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역사문화관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가계도 · 업적 · 조선왕릉 · 광릉 · 광릉숲 등에 대해 전시해 놓은 곳이다
광릉역사문화관과 광릉관리소
광릉역사문화관 내
광릉
사대석(병풍석)이 없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능) · 후릉(정종 · 정인왕후 능)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조선왕릉 분포도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 · 원이 13기 · 묘가 64기이다
세조 · 정희왕후 광릉
조선 제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는 형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승하하고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단종 즉위 2년(1453)에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위를 이어받았다
세조의 가계도 · 세조와 정희왕후의 연보 · 세조의 유훈과 광릉
세조의 가계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145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0세 나이에 요절한 뒤
차남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였으나 예종마저 즉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율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정희왕후는 13세의 성종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세조 · 정희왕후 연보
세조와 정희왕후의 혼례가 세조 21세, 정희왕후 10세 때다
세조는 관직의 정비 · 공납제도의 개혁 · 호패법 실시 등으로 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경국대전」의 편찬을 추진하여 대전(大典) 체제의 완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조의 유훈과 광릉
광릉은 능 내부에 석실을 만들지 않고 능 내부와 관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 방식으로 조성하여 소요 비용과 인력을 절약하였다
또 같은 이유로 사대석(병풍석)도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에 사대석에 새겼던 12지신을 난간석 기둥에 새겨 넣게 되었다
이러한 회격 방식은 세조 이후 조선왕릉 조성의 새로운 규제가 되었다
세조의 국장절차 · 조선왕릉 · 광릉 동영상
세조의 국장 절차
예종 즉위년(1468) 9월 7일, 임종이 가까워진 세조의 명으로 세자가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식을 올리다
9월 8일 세조, 수강궁 정침에서 승하하시다
9월 10일 종묘와 사직에 부음을 전하고 세조를 목욕 시킨 후 9벌의 옷을 입히다
9월 11일 세조에게 22벌의 옷을 입히다
9월 12일 90벌의 옷을 입히고 빈전에 관을 넣은 찬궁을 두고 재궁을 모시다
9월 16일 예종, 상복으로 갖추어 입고 대신들과 빈전에 나아가 곡을 하다
9월 25일 세조의 묘호 · 시호 · 능호 · 혼전을 정하다
11월 28일 세조를 광릉에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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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 20일만에 90벌의 옷을 입고 광릉에 모시다
광릉의 역사 · 관리 · 어제와 오늘 · 생태계의 보고 광릉숲
광릉의 역사
광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剛陵)이다
광릉의 관리
조선시대 왕릉의 관리자인 능관은 주로 종9품 참봉 2명으로 구성되었다
광릉의 능관에 대한 기록으로는 1796년 참봉 김종선이 쓴 「광릉지」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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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 근처에는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례를 지내는 사찰을 지정하였는데 이를 능사 · 원찰 · 조포사라 하였다
광릉의 능사는 세조비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해 후원하여 중창된 봉선사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1469년 세조를 추모하여 제작한 범종이 남아있다
광릉의 어제와 오늘
광릉에는 광릉이 조성된 이래 받들어 모셔온 산릉제례가 지금도 매년 세조의 기일인 양력 10월 2일에 봉향되고 있다
생태계의 보고 광릉숲
조선시대 내내 조선왕릉 능역 내의 땅은 출입이 금지된 지역으로 경작 및 나무 채취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 중 광릉은 지금까지 자연 경관 및 생태 서식이 단연 으뜸으로 뛰어나다
광릉숲은 생태계 보존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 석실로 조성한 조선왕릉 · 2. 회격으로 조성한 조선왕릉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예전 동구릉에서 여러 번 본 내용 그대로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