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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조선시대 충청도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성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 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 3)에 완공하였다

성 밖은 해자(垓字)로 돌렸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은 둘레 1,500m · 높이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1652년(효종 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기에 내포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에 이순신 장군이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해미읍성 주차장

간월도에서 집으로 가다 들렸다

 

 

 

 

해미읍성(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조선은 城의 나라였다

서울의 도성 · 수원의 화성 그리고 전국 각지의 읍성과 산성 등 160여 개의 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 군현 소재지에 읍성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신작로를 만든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의 읍성들을 1910년대에 대부분 훼철되었다

*

충주(忠州)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보인다

 

 

 

 

충주(忠州) 각자성석(刻字城石)

각자성석은 읍성 성벽을 쌓을 때 동원된 각 고을별로 책임 구간을 정하기 위해 새겨진 성벽 돌로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까지 4년여 동안

충청도 백성들이 돌을 쌓으면서 성벽에 공사 구간마다 이들의 출신 고을명을 새긴 흔적이다

 

 

 

 

 

서산 해미읍성 정비사업부지(진남문 해자구간)

유적 발굴로 가림막이 쳐있다

 

 

 

 

보주(保州) 각자성석

 

 

 

 

해미읍성 해자 펼침막

남쪽 해자구간 사진이다

 

 

 

 

해미읍성 해자

성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든 해자의 흔적도 찾았다

해미읍성을 별칭 탱자성이라 부르는 이유다

*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이다

 

 

 

 

해미읍성 건물지

조선 초기 건물지는 병영 관련 시설이고

조선 중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건물지는 해미관아와 관련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해미읍성 중심지 건물지 전경

 

 

 

 

해미읍성 서북쪽의 병영시설 전경

 

 

 

 

서산 해미읍성

 

 

 

 

해동지도 해미현 / 1750년

 

 

 

 

해미현지도 / 1872년

 

 

 

 

1967년 해미읍성 전경

 

 

 

 

1977년 해미읍성 전경

 

 

 

 

2007년 헤미읍성 발굴조사 후 전경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 남문으로 문 주변의 성돌은 육축(陸築)이라 해서 큰돌로 견고하게 쌓고 홍예문 위에 3칸의 누각을 세웠다
해미읍성은 일반적 행정기능의 읍성이 아닌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다

*

2022. 06. 25

 

 

 

 

진남문(鎭南門) 현판

 

 

 

 

현감겸영장박공민환무공위덕비(縣監兼營將朴公民煥茂功威德碑) · 좌영루첩성중수비(左營樓堞重修碑)
박민환위덕비는 1849년 세워진 비석으로 비좌 위에 하나의 돌로 비신과 이수를 만들었는데
이수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싸우는 형상이고 위는 둥글게 귀접이를 했다
당시 해미읍성의 공사를 담당했던 현감의 위덕비다
*
해미읍성 중수비(海美邑城重修碑)
내용에는 주요 문들이 모두 무너지고 훼손되자 1847년 겨울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는 남문 기와 4만 장을 바꾸고, 4월에는 남문 성돌에 회를 발라 그림을 그리고 기와를 운반하게 했다
또한 5월에는 동문 공사 · 7월에는 서문 공사 · 8월에는 진남문을 낙성하기도 했다. 이어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읍성 중수 과정에 동원된 인원은 수백 명인데 공사 중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편 비를 세울 당시 감독한 사람은 이장보(李章輔) · 지덕홍(池德弘) · 정언복(池德弘) · 정언복(鄭彦福)
김영신(金永信) · 신대운(申大運) · 김계갑(金啓甲)이며 목수는 김해성(金海成) · 석수는 서일관(徐日觀)이 담당했다

*

청주 각자성석이 2개의 빗돌 사이에 있다

 

 

 

 

청주(淸州) 각자성석(刻字城石)

 

 

 

 

공주(公州) 각자성석(刻字城石)

진남문 오른쪽에 있다

 

 

 

 

어서와 해미읍성은 처음이지?

 

 

 

 

조선시대 병장기(兵仗器)
불랑기 · 운제 · 환도 · 검 · 쌍수도 · 장창 · 마상편곤 · 방패 · 부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미읍성 옥사(牢房)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를 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 재현하였다
1935년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敎者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 나무 나이 300년 이상
이 나무의 고유 이름처럼 불리는 〈호야나무〉는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다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 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에 외과수술 및 토량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되고 있다
1962년 태풍으로 잘려진 가지는 절두산 성지에 보관 중이고

해미순교성지기념관에는 2004년 회화나무 수술시 제거된 가지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찾았다

 

 

 

 

순교기념비(殉敎記念碑)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이후 1882년(고종 19)까지 진행된 천주교 탄압 때
충청도 지방에서 잡아온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 · 처형한 곳이 해미읍성이고
나중에 잡아온 신도 수가 너무 많아지자 1,000여 명을 생매장한 곳이 해미읍성 인근이다
*
2014년 8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곳을 방문하여 순교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

어린아이가 즐겁게 춤을 추며 노래한다

*

시간도 늦고 재작년 내부를 돌았기에 음악을 즐기다 각자성석을 찾아 보았다

 

 

 

 

호서좌영(湖西左營)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진 후, 호서좌영이 들어서 무장으로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해 근무하던 곳이다
효종 3년(1652) 해미에 있던 충청병마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의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반양리에 있던 해미동헌을 옮겨 왔다
서산 관아문을 모방해 1970년대에 복원한 2층 문루다

 

 

 

 

객사(客舍)
고려 ·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했다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였다

*

일본은 성안의 객사 · 동헌 · 관아 건물들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군청 사무실로 썼고, 규모가 작고 낡은 것은 철거했다

읍성을 없애버리면서 정신적으로 한국인들이 모일만한 구심점을 제거하여 식민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현재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조선의 성곽은 서산 해미읍성 · 고창읍성(모양성) · 낙안읍성에 불과하다

 

 

 

 

기념품판매점 · 먹거리판매점

 

 

 

 

서산 해미읍성 안내판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 정문으로 외부는 홍예식이고 안쪽은 석주를 세우고 평보를 걸친 평거식 구조다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4年辛亥造)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로 조선 성종 22년(1491)에 문루를 포함해 중수가 있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주작(朱雀)
고대 중국에서 하늘을 별자리에 따라 크게 다섯으로 구분하여 오관(五官) 또는 오궁(五宮)이라 하였는데
그 중 동서남북의 4관 중 남관(南官)을 다스리는 신이다
청룡은 동방 · 백호는 서방 · 현무는 북방의 신이다

 

 

 

 

잠양루(岑陽樓)
해미읍성 동문으로 평거식 문 위에 문루가 있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 복원했다

 

 

 

 

해미성지 순례길 / 내포~해미 역사탐방로

 

 

 

 

구 해미초등학교 상징물

2019년 12월 10일 학교가 철거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해미국제성지 순례길 안내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를 방문하고

2020년 해미성지를 세계적인 명소인 「국제성지」로 선포한 사실을 기념하는 의미로

순교자들이 해미국제성지까지 압송되던 경로를 현재의 여건에 맞춰 복원하고 정비하여 조성된 도보순례길이다

 

 

 

 

Wake-up 국제청소년센터

프란치스코 교황 부조가 벽에 있다

 

 

 

 

해미읍성

 

 

 

 

각자성석(刻字城石)

각자는 희미해 알아 볼 수 없다

 

 

 

 

각자성석(刻字城石)

 

 

 

 

서천(西川) 각자성석

 

 

 

 

부여(扶餘) 각자성석

 

 

 

 

각자성석(刻字城石)

 

 

 

 

잠양루(岑陽樓)
해미읍성은 서산 9경 중 제1경이며 한국관광 100선 중 하나다

*

2024.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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