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13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따서 강원도를 만들고 원주에 감영을 설치했다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간 512명의 관찰사가 이곳을 거쳐갔다
포정루(布政樓 · 사적 제439호)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진입공간에서 첫 번째로 위치한 출입구다
1395년(태조 4) 강원감영을 설치할 당시 건립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34년(인조 12) 강원감영을 복원할 때 재건되었다
포정루의 의미는 강원도에 부임한 관찰사가 시행하는 「정사가 두루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포정루(布政樓) 편액
중삼문(中三門)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 · 중삼문 · 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은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 편액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강원감영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직했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사 되기도 하였고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원주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 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 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서 찾은 것이다
도관찰사 윤공영신영세불망비(都觀察使尹公榮信永世不忘碑)
징청문(澄淸門)
내삼문은 진입공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고 이곳에서 방문자는 강원도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내삼문 고유의 명칭인 징청문이라는 편액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을 들어서면서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다만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이 상기해야 할 덕목이다
징청문(澄淸門) 편액
문을 들어서면서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이다
선화당(宣化堂)
강원도 관찰사의 집무실이다
선화당의 뜻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 · 농정 · 조세 · 민원 · 군사훈련 · 재판 등에 대한 총괄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선화당(宣化堂) 편액
전 최규하 대통령 글씨다
선화당(宣化堂) 단청
내아(內衙)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책방(冊房)
도서를 수집 · 보관했던 공간으로 오늘날 도서실이나 자료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책방(冊房) 편액
강원감영 사료관 · 행각(行閣)
조선시대 500년간(1395, 태조 4~1895, 고종 32)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옥(獄)
강원의 순교자들이 안에 있다
강원의 순교자들
감옥 안에 걸려 있다
강원도관찰사 행차도
관찰사 행차 인원은 관찰사를 보좌하는 도사 · 찰방 · 심약 · 검률 등을 포함해 몇 백 명에 이르기도했다
행차에는 말과 감사마교를 비롯해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과 기를 앞세웠다
사오갑 · 병부 · 교서 · 절월 등을 가지고 나팔과 태평소를 불면서 행차하였다
일각문
강원감영 후원 권역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각 · 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와 한 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 후원 권역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게 신선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 즉 신선세계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이후 한 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었다
영주관(瀛洲館)
영주관은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산(三神山) 중 하나인 영주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1897년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남긴 「정선총쇄록」에 의하면 밖에는 관풍각 · 안에는 영주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관풍각(觀風閣)은 풍속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의 관풍찰속에서 따온 이름이다
연못 가운데 있는 영주관을 드나들기 위하여 건물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무지개다리를 설치하였다
아치형 다리를 놓은 것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이다
영주관(瀛洲館) 편액
봉래각(蓬萊閣) · 조오정(釣鰲亭) · 채약오(採藥塢)
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 건물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원이 연못 북쪽에 가장 먼저 세웠다
1704년 관찰사 홍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세웠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신완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르는 곳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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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정은 전설에 나오는 자라를 낚는 정자라는 뜻으로,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여섯 자라는 다섯 산을 떠받치다가 거인 용백에게 잡혀 죽었다는 신선세계 전설에 나오는 자라다
봉래각(蓬萊閣) 편액
봉래각(蓬萊閣) · 채약오(採藥塢) · 관풍각(觀風閣)
채약오는 신선이 먹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선명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관풍각(觀風閣) 편액
느티나무 보호수
남근목을 만지면 아들을 얻는다는 소문 때문에 밤중에 부녀자들이 몰래 들어와 치성을 드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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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높이 25m · 둘레 600cm · 나이 600년 · 지정일자 1982. 11. 13
느티나무 보호수
둘로 갈라진 나무줄기 한 쪽에 돌출된 부분이 남성의 그것을 닮았다
작품명 김금원의 여행일기 / 박인자
김금원(1817~1853)은 원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성시인이자 여행가다. 호는 금원(錦園)이다
김금원이 14세때, 남장을 하고 첫 여행지인 금강산으로 향하는 첫 걸음을 디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관리사무소 · 포정루 · 중삼문 · 내삼문
선화당 앞에서 봤다
관리사무소
강원감영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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