파고 살던 것은 드물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이 동굴은 1962년 춘천 성심여자대학(현 한림대학교)를 조성하기 위해 터를 닦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동굴의 입구가 잘려나간 상태지만 본래의 모습은 이렇게 열려 있는 공간이 아닌
산기슭 입구의 좁은 통로(굴)를 통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눈으로 확인되는 내부공간의 바닥 직경은 약 4m의 원형이고 천장의 최고 높이는 2.1m이다
한림소프트웨어융합대학
한림대학교 동물위령비(動物慰靈碑)
실험동물센터에서 각종 실험으로 생사를 달리한 실험동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한림대학교 박물관
생각하는 사람 · 작명등 · 문인석 · 주초연화석 · 동자석
분수대
춘천향교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유몽인의 〈어우집〉에 따르면 1520년(중종 15)에 부사 이만손이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594년(선조 27)에 부사 서인원이 고쳐 지었다
한국전쟁으로 대성전이 파손되었으나 1960년에 복구하였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륜당(明倫堂)
편액은 흔히 주자(朱子)로 불리는 주희의 글씨를 집자한 편액이다
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 등 5성(聖)과
좌우편에는 우리나라 18현(賢) · 송나라 2현(賢) 등 25위의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7m · 둘레(가슴 높이) 260cm · 나이 120년 · 1982. 11. 13
공부자묘정비 · 엄황흥학비 · 지계사호성비 · 장헌근모성비 · 하마비
신흥막국수
1976년 문을 연 2대 가업 음식점으로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두 차례 나왔다
주문 즉시 반죽하여 국수를 내리는 집이다
메밀가루 반죽
100프로 순 메밀가루만 쓴다
직접 국수를 내리는 중이다
국수를 물에 빠는 중이다
손메밀막국수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6.87km, 소요시간 7시간 5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