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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월남 이상재 묘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 10. 26 ~ 1927. 3. 29) 선생은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고려말 충신이요 대학자이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16대손으로 태어나셨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을 주도하셨고, 1906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도우셨으며

1913년 황성기독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운동에 전념하면서 3 · 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보이스카웃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쓰셨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고자 했던 선생은 아쉽게도 같은 해 3월 29일 78세의 나이로 소천하셨으며

사상 초유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에 당시 서울의 인구가 35만 여 명이었는데 2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 선생의 가심을 애통해 했다

한산 선영에 모셨던 선생의 묘소는 1957년 5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이곳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산 79번지로 천묘하고 부인인 강릉유씨와 합장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신도비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비문의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월남 이상재 묘

인공으로 만든 호수가 앞에 있다

신도비 왼쪽 길로 2~3분 정도 올라온 곳이다

 

 

 

 

월남 이상재 묘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이희택(李羲宅)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전형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

묘표 · 상석 · 장명등 · 안내석 등이 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묘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 ·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묘

이상재는 대한제국 의정부 총무국장 직책을 지낸 정치가이며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

2개의 고석이 받치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안내석

 

 

 

 

월남 이상재 묘

 

 

 

 

월남 이상재 묘

삼각형의 인공호수가 보인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