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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고려)

후삼국으로 분열된 통일신라 말기의 상황은 고려가 태조 19년(936)에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 왕조가 된 고려는 고구려 옛 땅을 향한 북진정책과 발해 유민 포용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해 신분 상승의 길을 넓히고 농민들의 세금을 완화함으로써 통일신라에 비해 한층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오대산사 길상탑지(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진성여왕9년 · 895)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되었던 탑지 4매 중 하나로 원래는 오대산사의 길상탑을 위한 것이다

탑지 4매는 각각 해인사, 운양대, 백성산사, 오대산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해인사 묘길상탑에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대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상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도 승군을 애도하는 글이 있다

 

 

 

 

'정개' 명 편운화상 부도 탁본(후백제 견훤왕 19년 · 910)

후백제의 연호가 새겨진 남원 실상사에 소재한 승탑을 탁본한 것으로 '정개 10년 경오년(910)에 (부도를) 세운다'라는 내용이다

정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 견훤왕 때 연호로 보인다

 

 

 

 

'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후백제 견훤왕 9년 · 900 · 전주 동고산성)

후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수막새다

가운데에 '전주성이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비해 다소 열세였으나 태조 왕건이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을 우대하고

혼인 정책(왕건 부인 29명) 등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점차 전세를 역전시켜갔다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는 고려 태조(고려 충렬왕 33년 · 1307)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을 때 담무갈보살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태조가 담무갈보살을 친견한 후 '정양사'를 세웠다는 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담무갈보살은 화엄경 12,000부처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부처로 항상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금강산 그림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인종 시책과 무덤에 넣은 함(고려 인종 24년 · 1146, 장릉 출토)

인종의 시호와 생전의 업적 등을 돌에 새겨 무덤에 넣은 시책이다

마름꽃 모양의 내함과 마름모 모양의 외함이 한 조를 이룬다

내함은 청동으로 만들고 주석으로 도금하였으며 외함은 이암으로 만들었는데

표면에 진사 등의 성분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원래 무늬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유적에서 발견된 뼈항아리를 넣은 석재 외함과 비교하여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은수저(고려 인종 24년 · 1146)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은수저와 젓가락이다

 

 

 

 

청자 참외 모양 병(고려 12세기)

고려 인종(재위 1123~1146)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가 거의 유사한 청자 병으로 12세기 순청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조선 선조 6년 · 1573, 경주부 간행본)

고려 인종 23년(1145) 인종의 명으로 당대 최고의 유학자 김부식의 주도하에 편찬된 관찬 역사서이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전체의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고려 관리 강민첨의 초상화

고려의 명장으로 현종 9년(1018)에 강감찬과 함께 10만의 거란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 11대 왕 문종은 그를 기리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서 공신각에 모시게 했다

 

 

 

 

대표적인 문벌 경원이씨와 왕실의 혼인관계

고려 최고 문벌의 기틀을 마련한 이자연의 묘지명과 경원 이씨와 왕실의 혼인관계 표

문종의 장인이자 순종, 선종,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1003~1061)의 묘지명이다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과 혼인시켰는데 맏이인 인예태후가 순종, 선종, 숙종을 낳았다

또 손녀 하나는 순종의 비가 손녀 둘은 선종의 비, 증손녀 셋은 예종 비와 인종 비가 되었다

경원 이씨는 이자겸 이후 문종 대부터 인종 대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대표적인 고려의 문벌이 되었다

 

 

 

 

문벌 출신 학자 관료 최윤의의 묘지명(고려 의종 16년 · 1162)

고려 중기이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 최윤의(1102~1162)의 묘지명이다

최윤의의 가문은 해주최씨로 고조부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 이래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손꼽히는 문벌이 되었다

최윤의는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문예문' 편찬자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향리

고려시대 지방사회의 구심점은 향리였다

그들은 비록 수령 아래에서 행정 말단을 책임진 실무자였지만 한 때 그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의 후예답게 상당한 지위를 누리며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호장 김지원 녀 묘지명(고려 개성출토)

'樂浪金氏女 父戶長智源' 낙랑(경주의 다른 이름) 김씨의 딸이다. 아버지는 호장 지원이다

경주 호장(향리의 최고위직) 김지원의 딸 묘지명이다

아버지 이름만 새긴 것은 미혼으로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향리의 딸이 미혼인 채 개경에 묻힌 연유는 알 수 없다

혹 지역 대표로 개경을 오가던 아버지를 따라왔다가 사망하자 개경에서 장례를 치른 것일 수도 있다

여덟 잎 꽃 모양의 묘지명은 어린 딸에 대한 아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듯하다

 

 

 

 

연조귀감(조선 고종 27년 · 1890)

조선 정조 1년(1777) 이진홍이 고려부터 조선 말까지 뛰어난 향리들의 사적을 모아 3권 2책으로 정리한 책이다

고려의 향리 55명의 열전으로 성명, 자호, 관력, 일화 등을 출전을 밝혀 수록하였다

고려의 향리가 나말여초 호족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밝힌 부분도 있다

 

 

 

 

금속화폐 사용을 주장한 의천의 초상화

고려시대의 기본 화폐는 쌀 · 베 등의 물품화폐였으나 표준화된 금속화폐도 몇 차례 주조 · 유통되었다

최초의 금속화폐는 성종 15년(996)에 주조된 건원중보라는 철전인데 강력한 반대론에 부딪혀 약 6년만에 유통이 중단되었다

동전 유통 정책은 승려 의천의 건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의 상업 발달속에서 물품화폐에 의존하던 문벌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 물품화폐가 제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동전은 그리 오래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동통보(고려 숙종 7년 · 1102)

숙종 7년 숙종의 명으로 주조 · 발행한 동전이다

앞면에는 '해동통보'라 새겼는데 전서체가 특히 많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고려 정부는 이 해에 해동통보 15,000관을 문무 양반 관리와 군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주점 등을 개설하여 이를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등 동전 유통에 노력하였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뜻한다

 

 

 

 

바둑알(고려 개성출토)

고려 수도 개경에서 상류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바둑돌이다

바둑두기는 거문고타기, 활쏘기, 말타기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상류층 필수 교양이었다

 

 

 

 

청동물병

정병은 목이 긴 형태의 물병으로 원래 종교적 의물이었다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데 깨끗한 물은 사람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씻어준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찰 뿐만 아니라 도교사원 관청 등에서 두루 사용하였고 부잣집에서는 생활용품으로도 사용하였다

 

 

 

 

은제 약합(고려 12세기) / 은제 금도금 합(고려 12세기 개성 출토) · 은제 장도초(고려 12~13세기) / 은제 금도금 침통(고려 개성출토)

 

 

 

 

강진청자의 바닷길 운송

강진은 부안과 함께 고급 청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한 그릇들의 주요 소비층은 고려 지배층이었다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청자와 목간을 통해서도 강진 청자의 바닷길 운송경로를 확인 할 수 있다

 

 

 

 

선박에 실은 청자 꾸러미

가마터에서 생산된 청자는 운반하기 쉽도록 수십 개 단위로 포장되어 뱃길을 따라 개경에 공급되었다

꾸러미에는 물건을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물건과 수량 등을 적은 꼬리표 목간을 달았다

 

 

 

 

정병(고려)

고려시대의 도자기 하면 흔히 청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이 생활 용기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청자와 같은 자기가 아니라 도기였다

 

 

 

 

항주 명 동경(송 개성 출토), 호주 명 동경(송 개성 출토)

좌측 '항주대륙가청동조자'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거울은 명문으로 볼 때 중국 항주의 대륙가라는 공방에서 제작되어 고려에 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형태 · 내용의 거울이 고려와의 교류가 특히 활발했던 송 대에 많이 만들어진 점 항주의 위치 등을 볼 때 북송이나 남송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주 권준묘 출토 송전(송 파주 서곡리 출토)

고려 말 재상 권준(1281~1352)의 무덤에서 나온 송나라 동전들로 10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주조된 것이다

이처럼 몇 세기 앞선 송나라 때의 주조된 동전들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것은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경제 교류가 그만큼 활발하였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송나라 동전들이 고려사회에서 오래도록 화폐로 기능을 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들 송나라 동전은 다양한 시기에 고려 유적에서 전국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개성 출토 송나라 도자기들

중국과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송 · 원 등의 도자기도 많이 수입되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지역에서 왕궁터와 무덤, 절터 등을 중심으로

경덕진요에서 제작된 청백자를 비롯하여 요주요, 정요, 자주요, 월요 등에서 제작된 다양한 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도자기들은 왕족과 문벌귀족을 비롯한 고려 상류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불화엄경소(고려 14세기)

중국 당나라의 실차난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한 징관의 해석과 부연 설명을 송나라 승려 정원이 각 본문 아래 기록해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찍은 목판은 정원이 고려로 가는 상인을 통해 의천에게 전달한 것이다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할 당시 정원과 깊이 교류하였다

이 책은 고려와 송의 대표적 고승을 통해 이루어진 불교 교류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다

인쇄 상태로 보아 이 판본의 인쇄 상태는 14세기로 추정된다

 

 

 

 

초조본 유가사지론(고려 11세기 전반)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의 제32권을 당시의 경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의 가호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하였다

 

 

 

 

흥국사 석탑기 탁본(고려 현종 12년 · 1021)

흥국사 석탑에 새긴 탑기를 탁본한 것이다

흥국사 석탑은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948~1031)이 전쟁 2년 뒤인 형종 12년(1021)에 건립한 탑이다

오래오래 나라가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명장 강감찬의 우국충정이 새겨져 있다

 

 

 

 

거란자명(거란 개성출토)
거란 소자가 새겨진 청동거울이다

거울 꼭지를 중심으로 네모난 테두리 안쪽에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장수복덕'으로 읽히는 거란 문자 네 개가 양각되었다

같은 양식의 거울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점, 이 거울이 개경에서 출토된 점을 미루어

당시 거란에서 대량 제작된 거울이 고려에 수입되어 실제 개경 주민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북관유적도첩 중 척경입비도

이 그림은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길주 · 공험진 등 9성을 쌓고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로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경원 여진자비(금 함경 졍원 동원면 화동 절터, 1156년 추정)

함경도 경원 지방에 중국 금나라 사람들이 세운 비다

현재까지 확인된 여진 문자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 지역 '오룡초사'라는 절의 건립 및 불상 제작과정, 시주자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를 통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여진 문자와 여진 인명, 지명, 관명 및 어휘와 형태소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무신정권

농민의 유망과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이어지며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문벌을 견제하려던 의종이 측근에 치우쳐 향락과 실정을 거듭하자

평소 차별 받던 무신들과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폭발하였다

고려는 호족, 문벌귀족에서 무인세력 그리고 친원파 권문세족으로 이어갔다

 

 

 

 

강화의 고려 왕실 무덤

고려가 몽골과 맞서던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임시 수도였던 강화에는 왕릉급 무덤이 여럿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 2001년 석릉, 2004년 곤릉, 가릉 2006년에는 능내리석실분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을 통하여 강화 고려 왕릉에 면모를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강화 고려 왕실 능묘 출토품(고려 13세기)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 왕실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 일부이다

금속, 유리, 옥 등으로 제작된 장신구와 그 외 여러 출토품을 통해 강화 천도 시기 고려 왕실 문화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불교 결사 운동

불교 본연의 실천이나 지방사회의 현실과 멀어진 데에 대한 자기 반성의 움직임이었다

지눌은 경전공부와 참선이 본래 하나라는 '정혜쌍수론', 깨달음 이후에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론' 등을 말하면서

모든 승려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두루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여러 주장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 성립으로 나아갔다

 

 

 

 

사신문 석관(고려)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석관이다

또껑 바깥 면에는 비천상과 꽃을, 안쪽 면에는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을 새겼고 안쪽에는 격자무늬를 새겼다

4개의 측면 판석 바깥 면에는 돌아가며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을 양각하였고 안쪽 면에 꽃과 꽃병을 선각하였다

사신이 둘러 지키고 꽃이 흐드러진 석관 내부에서 죽은 이는 안식을 누렸을 것이다

 

 

 

 

금동보살좌상(14~15세기)

생각하는 듯한 온화한 미소를 띤 보살상이다

 

 

 

 

청자나한상(고려 13세기) / 청자나한좌상(고려 13세기)

얼굴을 위로 향하고 있는 민머리의 승려 모습의 나한상과 민머리의 웃음 가득한 자비롭고 인간적인 나한 모습이다

 

 

 

 

동국이상국집(조선 후기)

고려 무신정권의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인 이규보(1168~1241)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자체가 뛰어난 문학 작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팔만대장경과 대몽항쟁

 

 

 

 

용장산성의 궁성

 

 

 

 

말 모양의 토제품과 철제품(고려 진도 용장산성)

고려 원종이 원(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무신정권을 옹위하던 삼별초는 배중손 지휘하에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곳곳의 농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항전하였고

고려 · 원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된 후에도 김통종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후퇴하며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273년 제주도까지 함락되면서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만에 진압되었고 이로써 대몽항쟁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청자 도석인물상 주자(고려 12세기)

고려에는 정부 주도하에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의례 중심의 도교가 크게 성행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도교는 불교처럼 조직적인 대중 종교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민간에서 수명 연장이나 북을 비는 도교적 습속을 지켜나가는 정도였다

 

 

 

 

청자 '소전색' 명 잔

고려시대에 도교 제사를 담당하던 소전색이라는 관청에서 사용하던 제기로 추정되는 잔이다

산화 변조되어 녹갈색을 띠는 잔의 표면에 철과 안료로 '소전색'이라고 썼다

소전색은 복원궁, 구요당, 대청관 등의 도교 사원들과 함께 조선 건국 직후 폐지되었다

 

 

 

 

고려시대 종이문서

 

 

 

 

서천 추동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종이문서

중국 동전과 청동거울을 싸고 있던 종이 문서이다

종이는 닥나무로 만들었으며 먹으로 쓴 글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무덤 주인공의 묘지이거나 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천 추동리 고려시대 무덤

서천 추동리 지역은 금강이 서해로 유입되는 요지로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어 선사시대부터 손색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분묘와 주거지가 확인된다

서천과 천안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고려시대 돌덧널무덤과 움무덤 등 342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그릇, 젓가락, 동경, 동전, 자기 그릇 등 생활용구 등과 함께 먹으로 글을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연복사종명 탁본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어진 연복사 종의 명문을 탁본한 것이다

이곡(1298~1351)의 글을 성사달의 글씨로 새긴 이 명문에는 종을 만들게 된 과정과 원나라 황제를 축수하는 윤문이 새겨져 있다

 

 

 

 

수령옹주 묘지명(고려 충숙왕 복위 4년 · 1335)

고려 왕족의 부인 수령옹주(1281~1335)의 묘지이다

수령옹주는 14살에 왕온과 혼인했으나 29살에 남편을 여의고 3남 1녀를 키웠다

그러던 중 고명딸을 원나라 공녀로 보내게 되자 그 슬픔으로 병이나 죽었다

왕온은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넷째 아들 평양공 기의 10세손이다

 

 

 

 

조삼장 만호 조충 명 와당(고려 14세기 익산 진구사터 출토)

조삼장은 원나라 간섭기의 실력자 조인규(1237~1308)의 넷째 아들인 승려 조의선을 가르킨다

삼장은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별호이다

만호 조충은 조의선의 조카이자 조인규의 손자인 조충신일 것이다

숙부(조의선)가 주석하던 진구사의 기와 불사에 시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황유 칠보무늬 대야(원 개성 출토)

원 간섭기의 지배세력을 흔히 권문세족이라 하는데 그 중심에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권력을 얻은 이들이 있었다

몽골어 통역으로 원나라 및 고려의 왕실과 밀착한 사람,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또는 그 가족과 혼인한 자, 고려 왕과 혼인한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사람 등과 이른바 부원세력이 그들이다

 

 

 

 

삼국유사

고려 후기 선승 일연(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 무렵에 엮은 책으로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등 기존의 문헌들이 기록하지 못한 설화, 불교 관계 기사 등을 널리 모아 정리하였다

제왕운기와 함께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의 많은 부분을 밝히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현 초상화

익재 이제현(1287~1367)은 안향에 이어 성리학을 보급 연구한 백이정의 문인이며 이색의 스승이다

 

 

 

 

회헌실기(대한제국 순종 3년)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안향(1243~1306)의 글과 말, 기타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모은 책이다

안향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고려에 보급하였다

그의 호 회헌은 흠모하던 주자의 호 회암에서 딴 것이다

 

 

 

 

성리학의 도입

 

 

 

 

공민왕 부부 초상화

 

 

 

 

정몽주와 길재의 편지

 

 

 

 

삼봉 정도전의 문집

고려 말 성리학자이자 급진개혁파의 신진사대부로서

이성개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고 그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삼봉 정도전(1342~1395)의 문집이다

 

 

 

 

이성계 발원 사리구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구이다

가장 안쪽의 은제 도금 탑형 사리기와 이것을 넣는 은제 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청동 발, 백자 발 순으로 포개어 납입되었다

곳곳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성계가 임금에 자리에 오르기 전인 1391년 부인 강씨 등 만여 명과 함께 발원하여 만들어 봉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산대첩비명 탁본

고려 말 신흥 무장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을 기념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운 승전비다

이 탁본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원래의 비를 탁본한 것이다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썼다

현재 남원시 운봉면에 있는 비는 1957년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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