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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7세기 중엽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국제정세는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이렇게 형성된 남북국시대는 당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와 발해, 일본이 공존하는 비교적 안정된 국제 정세가 유지된 때였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우선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여 왕경인과 지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관등을 주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율령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해 갔다행정구역은 지방을 9주로 나누고 다시 특별 구역으로 5소경을 두었다

이러한 제도의 개선과 새로운 행정 구역의 개편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국가의 틀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으며

새로운 국가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국토의 통일신라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애행)'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

「三國遺事」 券第三 興法 第三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 본래부터 불교의 인연이 깊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고, 이 설은 이후 본격적인 '불국토설'로 전개되었다

국가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대중적인 종교로 변모시켰으며

불교를 통해 사회 안정을 이루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용하고 융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통일 이후에는 주로 화엄종과 법성종 등의 종파가 유행하였고

하대에는 선종이 전래되어 구산선문이 형성되는 등 선종 불교가 주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천왕상 전돌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은 탑의 기단을 장식한 것으로, 기단 네 면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3개씩 총 24개가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키는 형태로 배치되지만

사천왕사 탑의 기단에는 3개의 신장만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철불(鐵佛)

충남 서산 전 보원사지 · 1918년 입수 /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8~9세기

통일신라 불상은 토착적인 신라의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백제와 고구려 조각 양식을 흡수하는 한편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통일신라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성립했다

통일신라 불상 중 가장 완성된 예가 바로 8세기 중엽 경 석굴암 본존불이며, 이 시기를 정점으로 통일신라의 불상 조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이후 신라 사회의 모순과 선종의 유행으로 약사불과 비로자나불이 등장하며, 금동불이 줄어들고 철불이라는 새로운 불상이 유행했다

 

 

 

 

석굴암

경주 토함산 정상부 동쪽에 있는 사찰로 창건 당시 이름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

석굴암을 만드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석굴암 만드는 과정

본존불을 앉히고 받침돌 위로 29개 판석을 세우는 과정의 동영상이다

 

 

 

 

팔부중

석탑 기단부에는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여덟 명의 신들인 팔부중상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다

 

 

 

 

국가 권력과 의례

통일신라는 수도인 경주의 사방 입구에 성전사원이라는 사찰들을 건립하여 수도를 천하의 중심이자 불국토의 중심으로 연출했다

 

 

 

 

사리갖춤

신라 왕실의 원찰 중 하나인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됐다

문무왕의 장자인 신문왕과 그 비인 신목왕후 그리고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말 · 토끼 상(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김유신 묘 8세기, 곱돌)

 

 

 

 

 · 말 상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민애대왕릉 8~9세기, 곱돌)

 

 

 

 

가위 · 손칼 · 판(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월지 출토 이례 유물 8~9세기, 납)

 

 

 

 

동아시아와의 교류

신라방이 설치되었던 당은 물론 일본, 서역과도 교류를 했다

 

 

 

 

삼채 서역사람

높은 코와 큰 눈 등 뚜렸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사리단지(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전 황룡사지 8~9세기, 은)

 

 

 

 

향을 담는 그릇(중국(당) / 출토지 모름, 금동)

 

 

 

 

청자 뼈 항아리(중국(오대) / 경주 삼릉 부근, 청자)

 

 

 

 

보산화 무늬 전돌(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월지 8~9세기, 토제)

 

 

 

 

발걸이(남북국시대 / 황해도 평산 9~10세기, 철)

 

 

 

 

용 머리 꾸미개(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월지 8~9세기, 금동)

 

 

 

 

병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출토지 모름 7~8세기, 녹유) · 항아리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전 경상도 7~8세기, 녹유)

통일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물을 받아 들였고

그 결과 왕경 유적에서는 당으로부터 수입된 도자기나 금공품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돌함과 뼈 단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8~9세기, 돌 녹유)

당삼채가 유통되던 신라에서도 삼채 비슷한 기술로 만든 녹유토기가 유행하였다

녹유토기는 표면이 낮은 온도에서 발색되는 연유 계통의 녹유를 발라 구워 낸 토기다

주로 7세기 전후에 출현하였으며 통일신라에서는 뼈단지로 주로 사용되었다

 

 

 

 

풍탁 말흘리 출토 유물(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남 창녕 9~10세기)

창녕 말흘리의 건물터 주변 작은 구덩이 안에서 많은 풍탁과 장식판 등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불전을 장식하는 장엄구이거나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꽃 모양 접시(남북국시대(통일신라) / 황해도 평산 9~10세기, 청동)

통일신라 말 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 지방 세력들은 주로 변경의 군진이나 상업과 대외 교역이 발달한 곳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장보고가 활동한 남해 청해진 지역과 당과의 교역로였던 북방의 패강진 지역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출토된 유물은 변경의 군진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통일신라의 지방 사회

9주 5소경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실행으로 중앙의 행정력이 각 지방에 고르게 미치게 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왕경 귀족

제49대 헌강왕대에는 도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밥을 짓는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노래 소리와 피리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한다

 

 

 

 

사냥 무늬 전돌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흥륜사지 8~9세기, 토제)

 

 

 

 

옷걸이(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월지 8~9세기, 금동)

짐승 얼굴 모양 문고리(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월지 8~9세기, 금동·청동)

 

 

 

 

인형(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용강동 석실분 8세기, 토제)

 

 

 

 

짐승 얼굴 무늬 기와(남북국시대(통일신라) / 경주 월지 8~9세기, 녹유)

 

 

 

 

후삼국의 분립

8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귀족연립적인 성격으로 복귀하고 있었고

이것은 혜공왕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정변을 통하여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