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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흥동헌 및 아문 · 화령옹주태실 · 의좋은 형제

예산 대흥동헌 · 아문(禮山 大興東軒 · 衙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조선시대 대흥군의 현청(縣廳)으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 대흥군 공해조에 의하면

객사(客舍)에는 정청(正廳) 3칸 · 동대청(東大廳) 12칸 · 은사청(恩思廳) 14칸 · 서헌방(西軒房) 16칸 · 하마대(下馬臺) 4칸

아사(衙舍)에는 구 동헌(舊東軒) 9칸 · 신 동헌(新東軒) 16칸 · 남상방(南上房) 4칸

북상방(北上房) 5칸 · 대청(大廳) 6칸 · 초당(草堂) · 행랑(行廊) 7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동헌과 아문만 남아 있다

예산군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로 역사적 ·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대흥면행정복지센터

예전 동헌 옆에 있어 제격이다

 

 

 

 

달팽이미술관

대흥면행정복지센터 앞에 있다

 

 

 

 

의좋은 형제 상

예산 이성만 · 이순 형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받들어 모셨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형이 어머니 묘를 지키고, 아우가 아버지 묘를 지켰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을 정도로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볏단을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2002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내용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성만 형제 효제비

임성아문(任衙門) · 느티나무 보호수가 옆에 있다

 

 

 

 

이성만 형제 효제비

조정에서는 1497년(연산군 3)에 가방교 옆에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하여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를 세웠는데

1964년 예당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됨으로써 의좋은 형제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성만 형제 효제비

효제비는 길쭉한 몸돌 위에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밑에 있는 받침돌은 후대에 와서 만든 것이다

몸돌에 새긴 비문에는 왕이 형제를 기려 상을 내린 사실과 후손에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8m · 둘레 4.1m · 나이 218년 · 지정일자 1982. 10. 15

 

 

 

 

예산 대흥동헌 아문(禮山 大興東軒 衙門)

아문은 대흥동헌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솟을대문 형태로 임성아문(任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임성(任城)은 통일신라 때 대흥지역을 부르던 명칭이다

 

 

 

 

임성아문(任衙門) 현판

 

 

 

 

예산 대흥동헌(禮山 大興東軒)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역대 군수들이 집무를 보던 정청으로 정면 6칸 ·  측면 2칸 ·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중앙에 정청인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전면으로 툇마루가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2칸 규모의 대청이 있다

4벌대로 높게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전면에는 방형의 초석을, 후면으로는 덤벙주초석을 혼합하여 놓았다

 

 

 

 

옥(獄)

예전 없던 것이 앞마당에 있다

 

 

 

 

예산 대흥동헌(禮山 大興東軒)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대흥동헌 상량문에 영락(永樂) 5년(1407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태종 7년에 창건되었고

강희(康熙) 42년(1703)에 중수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때 대흥이 군으로 승격할 때 중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대흥면사무소로 개조하여 사용되다가, 1979년 해체복원 정비되었다

 

 

 

 

산 넘어 남촌에는 드라마 촬영지

작은 연못과 주변 한옥 및 장독대로 여느 시골 한옥에 들어선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을 그려주어

《산 넘어 남촌에는》에서 종가집으로 촬영되기도 한 곳이다

*

대흥임존성이 있는 봉수산이 뒤에 있다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胎室) · 태실비(胎室碑)

태실은 왕세자나 왕손 · 대군 · 공주 · 옹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명산에 탯줄을 보관했던 곳이며 왕가에서는 이를 법으로 정했다

이 태실은 조선 21대 영조대왕의 11녀 화령옹주의 태실로 화령옹주는 영조와 숙의 문씨 소생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의 조카 며느리가 된다

정조 즉위 직후 어머니 숙의 문씨의 죄와 연좌되어 대신들이 화령옹주를 한성 밖으로 쫓아내

평민으로 강등시킬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정조는 화령옹주가 너무 어려 죄가 없다고 윤허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태실은 왕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실을 파괴하는 것은 곧 왕가의 상징물을 파괴시킨다는 의미였다

화령옹주 태실은 일제시대 에 이왕직이 친일파를 시켜 파괴시켰으며 안에 있던 도자기는 일본인이 가져갔다

현재 예산군에는 현종 · 헌종 · 화령옹주 · 숙종의 3남 연령군 등 4개의 태봉이 있다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胎室) · 태실비(胎室碑)

癸酉 三月 初二日 戌時 生 翁主 阿只氏 乾隆 十八年 五月 十三日 辰時 葬

(계유 삼월 초이일 술시 생 옹주 아지씨 태실 건융 18년 5월 13일 진시 장)

화령옹주(1752년 · 영조 28 ~ 1821년 · 순조 21)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

척화비는 두 차례의 양요(병인양요 프랑스 · 신미양요 미국) 이후

당시 왕이었던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척화교서를 내려 전국 각지에 세우게 한 비석이다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오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내가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토록 하기 위해, 병인년에 글을 짓고, 신미년에 비를 세우노라"

*

병인작 신미립이라는 글귀에서 두 차례의 양요가 척화비 건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과의 대결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본격적인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펴게된다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척화비 건립은

반외세 자주운동으로 해석되어 민족의 자주권을 지켰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조건적인 서양세력과의 통상 거부로 인해 조선이 국제 정세 흐름에 둔감해져서

근대화가 정체되거나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외세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협문(夾門)

 

 

 

 

연못

장독대 옆에 있다

 

 

 

 

예산 대흥동헌(禮山 大興東軒)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예산 대흥동헌(禮山 大興東軒)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예산 대흥동헌 아문(禮山 大興東軒 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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