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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네골목길 관광코스 4코스(부암동)

종로 동네골목길 관광코스는 600년 옛 도시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종로 골목길 관광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걷기 길로 24개의 코스가 있다

*

4코스(부암동) A · B 코스를 연결해 걸었다

A 코스 / 윤동주 문학관 · 시인의 언덕 · 최규식 경무관 동상 · 창의문 · 환기미술관 ·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세검정터
B 코스 / 무계원 · 안평대군 이용 집터 · 현진건 집터 · 반계 윤웅렬 별장 · 자하미술관 · 자하문 터널(영화 기생충 촬영지) · 서울미술관 · 석파정

 

 

청계천 발원지 빗돌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

*

북악산과 인왕산 고갯마루를 경계로 북서쪽 물은 홍제천 · 남동쪽은 청계천으로 흘러든다

시점이다

 

 

 

 

우리들의 영웅 당신을 기억합니다 / 1 · 21사태 설명판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다

 

 

 

 

고 최규식 경무관 상

종로서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며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정종수 경사 상

1968년 1월 21일 종로경찰서 근무 중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31명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

 

 

 

 

창의문(彰義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인조반정 공신 현판

영조가 창의문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 놓았다

 

 

 

 

창의문(彰義門) 현판

 

 

 

 

창의문(彰義門) / 1900년대 초

 

 

 

 

천진포자(天津包子)

중국 만두집에서 삼선만두 · 수교자(물만두)로 이른 점심을 했다

 

 

 

 

동양방아간

환기미술관 왼쪽 · 한양도성 1번출입문 오른쪽이다

*

오래된 방앗간이다

 

 

 

 

카페 RED

 

 

 

 

호스피스 수도원 · 말씀과 밥의 집

삶을 축제로 빗돌이 앞에 있다

 

 

 

 

한양도성 1번출입문 터널

 

 

 

 

한양도성(북악) 개방시간

11월~2월 · 9~17시 / 3, 4월 9, 10월 · 7~18시 / 5~8월 · 7~19시

청운대 안내소 1번 출입구에서 15분~20분 전 통과

 

 

 

 

백석동길

 

 

 

 

백석동1길

 

 

 

 

카페 산모퉁이

TV연속극 「커피 프린스1호점」에 나온 곳이다

 

 

 

 

커피 프린스1호점 등장인물 / 이선균 · 윤은혜

산모퉁이 우체통에 있는 사진이다

 

 

 

 

커피 프린스1호점 앞에 있는 안내도

 

 

 

 

정혜사로 들어가는 길

 

 

 

 

수미정사

 

 

 

 

대화당(大化堂)

 

 

 

 

응선사

 

 

 

 

기대

힘든세상, 함께 기대어 쉴 수 있는 휴식같은 친구

마침내 좋은 날은 오거야 말거라는 기대를 품게하는 희망의 당신

 

 

 

 

작은 가게

 

 

 

 

백사실 방향표시

 

 

 

 

백사실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 안내판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刻字)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뜻하고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

갈림길에서 능금마을로 들어간다

 

 

 

 

백사실 계곡 나무다리
백석동천은 인근 주민들에게 백사실계곡이라고 불리면서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인 것에서 유래하여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금마을 이야기 안내판

조선시대 중기 때부터 능금 · 자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능금 · 자두나무가 있어 이곳을 능금마을이라고 한다

 

 

 

 

백사실(별서터) 방향안내판

능금마을에서 백사실(별서터)로 다시 나간다

 

 

 

 

소나무

뿌리가 바위를 깨뜨리고 있다

 

 

 

 

도룡뇽 서식처 안내판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1급수 지표종인 도룡뇽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

별서 터로 들어가는 다리다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 명승 제36호

백석동천은 지금까지 백사실계곡이라고 불리면서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인 것에서 유래하여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명승 경관자원 조사연구사업」을 통해

백석동천 일대가 한때 추사 김정희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확인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백석동천은 백석정 · 백석실 · 백사실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조선말기 박규수의 〈환재집〉에 수록된 시에 「백석정」이란 내용이 전한다

 

 

 

 

별서 터 육각정 초석

추사의 〈완당전집 권9〉에 "선인 살던 백석정을 사들였다"라는 내용과 주석에서 "나의 북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라는 내용 이외에도

관련 시들을 분석한 결과,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부지를 사들여 새로 건립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각정 옛 사진 / 1935. 07. 19 동아일보

 

 

 

 

별서 사랑채 터로 오르는 계단이다

 

 

 

 

연못

현재 이곳은 연못과 육각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채 초석

2010년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백석동천 일대 발굴조사 결과

당시 출토된 유물 등으로 판단해봤을 때 1800년대 후반에 조성 ·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추사가 백석동천 일대를 새로 건립했다는 내용을 뒷받침한다

 

 

 

 

사랑채 전경 / 2012년 발굴조사 당시

 

 

 

 

안채 및 문간채 전경 / 2012년 발굴조사 당시

그 뒤의 높은 곳에는 사랑채의 돌계단과 초석이 잘 남아 있다

그 뒤로는 안채의 초석이 잘 남아 있으나, 보호를 위해 흙으로 덮어두었다

 

 

 

 

복원 예상도

 

 

 

 

현통사로 가는 길이다

 

 

 

 

삼각산 현통사(三角山 玄通寺)

일주문 옆 바위에 일붕 애국시가 있다

 

 

 

 

일붕 애국시(一鵬 愛國詩)
백석청류동(白石淸流洞) / 백석의 맑은 물은 마을에 흘러들고
간화청조성(看花聽鳥聲) / 꽃을 바라보는데 새 소리도 들려오네
일붕선일월(一鵬禪日月) / 일붕은 일월처럼 언제나 참선하며
애국만년정(愛國萬年情) / 나라사랑 영원히 이어가리라

*
삼장법사 일붕 서경보 운(三藏法師 一鵬 徐京保 韻)

 

 

 

 

일붕선교종총무원(一鵬禪敎宗總務院)

 

 

 

 

일붕선교종총무원(一鵬禪敎宗總務院)

 

 

 

 

법왕일붕기국상(法王一鵬祈國像) · 세계불교초대법왕 송덕비(世界佛敎初代法王 頌德碑)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세계 초대 법왕이 나셨음을 찬송하고 법제자됨을 기념하고자 한 마음으로 이 시비를 건립하며

아울러 일붕 법왕의 자비가 온누리에 고루 미치기를 합장 기원하면서 일붕 스님 서경보 큰 스님의 법력과 공덕을 후세에 영원토록 기리고자 한다

 

 

 

 

일붕천(一鵬泉) · 일붕선시(一鵬禪詩) 빗돌

 

 

 

 

일붕선원(一鵬禪院)

 

 

 

 

일붕선원(一鵬禪院) 현판

 

 

 

 

불암(佛岩)

땅속에 매몰되왔던 이돌은 부처바위라고 전해왔다

이제 동민 유지들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다음 시로써 영원히 기록을 남긴다

*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스님의 선시(禪詩) 가 있다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스님의 선시(禪詩)

불암(佛岩)에 있는 시다

 

 

 

 

홍제천

 

 

 

 

세검정(洗劍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광해군 15년(1623) 이귀 · 김류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원래 세검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을 가졌다

 

 

 

 

세검정(洗劍亭)

 

 

 

 

우리의 정기(精氣)

백두산(白頭山)과 천지(天地) 물이 더 높고 깊도록

하나님의 강복(降福)하심 끝없네 우리 민족(民族)

*

세검정(洗劍亭) 받침 바위에 새겨져 있다

 

 

 

 

홍지문(弘智門)

숙종이 친히 홍지문(弘智門) 현판을 써서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치형 문을 낸 화강암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

이곳에서 석파랑으로 가야하는데 옥천암을 들려가기로 했다

 

 

 

 

홍지문(弘智門) 현판

박정희 대통령의 좌횡서 글씨이다

 

 

 

 

홍제천

「이광수의 산장」이 있는 언덕이다

 

 

 

 

삼각산 옥천암(三角山 玉泉庵)

옥천(玉泉) 이란 아주 맑은 샘을 말한다

여기서 나오던 샘물에 약효가 있어 환자들이 모여 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옥천암 보도각(玉泉庵 普渡閣)에는 마애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

홍제천을 건너는 다리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제1820호

마애보살좌상은 해수관음상 또는 보도각백불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보도」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로서 관세음보살의 발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해수관음상」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며 실제 기록도 전한다

백불(白佛)이라는 이름은 외국인들이 White Buddha라고 기록한 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 좌상은 12~13세기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불암(佛巖)이라고 기록한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신라시대 이 일대에는 장의사(莊義寺) · 승가사(僧伽寺) · 사현사(沙峴寺) 등 유력한 사찰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보도각과 옥천암이 창건되었을 듯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여기서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고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는 전설 ·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

옥천암 보도각(玉泉庵 普渡閣)에 모셔져 있다

 

 

 

 

홍지문(弘智門)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

탕춘대성은 1719년(숙종 44)에 쌓은 것으로,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성이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남든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녔다

성곽 둘레는 약 4km로서, 성 안에 연무장(鍊武場)인 연융대(鍊戎臺)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추었다

성벽은 크기가 고른 정방형의 돌로 반듯하게 쌓아 숙종 때 성을 쌓는 기법을 잘 보여준다

홍지문은 홍예 위에 정면 3칸 · 측면 2칸짜리 문루를 지었는데, 대개의 성문처럼 우진각지붕이다

그 옆으로 이어진 수문(水門)인 오간수대문은 홍예 5칸을 틀어 수구(水口)로 썼다

성의 이름은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지금 세검정초등학교)를 쌓고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홍지문은 「한북문(漢北門)」으로도 불렸다

1921년 홍수로 인해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은 무너졌으나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었다

 

 

 

 

탕춘대성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

홍지문과 연결되어 있다

 

 

 

 

부침바위

부침바위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소원을 빌었던 바위이다

1970년대까지 있었던 부침바위는 약 2m 높이에 표면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자리가 있었는데

이마에 돌을 대고 비비면 손을 떼는 순간 돌이 붙고 옥동자를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에 딸린 사랑채 건물로 1958년 서예가 손재형이 이곳으로 옮겼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은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畫同硏會)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고 「서예」라는 말을 창안하여 서예계에 영향을 끼쳤다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이 집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창의문 밖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의 별장이다

1958년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이 별당을 뒤뜰에 옮겨 지었다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이 집은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 옆에 방이 있는 ㄱ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흥선대원군은 앞쪽으로 돌출된 큰 방을 사용하였고, 난초를 그릴 때에만 대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손님을 대할 때는 건너방을 사용하였다

지붕이 끝나는 측면에는 붉은 벽돌로 벽을 세웠고 벽 중앙에는 원형과 반원형의 창을 내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중국풍 건축의 특징이다

정면의 툇마루에 설치된 난간은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훌륭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고급 자재를 사용하여 지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이다

 

 

 

 

부침바위 터 빗돌

부침바위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소원을 빌었던 바위이다

1970년대까지 있었던 부침바위는 약 2m 높이에 표면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자리가 있었는데

이마에 돌을 대고 비비면 손을 떼는 순간 돌이 붙고 옥동자를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

부암경로당 앞에 있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소

 

 

 

 

북한산 비봉

이승만연구소 옆에서 봤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언덕 위에 있다

 

 

 

 

영화 기생충 촬영지 / 자하문터널

거센 비로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 박사장 가족을 피해 기택네 가족이 도망 나와 달려가던 장소는 자하문터널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계층의 차이를 표현하려는 봉준호 감독에게 선택된 장소이다

길 건너편에서 가파른 계단을 바라보면 집으로 돌아가던 기택네 가족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날 것이다

 

 

 

 

자하문터널 터널

내부에는 주변의 경복궁 · 서울미술관 · 윤동주문학관 등 관광 명소들이 위치해 있다

 

 

 

 

무계원(武溪園) 옛 오진암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오진암은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요정이었으나

서울시 등록음식점 제1호이자 1910년 지어진 상업용 한옥으로서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 · 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내었던 중요한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로서

1970년대 삼청각 · 대원각과 더불어 제3공화국 정치사의 단면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10월 관광호텔 신축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종로구(구청장 김영종)가

제공한 이 부지 위에 호텔사업자가 이축 비용을 부담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 종로구 예산과 서울시 특별교부금 그리고 국토교통부로부터 오진암 이축 복원사업의 가치를 인정받아

지원받은 한옥 건축지원금을 보태 전통담장과 석축 등 부대시설을 갖춘 전통문화시설 무계원을 완성하였다

 

 

 

 

무계원(武溪園) 현판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인 오진암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 서까래 · 기둥 등에 쓰였다

 

 

 

 

무계원 안채 · 행랑채

각 분야의 뛰어난 장인들이 오진암 이축 복원공사에 참여하였고

특히 오백 년 이상된 종로 청진동의 지하 4m 속 발굴석으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과 함께 묻혀 있던 역사를 되살려 내었으며

둘레의 고풍스러운 전통 담장은 건물과 주변을 조화롭게 이어주고 있다

안견 몽유도원도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이곳은 부암동에 건립된 전통문화시설 무계원은

수준 높은 강학공간으로 아름다운 건물과 함께 향후 그 가치를 더해 갈 것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 안견 1447(세종 29)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cm 일본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소장

1447년 4월 20일 세종대왕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3일만에 완성된 이 그림은 왼쪽의 현실공간과 오른쪽 도원 세계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안평대군의 별장 터)는 몽유도원도의 배경으로 전해진다

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당대 문사(文士)들과  고승(高僧)이 슨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讚文)이 곁들여져 있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 · 이개 · 하연 · 송처관 · 김담 · 고득종 · 강석덕 · 정인지 · 박연 · 김종서 · 이적 · 최항

박팽년 · 윤자운 · 이예 · 이현로 · 서거정 · 성삼문 · 김수온 · 만우 · 최수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주변 거리의 풍경

모니터에서 나오는 풍경들이다

 

 

 

 

종로2정목 거리 풍경

 

 

 

 

종로2정목 거리 풍경

 

 

 

 

현진건 집터(玄鎭健 家址) 빗돌

현진건(1900~1943)은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시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1년을 복역한 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다

 

 

 

 

비해당 터 · 현진건 집 터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이 살았던 비해당 터이고 축대 아래가 현진건 집 터다

 

 

 

 

반계 윤웅렬 별장 / 지방 민속자료 제12호 한옥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창의문 밖에 지은 별장이다

1906년 건립 당시 이 집에는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으나

윤웅렬이 죽은 후 셋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안채 · 사랑채 및 광채 · 문간채의 세 채다

안채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안방과 건너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으로는 부엌이 두 칸 · 건너방 앞으로는 작은 누마루가 달려 있다

안채 왼쪽에 광패 ·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자로 꺾인 사랑채의 한쪽 끝 부분에 서양식으로 지어진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모두 경치가 좋은 남쪽의 계곡을 향하고 있으며 사랑채 위로는 옥상 테라스가 만들어져 있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기 힘들다

반계 윤웅렬의 별장은 도성 밖의 인왕산 북쪽 계곡에 세워진 별장으로서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 건축양식이 주택에 적용된 흥미로운 사례다

또 안채는 근대 서울 한옥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반계 윤웅렬 별장 / 지방 민속자료 제12호 한옥

예전 공사중일 때 사진이다

*

(2011. 4. 9)

 

 

 

 

제비꽃다방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버스정류장 앞이다

마침점이다

 

 

 

 

걸은거리 9.9km · 소요시간 4시간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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