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용문역~지평역

용문역에서 지평역까지 걷기다

지평하면 우선 지평리전투와 지평막걸리가 떠오르지만

오래 전 용문사에서 지낼 때 한 번은 용문에서 내리지 못해 지평에서 걸어왔던 추억도 있다

 

 

용문역

역 앞마당에 5일장이 섰다

시점이다

 

 

 

 

곰산

용문역 안에서 봤다

 

 

 

 

용문5일장

시래기와 말린 밤을 파는 곳이다

 

 

 

 

수수부꾸미

좋아하는 음식인데 파는 곳이 드물어 장터 구경할 때면 맛보곤 한다

 

 

 

 

현감 영세불망비

어수물터로 가는 길에 있다

 

 

 

 

어수터널

세종대왕이 오대산 월정사를 가실 때 용문면을 지나시며 근처 주막거리에서 쉬어가시다가 인근 샘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물이라 하며

그 마을 이름을 어수동 · 어수마을이라 한다

 

 

 

 

용문면사무소

 

 

 

 

용문성당으로 오르는 길

 

 

 

 

용문성당

 

 

 

 

용문산

 

 

 

 

용문고등학교를 지나 마룡교로 용문천을 건너 흑천으로 가는 길이다

 

 

 

 

용문산 · 중원산 마루금

용문천과 흑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봤다

 

 

 

 

흑천

여울목펜션 앞에서 용문로로 나간다

 

 

 

 

흑천

용문로로 나와 흑천을 따라 걷는다

 

 

 

 

금곡교

 

 

 

 

양평 희망볼레길 안내판

용문로에서 다시 흑천 둑길로 들어서 잠시 걸으니 갈지산으로 들어가는 금곡교 옆에 있다

 

 

 

 

괘일산 마루금

흑천 광탄교 앞에서 봤다

 

 

 

 

백운봉 · 용문산 마루금

 

 

 

 

광탄교

용문면에서 지평면으로 들어간다

 

 

 

 

용문면 방향

광탄교를 건너며 봤다

 

 

 

 

백운봉 · 용문산 · 중원산 마루금

흑천을 건너 군부대를 지난 지점에서 봤다

 

 

 

 

월산1리 버스정류장

이곳에서 풀코스 이동식을 했다

 

 

 

 

월산1리 주민일동 펼침막

항공대대로 인한 소음 대책을 요구하는 것 같다

 

 

 

 

지평향교(砥平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0호)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 냈던 공립 지방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 ·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시나 문장을 짓는 법,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중국과 조선의 성현에게 제사를 올렸다

건물의 전체 배치는 앞쪽에 교육공간, 뒤쪽에 제사공간이 자리한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앞쪽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며, 동재 · 서재는 기숙사이다

뒤쪽 대성전과 동무 · 서무는 중국과 조선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현재 동무 · 서무는 남아 있지 않다

 

 

 

 

지평향교묘정비(砥平鄕校廟庭碑)

 

 

 

 

지평향교 외삼문砥平鄕校 外三門)

지평향교는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양평은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친 이름이기 때문에 옛 양근군에 있었던 양근향교와 옛 지평군에 있었던 지평향교로 총 두 개의 향교가 양평에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明倫堂)

조선 초기 현 지평리 산 118번지 자리에 건립되었으며

숙종 10년(1684) 현 위치로 옮겨 세워진 사실이 1982년 중수공사시 명륜당 상량문에서 밝혀졌다

 

 

 

 

대성전(大成殿)

 

 

 

 

을미의병기념비 · 지평리 선정비림(양평군 향토유적 제34호)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양평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비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강제 시행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이다

1895년 11월(음)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先)이 지평에서 포군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안승우(安承禹)가 원주 안창에서 합류하여 창의를 선포하였다

지평의병은 원주, 단양, 충주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인근 강원, 충북 지역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재출범한 지평의병의 구국정신은 이후 1907년 정미의병 및 일제강점기 3 · 1독립만세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

조선시대에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지평면 곳곳에 세워진 것을 한데 모았다

관찰사 민태호, 순찰사 김연, 현감 이경택, 박환, 송지혼, 강위홍, 김하석, 구후익, 박종염, 김학례, 이도식, 이승로, 김병이의 선정비이다

조선조 때 지평 현감 선정비 및 영세불망비로 지제면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전 보존하고 있다

 

 

 

 

행현감김학례영세불망비(行縣監金公學禮永世不忘碑)

 

 

 

 

지평의병 · 지평리전투 기념관

문을 당겨보았으나 휴관 중인지 안 열린다

 

 

 

 

지평리지구전투 전적비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13일 이곳 지평리전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5개 사단이 인해전술로 덤빌 때 미국 2사단 예하 23연대 전투단과 프랑스군 대대가 이를 격퇴하였으나

14일 재차 공격으로 완전 포위되어 통신이 차단되고 보급이 두절되어 탄환까지 제한된 판국에 백병전을 감행 사수하고

15일 공중 보급과 기갑사단의 증원으로 5배나 되는 적을 분쇄 격퇴하였다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

지평리전투는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와 함께 북방의 지평리에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 제39군의 사면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중부전선 교통 요충지인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 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내었으며

그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공적과 전몰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지평 보리밥집

차인표가 하던 토크 여행 프로그램 「땡큐」에서 봤던 보리밥집이다

 

 

 

 

지평초등학교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이 학교 안에 있다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축조물로 실제 사리가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지역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은 인근 탑사니골 길가에 있었다고 한다

1936년 큰 비가 내려 탑이 무너져 탑 부재 일부를 지평초등학교로 옮겨 왔다

이후 나머지 부재도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1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탑의 높이는 2.69m이고, 2, 3층 탑신석은 복원 때 새로 보강하였다

1층 탑신석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며,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에 불상을 조각한 석탑은 전국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으며, 현재 경기도에서는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뿐이다

 

 

 

 

지평시장

 

 

 

 

지평면사무소

 

 

 

 

국맥 지평의병발상지 석탑

1895년(을미년) 8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같은 해 11월 공포된 단발령에 항거하여

지평현 김백선 장군은 지평관아에 의병거의를 청하였으나 지평관아에서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춘영 장군과 김백선 장군은 지평포군 400여 명을 모집 창의하여 원주관아 점령에 이어 제천, 충주, 단양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인근 지역 의병 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일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지평리전투 참전비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지평주조(지평막걸리)

일제강점기에 설립하여 해방 이후 운영자가 바뀐 뒤 현재 3대에 걸쳐 이어가고 있다

1925년 무렵에 세워진 양조장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중 하나이다

한옥 건물에 일본의 건축 기술이 더해졌고, 당시 술 생산 공장의 기능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잘 보여 준다

환기를 위해 높은 창을 두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천장에 왕겨를 채웠다

양조장 안쪽에 있는 30m 깊이의 우물은 술을 만드는 물로 사용하였다

 

 

 

 

지평주조(지평막걸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도가 건물로 처음 건축시부터 막걸리 주조를 위해 설계, 건축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운용되고 있으며

지붕 위 자연 통풍장치, 천정 사이 왕겨층 공간 등은 막걸리 주조시 발생되는 상승온도와 과습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하게 설계되었다

공장 설립과 함께 만들어진 30m 깊이의 우물을 길어 술을 만드는 물로 사용하였는데

옛부터 물맛 좋기로 유명하며 공장설립시 심어진 공장 앞 버드나무 뿌리들이 우물 주위를 수십 년간 촘촘히 둘러싸 우물을 자연 정화시켜 주는 작용까지 해주고 있다

 

 

 

 

양평 지평양조장(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

지평주조 옆에 지평리전투 사령부 석비가 있다

 

 

 

 

지평주조

지평양조장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지휘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51년 2월 양평 지평리 일대에서 유엔군은 중공군과 4일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지평리전투로 당시 지평리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지평양조장은 당시 유엔군지휘소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 있다

 

 

 

 

지평주조 생막걸리 간판

입구에 붙어있는 주소와 간판이다

 

 

 

 

지평역

마침점이다

 

 

 

 

지평면둘레길 안내판

양평군은 1,000년 동안 양근군과 지평현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08년에 비로서 하나가 되어 지금의 양평이 되었다

지평면은 옛 지평현의 중심이며 예로부터 국왕이 선호하는 사냥터이자 강무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높은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선비들을 무수히 배출한 지역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높은 산은 없지만 해발 500m 남짓한 준령들이 잘 발달해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

지평역 옆에 있다

 

 

 

 

지평리 프랑스군 전적지

한국전쟁 당시 이곳 지평리에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프랑스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나폴레옹 후예다운 용맹성과 숭고한 희생은

대한민국 국토수호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들의 고귀한 영혼은 아직도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지평들

지평역 2층 대합실에서 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km, 소요시간 4시간 25분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0) 2015.01.10
국립중앙박물관 둘레길  (0) 2015.01.10
양평역~용문역  (0) 2014.12.13
한화기념관  (0) 2014.12.07
소래역사관  (0) 2014.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