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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망우동 사색의 길

망우동 · 면목동 ·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망우산(281.7m)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토지정리사업을 펼치면서 묘지를 조성해 1933년부터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공원내에는 「사색의 길」이라 명명된 4.7km의 순환 산책로가 있다

 

 

양원역

2번출구 길 건너에 서울둘레길과 중랑캠핑숲 안내판이 있다

시점이다

 

 

 

 

중랑캠핑숲 어린이놀이터

사색의 길이 있는 망우산을 가자면 도로를 따라가면 빠르겠지만 캠핑숲길로 갔다

 

 

 

 

중랑캠핑숲 잔디광장

음악회 · 필름페스티벌 · 연날리기 · 물놀이 · 사생대회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무선인터넷도 된다고 써있다

 

 

 

 

별숲관찰집

해와 달을 빼고 하늘에 보이는 모든 천체를 별이라고 한다

별에는 항성과 행성 이외에도 유성 · 혜성 · 위성 등이 있다

항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말하며 태양도 항성 중에 하나이다

흔히 사람들은 금성이나 수성 · 목성 등도 별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므로 행성이다

 

 

 

 

허수아비 가족

 

 

 

 

나무다리

다람쥐 등이 배고프지않게 도토리 등을 줍지말라는 안내판이 있는데도 도토리와 밤을 줍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북한산

 

 

 

 

불암산 · 수락산

 

 

 

 

망우산 극락사 극락보전

1968년도에 건립된 절이다

 

 

 

 

구리 ↔ 서울 경계 빗돌

중랑캠핑숲을 나와 도로를 건너면 망우리공원(사색의 길) 입구다

 

 

 

 

사색의 길 시점 삼거리

주차장과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삼거리가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 왼쪽 길로 나오는 원점회귀형 길이다

 

 

 

 

사색의 길 시점 동판

바닥에 박혀있다

 

 

 

 

박인환 선생 빗돌

묘소는 이 연보비 맞은편 나무계단을 이용해 내려간다

 

 

 

 

북한산 · 도봉산

봉화산이 앞에 있다

 

 

 

 

시인 박인환(詩人 朴寅煥)  묘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배우이자 가수인 나애심이 불렀는데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전한다

박인환은 명동의 은성다방(최불암 어머니가 운영)을 즐겨 찾곤 했다

어느 날 이곳에서 조병화 · 이진섭 · 나애심 등과 함께 자리를 갖던 중 박인환이 시 〈세월이 가면〉을 쓰자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이를 나애심이 노래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노래는 현인 · 박인희 등 여러 가수들이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용마약수(龍馬藥水)

한 바가지 떠서 마셔보니 물맛이 달다

 

 

 

 

이중섭(李仲燮 · 1901~1932) 묘

꽃을 꽂을 수 있는 구멍과 두 아이의 노는 모습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 왼쪽이 동락천약수터 · 오른쪽이 묘소다

 

 

 

 

다시 사색의 길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망우역(우림시장) 방향이다

 

 

 

 

국민강녕탑

용마산 · 아차산 지킴이로 수십 년간 산속 쓰레기를 주워온 83세 최고학 옹이 국민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쌓은 돌탑이다

 

 

 

 

북한산 · 도봉산 · 불암산 · 수락산

봉화산이 앞에 있다

 

 

 

 

북한산

 

 

 

 

북한산 · 도봉산

 

 

 

 

수락산 · 불암산

서울의 산들을 보며 걷다 들려야 할 곳을 지나쳤기에 다시 되돌아가 31번 전주 옆 등산로로 내려가며 봤다

 

 

 

 

가수 차중락 묘

1969년 2월 16일에 쓴 조병화의 「낙엽의 뜻」이란 시와

최희준 · 위키리 · 박형준 · 유주용 · 배호 · 이미자 등의 이름이 있다

 

 

 

 

봉화산

차중락의 묘에서 계용묵의 묘로 가기 위해 다시 입구 방향으로 가다 면목역(동원시장)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며 봤다

북한산 · 도봉산이 뒤에 있다

 

 

 

 

작가 계용묵의 묘

백치 아다다 · 병풍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 등 60여 편을 남겼다

 

 

 

 

현포 이병홍(玄圃 李炳洪)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출생. 경성부 오성학교 졸업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산청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대한국민당 강기문 후보를 누르고 당선하여 제2 · 3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산신제단(山神祭檀) 빗돌

 

 

 

 

산신제단(山神祭檀)

면목동 남촌마을(응달말)의 산신제를 지내는 곳으로 사색의 길을 U턴하는 삼거리를 조금 지나쳐 있다

사색의 길 코스는 아니지만 들렸다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박사 묘

독립운동가 · 정치가 · 언론인이었다

산신제단에서 사색의 길 U턴 삼거리로 돌아와 잠시 걸으면 있다

 

 

 

 

망우묘역의 독립운동가 안내판

이 길은 '구리둘레길' 코스이기도 하다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 1898~1959) 묘

인천 강화군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다

청년 시절 3 · 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다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주요 리더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하고,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제 2대 및 3대 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2위를 차지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사형당하고 이 자리에 묻혔으나 비문이 없는 묘비가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마침내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이상적인 정치인 상으로 부활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 1879~1944) 묘

충남 홍성 출생. 3 · 1독립선언 불교계 대표로 참가한 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최고의 애국자이며 시인이었다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현재 망우리공원의 유일한 최고훈격인 대한민국장 수여자다

묘비에 적힌 부인 '유씨재우'는 유씨 부인이 만해의 오른쪽에 묻혔다는 의미이다

만해는 불교 진흥을 위해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안타깝게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미아리 화장장에서 불교식으로 화장된 후 이곳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 1888~1939) 묘

평북 의주 출생. 1905년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공부하고

1908년 귀국하여 대성학교 ·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남선의 광문회와 안창호 등의 신민회에 참가했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위해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김성수 · 장덕수 등과 교유하고

1912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동제사에 참여했고

1919년 3월 12일에는 독립청원서를 보신각에서 낭독하며 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중동 · 배재 · 중앙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해 평이한 역사 서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조선심 · 조선학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데 이는 한국학의 대가 이규태 등으로 이어졌다

장남 동표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광복 후에는 편집국장까지 지냈고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은 호암의 외손서(外孫壻 · 외손녀 남편)이다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1864~1953)

서울 출신. 부친 오경석은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의 씨앗을 뿌린 역관이었다

위창도 20세에 역관이 되고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기자를 역임했다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쳐 1897년 1년간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개혁당 사건으로 다시 1902년 일본으로 망명 이미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하고 3 · 1운동에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부 갈등 속에서 위창은 끝내 일제의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견지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의원 등의 중책을 맡고 1946년 8월 15일에는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국쇄를 돌려받고

1949년에는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는 등 별세 때까지 민족의 원로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이곳에는 노고산천골취장비 · 방정환 · 설태희 등의 비문에 글씨를 남겼다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연보비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이다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 1899~1931) 묘

서울 당주동 출생.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소파는 어린이에게 나라의 미래를 걸고 어린이 운동에 온 생애를 바쳤다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이를 잘 부탁한다"며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마치고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원래 홍제동 화장터에 있던 소파의 유골은 1936년 후배 최신복 등이 나선 모금 운동으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무덤은 쑥돌로 만들어졌고 비석의 글씨는 오세창이 썼다

위창은 손병희를 도와 3 · 1운동 33인에 참여했고 소파는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다

소파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들었던 최신복은 수원에 선산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부모를 소파 바로 밑에 모셨고 자신도 후에 아내와 함께 그 아래에 묻혀 생전의 인연을 지금도 잇고 있다

*

소파 방정환 빗돌

동심여선(童心如仙 ·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지묘(小波 方定煥之墓)

기해 10월 7일 생 신미 7월 23일 영면(己亥 十月 七日生 辛未 七月 二三日 永眠)

수 33세(壽 三十三歲)

 

 

 

 

동락천약수터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 1891~ 1931) 묘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으로 한국에 먼저 건너온 형 노리다카를 따라 1914년 건너와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며 한국의 산림녹화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해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를 출간했다

아사카와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관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들과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급성폐렴으로 타계했는데

당시 이 땅에서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돌아간 대다수의 일본인과는 달리 그는 기독교정신에 근거한 코즈모폴리턴으로

한국말을 하고 한복을 입고 한국인의 이웃으로 살며 진정으로 한국의 마음 속에 살다간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에 흙이 됐다

오른쪽의 항아리(청자백자추초문각호) 조각품은 노리다카가 조각하여 1주기 때 세웠다

산림과학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당시 선배의 뜻을 이어 묘를 돌보고 있고

최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크게 부각되어 매해 기일 전후로 한일 양국민이 참석한 추도회가 열리고 있으며

2015년 설립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는 시대와 민족 · 국경을 초월한 그의 인류애적 삶을 기리고 교육하고 있다

 

 

 

 

구리암사대교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 1855~1935) 묘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

일찍이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읽으며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9년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두 달간 우두법을 배운 후

처갓집인 충주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 시술에 성공하고 이후 종두법 보급에 힘썼다

종두법의 도입으로 최초의 서양의학 도입자가 되었으며 1899년에는 관립의학교(서울 의대 전신)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의학계의 선구자이다

의학 외에도 한글과 농학 연구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1883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 대구판관 · 동래부 관찰사 등의 관직도 지냈다

한의사인 부친에 이어 장남 지성주(오른쪽 묘)는 경성의전을 나온 유명한 내과의사였고

손자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으며 증손자 또한 서울 성내동에서 내과를 경영하고 있어 5대째 의사 가문이기도 하다

 

 

 

 

검단산 · 예봉산

구리방향으로 강동대교 거너에 있다

 

 

 

 

사색의 길 마침점 동판

흰 페인트로 쓴 4.7km가 있다

 

 

 

 

13도 창의군탑

구한말 1907년 11월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 리 떨어진 이곳에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소통(疏通)의 문

예로부터 서울의 도심은 4대문을 기점으로 안쪽에 위치하여 왔다

도심은 광역화되고 서울로의 접근 방법이 다양화 된 오늘날 4대문은 더 이상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없다

이제 서울의 근교와 인접한 많은 지역들이 서울의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그 중 중랑구는 서울과 구리시를 연결하는 동북쪽의 관문이다

그 관문인 망우동에 대문(大門)의 한자인 문(門) 자(字)를 형상화한 탑을 세웠다

*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으로 정한 뒤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근심을 잊게되었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옛 고개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위다

 

 

 

 

금란교회 버스정류장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마침점이다

 

 

 

 

GPS를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3km, 소요시간 6시간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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