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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갑곶순교성지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 · 우윤집 · 최순복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갑곶순교성지 빗돌 / 천주교 인천교구 50주년 영성센터

 

 

 

 

예수성심상

 

 

 

 

지하성당

 

 

 

 

갑곶순교성지 빗돌

왼쪽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성지로 가는 길이다

 

 

 

 

성모상

 

 

 

 

성당

성지로 가며 내려다봤다

 

 

 

 

기도처

 

 

 

 

순교자 삼위비(초 봉헌대)

갑곶에서 순교하신 박상손(朴常孫) · 우윤집(禹允集) · 최순복(崔順福) 세 분의 빗돌이다

 

 

 

 

갑곶십자가

 

 

 

 

갑곶십자가 · 순교자 삼위비

잔디밭에선 갑곶순교성지와 순교자 세 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물방

시간이 늦여서인지 문이 닫혔다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베드로 · 1830~1911) 묘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 지금의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부친 박 바오로는 아들 박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박순지(요한) 등 몇 몇 신자들과 함께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외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순교 역사의 증거자가 된다

*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전망대

왼쪽 나무데크를 따라 내려간다

 

 

 

 

야외제대 예수님상

 

 

 

 

통제영학당 터(인천 기념물 제49호) 빗돌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때인 1893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로 지금은 터만 남았다

개항과 더불어 해양방어의 일환으로 군함의 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으나

인재 부족 · 재정궁핍 · 청나라와 일본의 방해 등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이곳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등으로 인해 교육이 순조롭지 못하다가 1896년 5월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자 폐교되었다

 

 

 

 

우물터

 

 

 

 

갑곶순교성지 빗돌

갑곶순교성지 후문이자 강화나들길로는 갑곶성지 들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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