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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인천역~하인천역

일본이 일으킨 운양호사건과 강화도조약으로 1883년 개항된 인천항

인천의 시간여행을 위해 일요일 오후 동인천역에서 하인천역 사이에 있는 용동 · 신포동 · 선린동 등을 걸었다
이 길은 하나도 빼놓을 곳이 없어 빙글 빙글 돌며 걸어야 하나 저녁 모임이 있어 2~3시간에 맞춰 걸었다

 

 

동인천역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 · 다시 1955년에 동인천역으로 개명했다
시점이다

 

 

 

 

내동교회
아펜젤러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회 찬송이었다

 

 

 

 

용동큰우물 /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
1883년 인천 개항 무렵 조성된것으로 전해지는 지름 2.15m · 깊이 10m의 우물로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인천시민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용동큰우물 중수기
1967년 기와 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용동큰우물 현판은 이 때 인천 출신 당대의 최고 서예가였던 동정 박세림이 썼다

 

 

 

 

능인사
능인사의 역사는 곧 개항으로 시작된 인천 근대 불교의 역사다
1883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을 시작으로 외세 각 열강들이 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은 세계 각국과 교통하는 조선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옛 지명인 제물포 · 배다리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인천 연안부두의 명성과 함께 중국 등으로 통하는 항구가 번성했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스님들의 해외 방문이나 중국 교류 등을 위해 인천 거점의 사찰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 능인사의 시작이다
*
능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 설악산 신흥사 인천포교원이다

 

 

 

 

애관극장
1895년 「협률사」라는 상설연극공연장을 설립한 한국인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1925년 애관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소실되어 1960년 새로 신설하였다
1908년 이인직에 의해 개관된 원각사는 물론 1902년 조선 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인 협률사(協律社) 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
애관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 유니버스선발대회 ·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 피아노 연주회 · 1945년 8월 18일의 조봉암 주도로 결성된 인천 건준행사도 열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의 스타였던 신성일 · 엄앵란이 인사하던 날 경동 일대는 교통이 마미되었다고한다

 

 

 

 

신포국제시장
19세기 말 이곳에 자리잡은 일본인 · 중국인 · 서양인을 상대로 고급 채소를 파는 화농의 등장에서 시작된 시장으로
쫄면과 닭강정이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곳이며 전국 신포만두 체인점의 본점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답동천주교회
1889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빌렘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 언덕에 성당의 정초석을 갖고
이후 코스트신부의 설계로 1897년 고딕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기존 건물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공사를 완공하면서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답동천주교회 내부
성당 창문이 착색유리로 만들어졌다

 

 

 

 

인천중동우체국 / 인천 유형문화재 제8호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고종 21) 도입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시행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 전국에 우체사를 설치하면서였다
1922년 12월 1일 착공하여 1923년 12월 10일 준공하였다

 

 

 

 

나란히 서있는 세 건물에 눈이 간다

 

 

 

 

장미모텔 · 태화관 · 영화기업사

 

 

 


아침바다

 

 

 

 

구)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 인천 유형문화재 제19호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 제58은행은 인천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어 1893년 부산 · 1895년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대금의 결재와 무역금융에도 주력하였다
후에 야스다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 대한적십자 인천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광역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구)인천일본제18은행지점 / 인천 유형문화재 제50호
일본 제18은행지점은 제18은행이 1890년 해외에 세운 최초의 은행지점이다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한 면직물 중계 무역이 번창하자 수출입과 통관업무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지점을 개설했다
이후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에 그 업무를 인계하였으며 1954년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흥업은행 지점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관 밖 포토존
사진 왼쪽에 일본58은행이 보인다

 

 

 

 

중구청 앞 건물
일본 조계지였던 때의 모습을 재현했다

 

 

 

 

세탁소
역시 일본 조계지였던 때의 모습이다

 

 

 

 

관동교회
1954년 8월 9일의 정초석이 있다

 

 

 

 

각국조계지계단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인천항 주변에는 조계지가 들어섰고
응봉산 정상에는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조성되었다

 

 

 

 

· 일본 조계지 경계

당시 개항지의 외국 조계지 중에서는 청과 일본의 세력이 가장 컸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다른 청국과 일본 건물이 배치되었다
일본 조계지는 일본 패망 후 쇄락하였으나 청나라 조계지는 현재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그 맥을 잇고 있다

 

 

 

 

청국 영사관터 및 회의청(현 화산중학교)
청국은 1884년 인천에 조계를 설치하고 그 해 10월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현재 영사관 건물은 소실되었고 청국영사관 터에 화산중학교가 1934년 신축되었다

 

 

 

 

한국 인천화교소학교 · 중산학교

 

 

 

 

인천근대박물관
지금은 보기 힘든 축음기 · 올갠 · 전화기와 인천 성냥 등 각종 문물과 생활사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화교소학교 바로 앞에 있다

 

 

 

 

차이나타운 야외문화공간
한ㆍ중 문화교류 및 관광객의 휴식을 위해 중국의 4대정원 중 졸정원과 유원의 시설양식을 주제로 조성한 쉼터다

 

 

 

 

소원마당
소원을 적은 헝겊들이 매달려 있다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해안 천주교회
1950년대 후반 인천 선린동에 거주하는 화교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60년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북성동성당이 마련되었으나
선린동에 모여사는 화교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선린동성당이라 불렀다
초대 주임으로 맥코막 신부가 부임하였고, 1966년 6월 9일 현재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해안 천주교회의 성모상(루르드성모)

 

 

 

 

풍미(豊美)
자장면의 원조는 공화춘이지만 문을 닫었다 근래 다시 열었고 영업을 계속한 집으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다

 

 

 

 

짜장면박물관(공화춘 共和春) / 등록문화제 제246호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십리향(十里香)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길게 줄서 있는 집이다

 

 

 

 

십리향(十里香) 월병

 

 

 

 

청관(淸館)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이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주변 숙박업소는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의 황해여관이다. 지금의 「청관」 자리다
*

공화춘(共和春)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그후 짜장면박물관 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재개업했다

 

 

 

 

차이나타운의 짜장면이야기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 상인과 노동자가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들을 위해 값싸고 간편한 음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자장면이다
처음에는 산둥지방의 토속면장에 고기를 볶아 손수레에 재료를 싣고 부둣가로 나가 직접 수타면을 만들어 팔았다
일제강점기에 청관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자장면은 1950년대에 화교들이 캐러멜을 첨가한 한국식 춘장을 개발함으로써
우리 입맛에 맞는 오늘날의 짜장면으로 탄생하였다

 

 

 

 

의선당(義善堂)
1893년 이전에 세워진 중국 절로 총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 안쪽에 거주공간이 있으며

길가에 위치한 건물은 한때 중국무술도장으로도 사용했고 현재는 중국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의선당은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교훈을 주는 곳으로 개항 후,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건너 온  중국인들이
이국 땅에서 잘 적응하고 살도록 하기 위한  화교들의 교화 기관이 필요하였고 단합하며 살아가는 화교들의 끈기와 생명력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의선당(義善堂)
해방 이후 점차 쇠퇴해지고 1970년대 화교사회의 위축과 함께 거의 폐쇄되었고 무당파 팔괘장 전수도장으로 80년대 운영되었다
이후 거의 문을 열지 못하다가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 대대적인 수리 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정청에는 관음상(觀音像)을 중심으로 흙으로 만든 5개의 상이 모셔져 있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진 토상(土像)은 청나라 말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유구필응(有求必應)
길가에 위치한 건물로 한때 중국무술도장으로도 사용했고 현재는 중국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의선당 오른쪽 건물이다

 

 

 

 

경노청(敬老廳)
본당 안쪽에 있는 거주공간으로 의선당 길가 건물인 유구필응(有求必應)과는 달리 현판이 좌측부터 써있다

 

 

 

 

한 중국집 벽에 붙어있는 사진이다

 

 

 

 

북성동주민센터
차이나타운에 걸맞는 치장이다

 

 

 

 

중화가(中華街) 패루(牌樓)
인천역 앞에 있는 제1패루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중국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세 개의 패루 중 하나다

 

 

 

 

인천역
물류로 인해 인천항과 연결되어 있으며
인천항은 일제가 여주 이천 지역의 쌀과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1937년부터 수인선을 운행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4.6km, 소요시간 2시간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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