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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이회영기념관

이회영기념관(李會榮記念館)

남산 기슭은 우당 이회영(友黨 李會榮)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쌍회정(雙檜亭)이다

백사 9대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은 백사가 살던 집을 집터를 수습하여 다시 쌍회정을 수습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도모하였다

*

쌍회정에서 몇 백 걸음에 이를 수 있는 곳에 상동교회를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산 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작은 능선을 이루는 곳에 종현성당(鐘峴聖堂 지금 명동성당)이 있고 그 앞쪽 일대를 저동이라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서 온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는 이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숙소로 잡았다. 이회영의 집이었다

이회영 가문이 남산 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비로서 남산 북쪽에 돌아왔으니 이회영기념관이다

 

 

이회영기념관

 

 

 

 

예장마당

남산예장공원 지하 공간으로 이회영기념관 앞이다

 

 

 

 

이회영기념관

 

 

 

 

이건영(1853~1940) 선생

이회영 6형제 중 첫째로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서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 · 참여하였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12월 29일은 독립운동가 이건영 선생 순국 83주기이다

 

 

 

 

이회영기념관

인간 이회영의 폭은 넓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강화학파)에 몰입한 소론 출신이었다

열 정승을 낳은 집안사람으로서 과거시험이 아니라 신학문을 절에서 공부했다

종을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시킨 근대인이었고, 숯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백지 위임장(헤이그외교독립운동)을 받을 정도로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정작 공화주의자였고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주인없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이 누리는 현실을 꿈꾼 거침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순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계로 이동해갔다

그는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의로운 생각이 바로 행동이었던 그는 패배를 몰랐고 실패 또한 몰랐다

그의 피는 맑고 뜨거워 늘 순혈의 속도로 내달렸다. 가장 심연이 가장 표면이었다

그는 자유였다. 그가 곧 자유였다. 스스로가 모든 해방이었다

그는 내내 전투 체제이면서 한없이 고요했다. 호수가 활화산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잊었다. 그는 가장 앞이면서도 가장 나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고, 자기 시대에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던 최후의 인간이었다

그는 난 잎에서 칼을 얻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무장 투쟁가였다

난초 한 이파리에 조선도, 왕도, 선비도, 민중도, 혁명도 다 들어 있었다

그의 말과 칼과 시(묵란 · 음악 · 전각 등)는 하나였다

 

 

 

 

이회영과 6형제

 

 

 

 

우당 이회영 묵란(墨蘭) 난이증교(蘭以證交)

이회영은 1913년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제자 윤복영의 집 별실 병풍 뒤에 숨어 지냈다

3 · 1운동 직전 베이징으로 재차 망명한 이회영은 묵란 부채를 인편으로 보내 제자이자 동지와 나누어 온 인연을 기리는증표로 삼았다

윤형섭은 아버지 윤복영의 기일(11월 17일) 난으로 맺은 이회영 후손에게 묵란을 건넸다(2009년)

난으로 맺은 인연이 다시 건너간 것이다. 이회영과 윤복영의 기일은 을사늑약의 날짜가 같다

윤형섭의 집 통인동 128번지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귀국(1925)한 이은숙이 우당 일가의 호적을 올려놓은 곳이기도 하다

 

 

 

 

이회영 형제는 북두칠성 같았고 아들들 딸들은 은하수 같았다

아들들 - 딸들 열아홉 특별전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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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천을 이회영기념관에 길게 드리우는 것으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은하수 같은 아들들 딸들을 기리는 뜻이다. 그 불빛을 환하게 밝히는 건 우리네 몫이다

*

기념관 2층이다

 

 

 

 

서간도시종로路
〈서간도시종기 西間島始終記〉는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李恩淑)이 이회영과 6형제가

서울을 떠나 서간도에 세운 최초의 무장독립운동기지이자 학교인 신흥무관학교 설립 과정, 베이징과 텐진 망명 시절

다시 국내 망명시절, 손녀들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 이회영의 죽음과 독립운동하던 아들의 투옥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까지를 한 올 한 올 잇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피어린 수기다
사대부 여인으로 남편을 따르는 일에서 출발한 그는 안팎으로 치열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우뚝선다
이 책은 서간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무장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삶으로 입증하고 있는 기록보고문학의 절정이다
「서간도시종기」란 서간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책이름이자 이회영 6형제의 활동과 삶을 기록으로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전시 구성은 「서간도시종기」 노정을 따랐기에 서간도시종로路다

 

 

 

 

아들들 · 딸들 열아홉

이회영 여섯 형제네 자식들, 곧 아들 딸들은 아버지 어머니 세대와 마찬가지로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부모 세대에게 항일운동이 결단이었다면 이들에게는 운명이라기보다는 생활이었다

대부분은 태어났을 때 가족 모두가 이미 일상으로 항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망명 · 독립군 양성 · 적과 싸우는 일 · 배고픔 ·국내외 이산과 만남 · 감시 · 고문 · 투옥이 생활이었다

그들은 따로 항일의식을 교육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한반도 북쪽 저 서간도에서 광복을 쟁취하는 길을 제시하는 길라잡이들이었다

북두칠성처럼 방향을 잃지 않게끔 그들은 자식들을 앞으로 이끌어갔다. 여섯 형제들의 숱한 아들들 딸들도 기꺼이 그 길을 갔다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들들 딸들은 시대의 두꺼운 어둠을 찢어내면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대하(大河) 은하수처럼 흘러갔다

이회영은 서씨부인, 또 이은숙과 사이에서 여러 아들들과 며느리, 딸들과 사위를 두었다. 모두 열 아홉이다

사내들은 고난에 찬 노정에 서로를 격려하면서 시대의 등불이 되어 결코 지치는 법 없이 세찬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앞장서 걸어갔다

여인들은 뼈가 저려오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로 목숨마저 내놓아야 했던 전선에서 형제를 잃고 하룻밤 사이에 두 자식을 언 땅에 묻어야 하는 쓰라린 고난을 헤치면서

그들은 도도한 물결처럼 거대한 어둠을 넘어서 내일로 나아갔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그치지 않는 물결처럼! 이 헌사는 이들에게 주어 마땅하다

열 아홉 중 누구도 마지막까지 이 노선에서, 이 역정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두 대에 걸친 장구한 항일투쟁은 그 자체로 귀감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식구, 가족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숙연한 질문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영구 이은숙(榮求 李恩淑 1889~1979)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19살에 이회영과 혼인하였다. 첫 양식 혼례였다

두 해 뒤 서간도로 독립운동의 길을 나선 그는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과 운영 · 가솔을 건사하는 활동을 두루 전개하였다

국내로 들어와서도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은숙은 봉건 여인에서 새로 각성되고 단련된 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그는 고난과 시련, 굶주림과 감시로 점철된 삶 전반을 통해 결코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 기꺼이 자기 길을 개척해 나아갔다

「서간도시종기」 또한 이러한 기상에서 나왔다

한국독립운동 기록보고문학 최고봉에 있는 「서간도시종기」는 생생한 내용과 품격을 갖춘 보기 드문 저술이자

독립운동가가 직접 독립운동과 자기 삶을 누비어 쓴 몇 안되는 소중한 기록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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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봉섭(이은숙의 며느리)가 「서간도시종기」를 낭송한다

 

 

 

 

베이징에서 이회영과 아들들 딸들

 

 

 

 

어머니 이은숙(앞 줄 가운데)을 모시고 좌우에 앉은 이규숙 · 장기준 부부

이은숙은 1910년 2월 9일 이회영과 이은숙의 첫째 딸로 태어나 1910년 12월 강보에 싸여 어머니 품에 안겨

이회영을 따라 일가 친척 50여 명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이주하였는데

만주로 향한 항일대장정의 참여한 최연소자였다

 

 

 

 

서대문구치소 이규창 수형기록카드

1935년 1월 엄봉순, 이달, 정화암, 김지강 등과 함께 친일 조선인 조상섭을 을러대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1935년 3월 25일 정화암과 협의하여 엄형순(엄순봉)과 함께 상하이 조선인 거류민회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거물 친일파 이용로를 제거하고 도피하다가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중국 국적 소지자임에도 상하이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경성복심법원은 엄형순에게 사형, 이규창에게 13년 징역형(구형 무기징역)을 언도했다

1939년 8월 이규창은 마포형무소에서 인쇄공 노역을 하면서 항일선전문을 제작 배포하는 옥중 투쟁으로 가형을 받은 뒤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규창 · 정문경 혼례사진 / 아소당

1947년 12월 17일 이회영의 집안과 우의가 두터운 독립운동가 정이형의 딸 정문경과 혼례를 올렸다

초례청은 귀국한 이회영 식구들이 임시로 거처하고 있던 마포 아소당이었다

1948년 대한정부 수립 뒤 중앙청국 감찰위원회 조사국장을 지냈다

1955년 자유당 정권이 감찰위원회를 해체하여 체신부로 직장을 옮겼다. 광화문우체국 · 서대문우체국장을 역임했다

1968년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

1992년 아버지 이회영과 자신의 활동을 기록한 회고록 「운명의 여신」을 출간했다

 

 

 

 

1971년 8월 8일 하오

이회영과 이은숙 사이에 태어난 아들딸 손자 손녀가 모두 모였다

딸 이규숙 · 아들 이규창과 며느리 · 정문경 · 아들 이규동과 며느리 변봉섭. 그날은 여든세번째 맞는 생일이었다

큰 손녀딸 이종희만 빠졌다. 이규숙의 남편 장해평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1965)

사진을 찍은 곳은 안양 이규동의 집이다

 

 

 

 

아소당(我笑堂)

광복 뒤 망명지에서 돌아와 거처할 곳이 없던 이회영 일가들이  함께 거주했다

1898년 운현궁에서 대원군 내외가 연달아 세상을 뜨자 아소정에 합장묘를 조성했다

1953년 한국전쟁 뒤 아소당은 학교 부지로 사용하게 되어 1962년 전각 모두를 해체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이동경로

 

 

 

 

이회영 일가 가계도

 

 

 

 

이회영 직계 후손 개요

 

 

 

 

난잎으로 칼을 얻다 / 7분, 7채널 영상

「7」은 이회영 6형제들과 이은숙의 얼굴이자 기억이다

영상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고난에 찬 노정 신흥무관학교 설립, 무장투쟁과정을 담고 있다

1910년 그해 세밑 눈내리는 겨울밤을 이들은 떠났다. 기차로, 마차로 물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산을 넘어가면 또 산이었다

가도가도 첩첩으로 산이었던 그 시대, 적과 싸우기 위해 산을 넘고, 고국을 향한 그리움의 산, 배고픔의 산도 넘어야 했던 어느 날 누군가 외쳤다

"차라리 우리가 산이 되자!"

*

「난잎으로 칼을 얻다」 7채널 영상은 저마다 고유성을 지니되 서로 연대하면서 산을 만들어 간다

독립운동은 우리 겨레가 대지로 일어나 거대한 산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회영은 곯은 배를 움켜쥔 채 붓으로 묵란을 쳐서 그걸 내다팔아 총과 칼을 샀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7채널에 나오는 산은 그리하여 이회영의 난잎을 닮아가면서 내달린다

 

 

 

 

이회영 6형제 선생님께

1층으로 내려간다

 

 

 

 

봉오동으로 가자, 청산리가 되자

1920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 원년이었다. 정부를 세운 지 두 해째였다

여러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전쟁을 개시하기 위하여 규율을 세우고 훈련을 거듭하는 등

무장대오를 정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고자 하는 결전활동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다수는 그해 여름 봉오동 골짜기로 향했다

이곳에서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물리친 독립군은 10월에 백두산 길목인 중국 길림성 청산리에 이르렀다

눈밭에서 짚신을 신고 굶어가면서 엿새 동안 치른 전투에서 독립군은 커다란 승첩을 거두었다

이 독립전쟁에서 사용한 무기 상당수는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 유럽 동부전선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톡항에서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군단에게서 획득한 것이었다

체코인에게 얻은 무기는 대략 소총 1,200여 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권총, 수류탄 등이었다

무기 구입 대금은 돈이나 금붙이뿐 아니라 여인네들이 뽑아 바친 비녀, 은가락지로 지불했다

 

 

 

 

세상 풍운을 거스르다 / 1897년 이회영이 쓴 소년 30세

 

 

 

 

낮에는 농사, 저녁에는 공부 경학사(耕學社)를 세우다

서간도 류하현(柳河縣)에 도착한 이회영과 가족, 동지들은 1911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농업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 자치단체 경학사를 세운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는 경학사의 부설기관으로 설립한다

당시 대흉년과 일제에 의한 피해를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경계 등 온갖 고초가 따른다

학교 부지를 매입하기 위하여 경학사의 살림을 맡고 있던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인연이 있던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도움을 받아 토지 구입과 입적 문제를 해결한다

입교생 40여 명으로 신흥강습소는 학교 문을 열었다

학비는 무료였고, 학생들은 이회영의 집에 머물며 공부하고 생활했다

 

 

 

 

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의 뿌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퉁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강당과 교무실을 비롯해 내무반 · 사무실 · 숙직실 · 식당 등 무관학교로써 격식을 갖춘 교사를 짓는다

산허리를 따라 지은 18개 건물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였던 신흥강습소는 이윽고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과 두 과정이 있었다

본과는 중학과정으로 4년, 특과는 군사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으로 6개월 · 3개월 속성과였다

 

 

 

 

삼한갑족(三韓甲族) 칼춤추고 말을 달리다

이회영 6형제는 서간도에 터를 잡자마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기까지 3,500여 명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전성기 때 학생은 600여 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 원년에 전개된 한국무장독립의 양대 대첩인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는 신흥무관학교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의열단 · 한국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뼈대가 되었다

 

 

 

 

 

조계진(조악이) 신분증 · 주머니

주민등록증에 나오는 통인동 128번지는 이회영 사후 이은숙이 이회영 가족들을 처음 호적에 올린 윤복영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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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진(조악이)는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의 아내이다

 

 

 

 

백범일지 두 권 / 1949

백범 김구가 이회영 집안 식구들에게 서명하여 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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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0년 하일(夏日 여름날) 백범 김구

왼쪽에는 한시를 쓴 뒤 휴정대사시(休靜大師時)라고 밝혔다

휴정은 서산대사(西山大師)다

 

 

 

 

운명의 여신(運命의 餘燼) / 1992년 초판본

이회영과 이은숙의 아들 이규창(규호)이 쓴 운명의 여신 초판본이다

 

 

 

 

어머니 탄신 95주년 기념 병풍 / 이종찬

지난 한 세기를 고난의 민족사와 함께 살아오신 나의 어머님 조계진 여사의 삶의 모습을 여기에 모아 드립니다

 

 

 

 

조계진(趙季珍) 여사

조정구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조계진은 흥선대원군 외손녀이자 고종황제의 생질이기도 하다

 

 

 

 

조정구(趙鼎九) 대감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조계진의 부친이다

 

 

 

 

월파 조정구(月波 趙鼎九) 선생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일제의 작위 수여 거부하고 중국에 망명하였다

 

 

 

 

시아버님 우당 이회영(友黨 李會榮) 선생

 

 

 

 

가족사진, 앞에 왼쪽 어린이 조계진 할머니 / 1903년 7세

 

 

 

 

승동교회(勝洞敎會) 부속국민학교 졸업 / 1912년 17세

 

 

 

 

부군 이규학(李圭鶴) 선생과 결혼기념 / 1917년 21세

 

 

 

 

경기여고 제7회 졸업기념 / 1918년 22세

 

 

 

 

조계진 중국 북경 망명 시절 / 1919년 23세

1897년 5월 23일 아버지 조정구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조계진은 흥선대원군 외손녀이자 고종황제의 생질이기도 하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돌아온 이회영은 1915년부터 조정구(고종황제 비서실장)

조남승(조정구 장남 / 고종황제 비서관)을 접촉하여 이규학과 조계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1919년 2월 15일 먼저 망명지 베이징으로 떠난 이회영을 따라 독립운동을 위해 이은숙과 함께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중국 상해 부군 이규학 선생과 함께 / 1933년 37세

 

 

 

 

중국 상해 가족사진 / 1936년 40세

안고있는 유아가 이종찬 의원이다

 

 

 

 

상해시절 이종찬 의원 남매와 함께 / 1942년 46세

 

 

 

 

임시정부요인 중경에서 상해 도착 백범 김구 선생 · 오른쪽 이규학 선생 / 1945년 47세

 

 

 

 

중국 상해에서 숙부 우천 조완구(藕泉 趙琬九 임시정부 재무부장) 선생을 모시고 / 1945년 47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선생 부통령 당선 기념 / 1948년 52세

 

 

 

 

이종찬 의원 육군사관학교 입교 직전 / 1956년 60세

 

 

 

 

이종찬 의원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가족사진 / 1959년 63세

 

 

 

 

손자 이철우를 안고 / 1961년 65세

 

 

 

 

이종찬 의원과 함께 / 1984년 88세

 

 

 

 

시숙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선생 동상제막식 / 1986년 90세

 

 

 

 

손자 철우 해외유학 전송기념 / 1989년 93세

 

 

 

 

사진 한 장, 피 묻은 솜옷, 한 줌 재 / 이회영의 최후

망명을 떠난 순간부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아나키스트 행동조직을 지속적으로 지도 · 운영해오던 혁명가 이회영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인들과 항일공동전선 형성 및 지하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배(영국배 남창호 밑바닥 4등선실)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

시사여귀(視死如歸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

이회영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 규창이 황푸(黃浦)강 와이탄(外灘) 부두에서 전송하면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롄(大連)항에서 다롄수상서(大連水上署) 경찰에 붙잡힌 그는 곧 뤼순(旅順)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이회영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이회영은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솜을 누빈 따파오(大袍) · 모자 · 해진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예순 다섯이었다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동지들의 연락을 받은 딸 규숙이 이를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은숙에게 전보로 알렸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화장된 유해는 한 줌 재가 되어 1932년 11월 28일 경기도 장단 큰댁으로 돌아왔다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시종기) ·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 이은숙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 이은숙

 

 

 

 

서간도시종기(할머니 자서전) 육필원고 / 1966년 복제품

이은숙이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 · 베이징, 텐진 망명시절 · 다시 국내 잠입활동 · 손녀 둘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

이회영의 사망과 아들의 투옥 ·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까지를 기록한 독립운동 수기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 실기(友黨 李會榮 先生 實記) / 이관직 著

이회영의 제자이자 동지인 이관직이 쓴 이회영의 삶과 활동에 관해 기술한 육필원고이다

 

 

 

 

 

이회영 연보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이회영 6형제 그림

 

 

 

 

우당 이회영 연보

 

 

 

 

난잎으로 칼을 얻다

3 · 1운동 이후 이회영은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채호 · 김창숙과 함께 베이징 독립운동세력을 이끌었다

조선 「갑족」이라고 불렸던 이회영 식구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서간도 시절보다 더한 가난 · 배고픔 · 질병이었다

이레에 세끼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던 이회영은 춥고 배고픈 겨울 밤을 견디기 위해 때로 피리(대금, 퉁소, 단소)를 불곤 하였다

사군자 중 으뜸이라는 묵란(墨蘭) 또한 잘 쳤다

추사 김정희에서 제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 이어지는 필법을 익힌 이회영은 빼어난 묵란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묵란을 내다팔아 이회영과 동지들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곤 하였다

먹으로 난초를 그리는 묵란 역사는 애초에 나라를 잃은 선비의 기상을 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회영은 이를 잇고 있을 뿐 아니라 난잎을 칼로 바꿔냈으니 , 예술혼과 행동이 일치를 이뤄낸 예행합일(藝行合一)의 정수였다

 

 

 

 

묵란(墨蘭) / 이회영 1920년대 추정

서리가 잇닿은 가지를 꺾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홍진 세상에 남은 잎이 곤히 잠들었네

성재(省齋)가 글을 쓴 뒤 담원(薝園)이 시를 지었는데

또 아름다운 자취가 두 번째 종이에 남아 있네

*

병진년(1976) 가을 이중(而中)

후학(後學) 유치웅(兪致雄)이 삼가 쓰다

 

 

 

 

묵란(墨蘭) / 이회영 1920년대 추정

온갖 꽃 많지 않은 것 아니지만 금석과 같은 좋은 형제라네

여기 저기 차고서 물으니 봄바람이 옷깃에 부네

계유년(1933) 유하(橊夏 6월) 오천(烏川) 심석(心石)이 쓰다

*

우당 지사가 갑자기 신선이 되었는데

해관(海盥)이 이를 가져오니 갑절로 서글프네

비 내리는 산방에서 한번 펼쳐 읽으니

하늘 너머 고운 풀이 꿈처럼 아련하네

계유년(1933) 여름

위창(葦滄)이 입으로 불러 쓰다

서둘러 쓰느라 공교롭지 않다

 

 

 

 

묵란(墨蘭) / 우당 이회영 1920년대 추정

을유년(1945) 겨울, 중경에서 경성으로 날아오던 길에 상해를 지나게 되었는데

조카 규학이 묵란 1폭을 가지고 와서 내게 글을 써 주어 기념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당 형님께서 그린 것으로 손때가 아직 남아 있다

미처 펼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옛적 경술년(1910) 겨울, 형제 6인이 함께 남만주로 가서 나라를 되찾고

일본을 망하게 하려고 도모하며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간신히 분투하였다

어느덧 36년이 흘러 누차 상전벽해를 겪으니 형제는 모두 죽고 처자는 전부 세상을 떠나서

나 한 사람만 초라하게 만 리 먼 하늘 아래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비추고 있다

사람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괴로운 감정이 없겠는가

아, 사람이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마는 죽었다고 따라 죽는다면 헛된 죽음이다

나와 네가 미치지 못한 업적을 계승하여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유감이 없게 해야 한다. 너는 알겠는냐

몸가짐을 바로하고 집안을 다스리며 자제를 잘 가르쳐 선대의 발걸음을 이어 원류를 여는 일은 네게 달려 있으니. 너는 힘쓰거라

병술년(1946) 겨울, 계부(季父) 시림산인(始林山人)

*

우당 형님은 뜻이 컸지만 재주가 부족하고, 일을 꾀하기는 좋아하였지만 이루기는 어려웠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도 씩씩한 뜻이 쇠하지 않아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려 하였는데

장춘에 도착하여 적의 간첩에게 발각되어 대련감옥에서 운명하였다. 아, 원통하다

나는 당시 항주에 있었는데, 중국의 수많은 동지들이 서호공원에서 추도회를 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데, 그 일이 신문에 실렸다

시대가 흐르고 경계가 바뀌어 지난 자취는 꿈만 같으니 그저 감상만 더할 뿐이다

성재가 또 쓰다

 

 

 

 

묵란(墨蘭)

난잎이 칼을 품지 않으면 한낱 풀잎에 지나지 않고

칼이 난잎을 품지 못하면 또한 사나운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흑색공포단 조직과 마지막 임무

사회는 나의 사회요 나는 사회의 일분자니

사회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을 생각하고

공익을 경영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을 행하며

 

 

 

 

이회영 낙관

이회영이 새긴 낙관 11점이다

긴 망명생활 동안 배고픔을 이기고자 피리를 불고 묵란을 쳐서 항일운동자금을 구하였던 우당 이회영은

돌을 깎아내고 글자를 일으켜 이름과 여러 뜻을 거기 돋을 새기고 또 아로새겼다

 

 

 

 

우당 이회영 친필 편지봉투 / 천 봉투

이회영이 서울에 와 있던 아내 이은숙에게 보낸 편지 겉봉이다

발신지는 상하이 한구로이고 수신지는 경성 당주동 132번지 수신인은 이현숙(이회영의 딸)

 

 

 

 

이회영기념관 1층

 

 

 

 

이회영 가문 내력

기록된 우리 역사 이천 년 이래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나선 숱한 인물이 있었다

단기필마로는 단연 안중근, 군사조직적 대응은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집안으로는 이회영과 6형제를 서슴없이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신분, 재산, 목숨, 자식, 우정, 눈물, 재능, 배고픔마저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거룩한 인간상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 · 건석철회시호 ·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 떼어서 읽을 수 없는 6형제 이름

건석철회시호 · 인물을 섬기는 것은 그를 따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 이래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열 명이 넘는 정승과 판서를 냈다

정승은 실력과 인품을 두루 갖춰야만 이를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 집안의 전통과 내력을 이어내는 일은 세습되는 왕족과는 다른 사회적 책무를 안팎으로 거듭 수행해내야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들의 행동은 남달랐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가문을 일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렀다

삼한이란 우리 땅을 이르는 말이고 갑족이란 으뜸집안이라는 뜻이다

이회영 형제는 서울 명례방(명동), 장단과 개성, 양주 일대, 진위(평택) 등지에 넓은 땅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왕실에서 받은 땅이 많았다

나라가 일제 수중에 떨어지자 이들은 전 재산을 서둘러 정리해서 서간도로 떠나는 일을 결행했다

총칼로 빼앗긴 나라를 총칼로 되찾고자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모든 집안 사람들이 이와 같이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쳐 나라를 구하는 투쟁에 나선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 / 조선 최고의 가문

이항복을 비롯하여 세필 · 종성 등 열 명이 넘는 정승과 판서를 냈다

 

 

 

 

경주 이씨 족보 초안 · 우당 가문 서책

이회영은 서간도로 떠나면서 평소에 재능을 아끼던 최남선에게 서책을 맡겼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묵은 장서였다

광복 뒤 최남선은 서책의 행방에 대해 외면했다

청주 사는 송인택이 구입한 고서에서 우당 집안 장서 기록을 발견하고는 이를 기증했다(2004. 10. 22)

책 몇 권이 제자리를 돌아오는데 94년이 걸렸다

 

 

 

 

조선 최고의 부자 / 현재까지 조사된 우당 이회영 가문이 독립운동에 사용한 재산

서둘러 재산을 처분하고 이회영 일가가 손에 쥐었다는 40만원이 600억에 이른다는 말도 있지만

땅값만 하더라도 현재 공시지가로 셈하자면 몇 조 원대에 이른다는 평가가 더 합당하다

이유원(李裕元)의 호는 귤산(橘山)이다. 그의 별장은 양주 가오곡에 있으며, 서울에서 80리 거리이다

그 때 사람들은 그곳 80리 거리를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의 땅은 밟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이유원은 땅과 재산을 이석영에게 물려주었고 이석영은 이를 모두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

*

6형제 가문의 소유 토지 8,820,939㎡ / 여의도 면적 29,00,000㎡

 

 

 

 

땅의 씨앗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은 모두 지명이다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은 모두 사람 이름이다

이항복의 작호는 오성이다. 오성과 한음이라고 할 때 그 오성이다

이항복과 주요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자기 고향 동네나 물이름 등을 아호나 별칭으로 삼고 있다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 이름 내역을 추적해보자 하는 건

이회영과 형제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무장투쟁 자금이 된 터전을 되새겨보고자 하는 까닭이다

사람이 떠나고 인심이 바뀌어도 땅은 그 자리에 있는 터다

두 땅의 내력을 살피는 이유는 간명하다

이유원에서 이석영으로 물려내려온 이 땅들을 서둘러 팔아서 이회영 여섯 형제는 간도로 떠나 무장독립투쟁의 길로 나섰다

이들은 자기 땅을 팔아 모두의 땅, 곧 조국을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이들 형제가 감행한 행동의 밑바탕에는 누대에 걸쳐 이씨들이 경영하고 세거해 온 땅은 나라에서 내린 것이고

이를 밑천 삼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도리라고 여긴 갸륵한 뜻이 깔려 있다

경주 이씨들은 봉건 왕조에서 정승을 수두룩하게 배출하고 넓은 땅을 가진 지주였는데

조국 광복을 도모하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그 재산 전부와 목숨을 바쳐 새로운 세상을 맨 척후에서 열어젖혔다

조선 말 이른바 삼한갑족은 이윽고 독립운동갑족이 되었다. 광복이 되어 돌아온 그들에게 남한 땅은 한 뼘도 없었다

여섯 형제가 함께 떨쳐나섰다가 다섯이 죽고 한 사람만 귀환했다. 다섯 째 이시영이다

이항복 이래 후손들은 왜 땅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을까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이 한결같이 땅이름이라는 건 뜻하는 바가 있다

조선은 농본사회였고 생산력은 땅에서 나왔다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이란 이름에는 자신이 그 땅 출신이라는 점, 땅이 곧 사람이라는 인식 등이 깊이 스며 있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서울까지 왕래하는 80리 길이 모두 자기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밟지 않고 다녔다고 이유원을 힐난하고 있다

어쨋든 그마저도 마침내 독립투쟁 자금으로 발효했다

오성, 구천, 아곡, 오천, 가오실은 모두 하나로 모여 새 땅, 곧 광복 세상을 여는데 이바지했다

지금 그 땅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는 소유권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 관한 문제다

어떤 땅이 조국을 위하여 이렇게 쓰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땅은 땅으로서 씨앗이었다

 

 

 

 

꽃다발을 목에 건 김구 주석 · 안미생(안중근 의사 딸로 김구 며느리) ·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닦고 있는 이시영 ·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10세)

6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이시영만 홀로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이시영은 김구와 동행하여 돌아오던 상하이 공항에서 여섯 명 몫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45년 11월 5일

 

 

 

 

규숙 고모님을 떠나보내며 / 이종걸

규숙 고모님의 별세는 우리 집안 항일독립운동 1세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뜻한다

1910년 경술년에 나라가 강점되자 우당 이회영, 성재 이시영 할아버지 6형제는 모든 가산을 팔아 항일독립전쟁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6형제의 망명 결행은 만주를 항일독립운동기지로 하는 독립전쟁론에 불을 붙였다

규숙 고모님은 만주로 향한 항일대장정에 참여한 최연소자였다

또한 해방 이후 귀환한 초기 항일투쟁가 중 몇 안되는 생존자 가운데 하나였다

고모님은 태어나자마자 격랑이 이는 민족사 한가운데로 던져젺다

9대째 정승을 배출한 소론의 대표적인 양반가도 그의 안일이 되어 주진 못했다

*

고모님은 일찍부터 중국 문화를 체득했다

중국에서 영어 교사까지 할 정도로 언어에 특출했던 고모님은 북경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우월한 중국인으로 활약이 가능했다

이런 능력은 철저히 항일독립운동에 쓰였다

우리 독립운동 세력이 러시아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시기에 고모님은 항일독립단의 유명한 무기 운반책이었다

감시하던 러시아 군인들조차 어린 중국 여자아이 몸 앞뒤에 무기가 즐비하게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마적으로 추정되는 무리들에게 이회영 할아버지 거처가 습격을 받았을 때

할아버지는 용케 살해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할머님(이은숙)이 어깨에 총상을 입으셨다

*

당시 항일운동가 집안 아이들마저도 다물단이 지나간다고 하면 울다가 그친다는 말이 있었다

이를 이끌던 이는 큰아버지 이석영의 큰아들 규준이었다

고모님은 규준 아저씨를 인도하여 일제 앞잡이로 소문난 김달하 암살에 관여하였다고 하여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1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회영 할아버지의 안위를 탐문하고 확인하는 것도 고모님의 몫이었다

우당께서 고문 끝에 순국하시자 시신을 수습하고 또 모시고 온 장본인이 고모님이다

*

규숙 고모님은 한국근대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여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장렬한 방법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었다

 

 

 

 

 

11개의 훈장증

 

 

 

 

 

혁명열사증명서 / 복사본

중국 정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인물에게 수여한 증명서이다

한국인으로는 우당 이회영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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