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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중림동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다

약현이란 이름은 당시 이곳에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설립 당시 순교자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가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었다

 

 

중림동 약현성당(사적 제252호)

천주교 박해시기의 순교자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봤다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동산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지나 중림동 약현성당을 오르는 언덕 길이다

 

 

 

 

옛 서소문순교성지 현양탑(임송자 교수 작품)

1984년 서소문공원에 건립된 옛 현양탑은 1997년 서소문공원을 다시 건립할 때 중림동 약현성당 내 14처 기도동산으로 옮겨졌다

옛 현양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인접 건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제작자와 협의하여 옛 현양탑 상부를 제거하였다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상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인 약종(若鍾)의 둘째아들이며, 약용(若鏞)의 조카로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 순교하였다

어머니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도 그 해 순교함으로써 정약종 가족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 택한 순교자 가족이 되었다

 

 

 

 

십자가의 길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중림동약현성당(사적 제252호)

약현성당은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하여 1892년 완공하였다

1898년 완공된 종현의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먼저 세워진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벽돌조 성당이다

 

 

 

 

중림동 종현성당

명동성당이 완공되기까지 사제 서품식이 두 차례 거행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시적으로 주교좌성당의 역활을 수행하기도 했다

 

 

 

 

중림동 약현성당

1977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2월 방화로 성당 안이 거의 전소되었으나 1999년 9월 옛모습을 찾았다

오른쪽 뒷편에서 봤다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서소문 순교성지

조선 왕조의 또 다른 공식 처형장인 새남터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는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평신도들의 순교터다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조광호 신부 작품)

왼쪽이 현재 · 오른쪽이 옛 서소문 밖 순교성지 현양탑이다

 

 

 

 

서울대교구 내 성지와 순례지

서소문 순교성지 · 절두산 순교성지 · 새남터 순교성지 · 삼성산 · 당고개 순교성지 · 광희문 · 명동성당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등이 있다

 

 

 

 

신유박해 순교자

최초의 대규모 박해로 처형된 사람이 약 100명, 유배에 처해진 사람이 약 400명에 이른다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하여 박해의 근거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신유박해로 말미암아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고

살아남은 교인들도 산간벽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어 한국 교회는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승훈 베드로(1756~1801)

한국 최초의 영세자로 이가환의 생질이여 정약용의 매부다

서울 출신으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1784년 귀국하여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황사영 백서

 

 

 

 

성 정하상 바오로

축일 9월 20일 · 신분 신학생 · 순교자 · 활동연도 1795~1839년

 

 

 

 

기해박해

1839년 한 동안 계속된 박해로, 이 박해로  참수 순교한 신자는 전국적으로 70명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70위가 시성되었다

시파인 안동김씨와 벽파인 풍양조씨 사이에 당파 갈등이 박해의 직접적인 요인이다

 

 

 

 

기해박해 순교자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박해였다. 특히 경기도와 서울에서 가장 큰 박해가 가해졌다

박해가 심하고 전국적인 규모였던 만큼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도층 신자들의 순교로 신앙은 서민층으로 확대되었으나 박해 때마다 교우들이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천주교가 점차 지방종교로 변하고 교우들이 현실생활을 외면하는 경향도 더욱 짙어졌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기해일기

'천주강생 일천구백오년, 광무 구년'이라 써있다

 

 

 

 

병인박해의 전모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조선 사신들의 보고(1866년 1월)를 듣고

집권 안동김씨 세력이 서양인과 천주교도를 처형하라는 압박을 대원군에게 가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병인박해의 성인

성 남종삼 요한 · 성 전장운 요한 · 성 최형 베드로

 

 

 

 

성 남종삼 요한 초상화

 

 

 

 

신명초행 하권(1864년 목판 초간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이며 제5대 조선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가 저술한 신앙생활을 위한 묵상서다

 

 

 

 

성찰기략(1864년 초간)

다블뤼 주교가 저술한 고해성사 준비를 위한 성찰서다

 

 

 

 

성요셉성월(1887년 활판인쇄 초간본)

요셉성월의 신심서로 1862년 중국에서 간행된 '중국대주보성약슬성원'의 한글역으로

내용은 요셉 공경에 대한 것으로 요셉 공경의 의미와 묵상 및 요셉의 행적 등이

요셉성월이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31일 분량의 일과 형식으로 실려있다

 

 

 

 

성모성월(1887년 활판인쇄본)

1857년 중국에서 간행된 성모성월(5월) 신심묵상서다

중국 예수회 선교사인 이탁이 저술한 것으로 1857년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간행 직후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모 소 제대

옛 성당 좌편 회랑에 있던 제대로 제2차 바티칸공회의 이전 벽 제대다

옛날에는 성당 중앙 제대를 '대제대'라 하고 회랑에 있던 제대를 '소제대'라 하였다

성모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성모 소제대'라고 한다

같은 소 제대가 옛 성당 우편에도 있었으나 없어지고 성모 소 제대만 남았다

 

 

 

 

피어라 순교자들의 꽃들아!

약현성당의 설립과정과 1900년대 약현성당의 전경 사진

그리고  조선교구 제7대교구장 블랑 백 주교와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민 주교의 사진이다

 

 

 

 

고상(苦像)

1890년대 교우 가정에서 소장하였던 벽걸이용이다

 

 

 

 

십자고상

왼쪽은 1890년대 지니셨던 고상이고

오른쪽은 1894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충북 음성군 감곡 천주교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임 가밀로 신부께 세례받은 황학서 토마스님이 당시 구입한 것이다

 

 

 

 

십자고상

1900년대 벽걸이용 고상이다

 

 

 

 

한국 천주교 연표

 

 

 

 

제병 굽는 틀

미사 때 사용하는 빵을 제병이라 한다

예전에는 제병을 본당마다 만들었는데 이 유물은 제병 만들 때 사용하던 기구다

 

 

 

 

제병 재단기

구워진 제병을 알맞은 크기로 자르던 기구다

 

 

 

 

성경직해 제3권

한역서학서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디아스(1574~1659) 저술했다

1636년 북경에서 전 14권이 초간되었고 내용은 주로 복음성서의 해설을 위주로 하여

교회력에 따른 주일과 축일의 복음성서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주해를 붙였다

 

 

 

 

사후묵상

일반 신자들이 죽음을 묵상토록하기 위하여 1894년 르장드르(1866~1928) 신부가 저술한 책이다

총 128면에 한글로 쓴 이 책에는 사후묵상이라는 제목과 함께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그 뒤에 '론사심판이라', '론디옥이라', 론뎐당이라', '공심판이라' 그리고 연옥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옛 성모님

옛 성당 좌편 회랑 성모 소제대 위에 위치하던 성모상으로 성당은 전소되었지만 성모상은 그을리기만 하였다

 

 

 

 

고 김선영 요셉 신부님 유해 일부

중림동 약현본당 출신의 사제로 만주지역에서 사목하다 선종했다

 

 

 

 

역대 사목자들

 

 

 

 

조선 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 백 주교

박해로 거의 다 쓰러져 가던 조선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887년 약현 본당의 모체가 될 서소문 밖 공소를 세웠다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민 주교

신앙의 자유를 찾은 조선 교회에서 순교자의 현양과 한국 교회사의 정립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문 밖의 교우들을 위해 약현 본당을 설립한 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 건립에도 많은 지원을 했다

 

 

 

 

성 요한 데 리베라(1월 6일)

에스파냐의 알칼라의 공작이던 베드로 데 리베라는 아들 성 요한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물려 주었다

1557년 25세의 요한은 사제가 되었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한편 바다호스의 부교를 거쳐 발렌시아 대주교가 되었다

특히 성체 신심에 탁월했던 그는 장기간의 병으로 고생하다가 선종하였다

1796년 복자로 선포되었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중림동약현성당 뒷편

 

 

 

 

중림동 약현성당

왼쪽 뒷편에서 봤다

 

 

 

 

중림동 약현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