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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 부여, 삼한)

사진이 많아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포스팅하고

다시 고조선 · 부여 · 삼한을 하나로 묶어 올린다

 

 

고조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

이후 발달된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중국 랴오닝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을 주요 무대로 중국 연(燕) · 진(秦) · 한(漢)과 대등하게 겨루었다

특히 고조선은 중계 무역 문제로 일어난 한과의 전쟁에서 1년여에 걸쳐 맞설 만큼 강성한 국가였으나

오랜 정쟁으로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할 무렵, 각 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일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요령식 동검 / 전남 여수 월내동 2010년 발굴

고조선의 특징적인 청동기인 요령식 동검은 몸체가 비파라는 악기를 닮아 '비파형동검'이라고도 불린다

전형적인 요령식 동검의 형태는 검몸(劒身)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 조합하는 형식으로, 한 몸으로 만드는 중국식 동검과는 차이가 있다

요령식 동검은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을 중심으로 지린(吉林), 한반도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옥 장신구 / 30. 경남 진주 대평리 1997년 발굴 / 31. 32 전남 여수시 평여동 1993년 발굴 / 33. 경북 칠곡 복성리 1996년 발굴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탁자식 고인돌은 판돌을 지상에 세워 평면이 네모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 놓은 형태다

팽이 모양의 토기, 옥 등이 출토되는 탁자식 고인돌은 중국 랴오둥, 지린 지역, 한반도 서북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같은 시기 고조선에서는 고인돌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 돌널무덤, 돌무지널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미송리식 토기

고조선의 대표적인 토기(미송리식 토기)이다

평안북도 의주 미송리의 동굴 유적에서 처음 발견되어 '미송리식'이라고 부른다

이 토기는 납작한 바닥에 아가리가 점차 벌어지는 형태로 통통한 몸체에 띠 모양 손잡이가 마주보게 달려 있다

주로 돌널무덤에서 출토되며 청천강 이북으로부터 랴오닝, 지린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청천강 이남 한반도 서북지역에서는 팽이 모양 토기가 사용되었다

 

 

 

 

한국식 동검

기원전 5세기 무렵 청천강 이남을 중심으로 한국식 동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한국식 동검은 요령식 동검과 같이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었으나, 검몸이 직선화하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과 마디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 청동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을 비롯하여 공구, 거울 등의 의기들이 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 움무덤(土壙墓) 등에서 검은간토기, 덧띠토기, 옥, 돌화살촉과 함께 출토된다

 

 

 

 

칼 거푸집

청동기는 채취한 광석을 녹여 얻은 구리와 주석이나 아연, 납 등을 섞은 용액을 거푸집에 부어 만든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생긴 거친 흔적을 숫돌로 갈아 날을 세운다

이러한 과정에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고, 이에 따른 기술의 진보와 향상은 교역의 증대, 생산력의 향상, 사회 분업 등을 가져왔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성장

한국식 동검 문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도 강력한 지배자의 출현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괴정동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들에서는 청동무기, 공구, 의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껴묻거리의 양적 · 질적 차이를 통해서 사회적 계층이 명확히 구분되는 정치 집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의 등장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는 한국식 동검 문화가 성숙하여 투겁창, 꺾창 등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고

청동기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정교한 잔무늬 거울도 제작된다

고조선은 전국시대 나라들 중 하나인 연나라와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은 철기 사용을 통해 더욱 발전하였다

철기 문화는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어 점차 남부 지역으로 퍼졌다

 

 

 

 

명도전(明刀錢)

손칼 모양 동전 앞면에 명(明)자가 새겨져 있어 명도전이라고 부른다

대개 수십 매에서 수천 매에 이르기까지 나무상자, 단지나 항아리에 담겨 구덩이에 묻힌 채로 발견된다

 

 

 

 

고조선과 진(辰)

고조선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생산력이 늘어나 경제가 발전하고 이에 걸맞는 통치조직을 확립하였다

같은 시기 남한지역에는 진(辰)이 존재하였다

전라북도 장수 남양리,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 유적 등을 통해 볼 때 최고의 수준의 청동기를 제작하고

철기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서남부 지역의 진의 중심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북 완주 갈동 2003년 발굴 / 19. 도끼 / 20. 한국식동검 / 21. 잔무늬거울 / 22. 23. 대롱옥

 

 

 

 

경기 가평 달전리 / 1. 고리자루칼 / 8. 칼 / 7. 한국식 동검

고조선과 한(漢)

중계무역으로 성장한 고조선은 한나라의 대규모 침략에 맞서 1차 전쟁을 승리하고

1년여에 걸쳐 겨룰 정도로 강성한 국가였으나, 내부 분열이 일어나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평안도 · 황해도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한국식 동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나무곽무덤이 계속 유행해

옛 고조선 지배 세력들이 자신의 기반을 상당 부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문화의 파급

북한강 유역에 있는 가평 달전리 움무덤에서는 배부른 단지, 화분 모양 토기 등과 함께 한국식 동검, 쇠가지창 등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1세기 대로 추정되는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이 일괄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이후 유이민들의 이동을 통해 고조선 문화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 삼한

고조선 멸망 전후, 중국 동북지역에는 부여, 고구려, 한반도 동북지역에는 옥저, 동예, 중남부지역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삼한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마한 · 진한 · 변한은 점차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하면서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였다

철기의 사용으로 국가의 지배 질서도 빠르게 확립되었다

 

 

 

 

고구려 · 옥저 · 동예 · 삼한 지도

 

 

 

 

부여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5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국가이다

영역은 중국 지린성 일대로 추정되는데 중심지는 주변 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왕은 중앙을 지배하고 지방은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관리들이 통치하였다

농업과 목축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말과 구슬, 모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부여 왕실의 후손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지배 계층이 되었으므로 부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포 운양동 유적 등

 

 

 

 

옥저 · 동예

옥저는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읍락의 군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고구려의 견제와 지배를 받으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옥저의 문화는 두만강 일대의 단결-크로놉카 문화로 추정된다

*

동예는 한반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옥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로, 각 읍락들은 산과 물을 경계로 영역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노예나 동물로 변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철기문화의 발전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 ·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 사용으로 향상된 경제력은 정치, 경제, 사외,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로 만든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중국 한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평양 석암리 9호무덤 1916년 발굴 / 2. 창 / 4. 청동 손잡이 / 5. 금동 손잡이

무력과 권위

청동 무기는 철제 무기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하게 된다

철제 장검 등 철제 무기는 나무 집과 함께 칼코등이, 허리띠 걸이 등 부속구가 수반되고, 원격용 무기인 청동제 노기도 발견되었다

석암리 9호 무덤에서는 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공구가 드물게 출토되었다

한편, 기원 전후 낙랑고분에는 실용 마구가 부장되지만 중원의 한 대 무덤에서는 명기(明器)가 부장되는 차이를 보인다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1916년 발굴 / 허리띠 고리

금판 위에 수천 개의 금 알갱이를 붙였고, 큰 용 한 마리가 중앙에서 꿈틀거리고, 그 주위로 6마리 작은 용이 바짝 붙어 있다

53.9g(14.3돈)의 순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다

 

 

 

 

석암리 9호 무덤 1916년 발굴 / 금동 손잡이

석암리 9호무덤은 가장 풍부한 청동 그릇의 조합상을 보이는데

술을 담거나 데우는 그릇인 동준, 동종, 동형과 음식물을 끓이거나 데우는 그릇인 동정, 동부 등의 기형이 출토되었다

청동 그릇의 부장은 기원 1세기대 일부 무덤에서 확인되며, 이후 벽돌무덤 단계에 이르면 흙으로 만든 명기가 부장된다

 

 

 

 

칠기와 장신구

낙랑고분에는 식기류를 비롯하여 무구류 등 다수의 칠제품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중 연대가 적혀있는 칠기에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 등이 새겨 있어 당시 제작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팔찌와 반지는 출토 상황으로 보아 남녀의 구별 없이 착용하였던 것 같다

 

 

 

 

마한

중부 일대,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중반에 존재한 소국 연맹체였다

목지국을 중심으로 54개 소국 연맹체로 구성된 마한은 중부 지방에서는 중도 유형 문화, 호서 지방에서는 방형 집자리와 주구토광묘

호남 지방에서는 주구묘와 독널무덤을 남기며 토착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충남 천안 청당동 1996년 발굴 / 화살촉

 

 

 

 

진한

기원 전후부터 경주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2개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로국에 의해 통합되어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했다

고고학적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만들어 쓰고 주머니호와 쇠뿔손잡이 항아리, 다양한 철기를 부장하는 특징이 파악된다

 

 

 

 

경북 경주 탑동 2010년 발굴 / 14. 15. 거울

 

 

 

 

변한

삼한의 하나로 마한의 동쪽 진한의 서쪽에 위치하며, 지금의 김해지방에 있던 구야국 등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변진으로도 불리며, 이들 중 대부분이 뒤에 가야 연맹체를 구성했다

중국 군현과 왜(倭)에 철을 수출한 철 산지로 유명하다

 

 

 

 

경남 창원 다호리 1988년 발굴 / 4. 창 / 3. 칼 · 칼집 2. 검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묘 목관

 

 

 

 

삼한의 대외 교류

한반도를 벗어나 중원, 오르도스, 왜(倭)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로 수출하였고, 실제로 남부 지방의 여러 유적에서 중국 및 일본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 세발솥, 거울, 동전 등은 중국과의 교류 흔적이며, 야요이 토기 · 청동 투겁창 등은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교류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고대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계 / 5. 오수전 / 6. 반량전 7. 화천 / 8. 화포 9. 오수전 10. 화살촉 / 화포 거푸집

 

 

 

 

의례

삼한의 조개더미에서는 뼈와 뿔로 만든 생활도구들과 함께 점치는 뼈가 출토된다

점치는 뼈는 사슴이나 멧돼지의 어깨 뼈에 미리 줄을 맞추어 둥근 홈을 판 후 불로 지질 때 나타나는 금이 간 모양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친 것이다

부여에서는 전쟁을 앞두거나 나라의 큰일을 할 때 언제나 점을 보았다

점복이나 의례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진행되었다

 

 

 

 

점치는 뼈

1. 전만 해남 군곡리 1986년 발굴 / 2. 경북 경산 임당동 1999년 발굴 / 3. 경남 양산 다방리 1995년 발굴

 

 

 

 

문자의 수용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널 아래의 대바구니에서 붓과 손칼이 출토되었다

중국 고대의 자료와 비교해 볼 때, 붓과 손칼은 대나무쪽이나 나무판에 글을 쓰고 지우는 문방용구로 추정된다

즉 붓은 오늘날의 연필, 손칼은 지우개, 대나무쪽은 공책인 셈이다

붓, 손칼과 함께 출토된 4점의 청동 고리도 중국 한 대의 천칭(天秤) 저울추의 일종인 겁마(砝碼)로 파악되고 있으므로

문자와 함께 도량형도 당시 지배층을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필기기구 6. 목간 충남 부여 능산리 1992년 발굴 / 7. 낙랑 호구 목간 평양 정백리 1992년 발굴 / 8. 죽간 평양 석암리 1924년 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