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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삼릉 태실 · 회묘

서삼릉 태실 · 회묘

고양 서삼릉 내 조선왕릉의 집단 태실과 분묘는 전국 각지의 명산에 있던 국왕 · 왕자 · 왕녀의 태실과

서울 · 경기 일원에 있던 왕자 · 왕녀 · 후궁의 무덤을 옮겨 놓은 곳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씨의 태(胎)를 묻은 곳으로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산의 좋은 자리에 모심으로써 아기씨의 건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전국의 국왕과 왕실 가족의 태실 54기가 발굴되어 그 태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재 묻혀있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비석만 남아 있다

1930년대에는 조선왕실 왕자 · 왕녀 · 후궁들의 무덤을 옮겨와 왕자 · 왕녀 묘역과 후궁 묘역을 조성하였다

광복 후 1960년대에도 도시화 개발 과정에서 서울 · 경기 지역에 있던 후궁들의 묘가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마지막으로 1969년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던 성종의 왕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회묘를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자 · 왕녀 묘 가는 길

낮은 언덕을 넘으면 효릉가는 갈림길이다

 

 

 

 

태실(胎室)

일제강점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을 발굴하여 수습한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서 조성한 태실군이다

태실이란 태를 묻은 석실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생명체의 근원이라 여겨 매우 귀중하게 보관하였으며,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백자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산에 묻었다

이곳에는 오석(烏石) 비군과 화강석(花崗石) 비군으로 나누어진다

오석 비군은 왕과 황제 · 황태자의 태실(22기)이고, 화강석 비군은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32기)이다

조성 당시에는 「일(日)」자형 담장과 일본식 철문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담장과 철문을 철거하고 1996년에 발굴 조사를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왕자 · 왕녀 묘 안내판

 

 

 

 

오석(烏石) 비군

오석 비군은 왕과 황제 · 황태자의 태실(22기)이다

 

 

 

 

화강석(花崗石) 비군

화강석 비군은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32기)이다

 

 

 

 

비석 뒷면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의 연호(昭和)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서삼릉 태실 태항아리 재현품 전시실

태실은 왕  · 왕세자  · 왕자(대군  · 군)  · 왕녀(공주  · 옹주) 등이 태어나면 그 태반과 탯줄을 묻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생명체의 근원이라 여겨 매우 귀중하게 보관하였는데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모아 백자항아리에 담고 그 항아리를 전국 명산에 묻었다

서삼릉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발굴하여 수습한 유물들을 모아서 조성한 태실군으로 총 54기로 이루어져 있다

 

 

 

 

서삼릉 태실 태항아리 재현품

전시된 8점의 태항아리는 재현품으로 태조의 외항아리 1점 · 세종의 내항아리 1점  · 

인조의 내 · 외항아리 2점  · 숙종의 내 · 외항아리 2점 · 정조의  · 외항아리 2점이며

서삼릉태실연구소로부터 2020년 12월에 기증받아 전시되었다

 

 

 

 

 

왕자 · 왕녀 묘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왕자(王子) 묘 8기와 왕녀(王女) 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를 한곳에 모아 조성한 묘역이다

각각의 봉분 앞에는 원래의 묘비석과 옮겨오면서 새로 제작한 묘비석이 세워져 있다

묘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담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 앞에는 문석인과 상석  ·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왕자 · 왕녀 묘

 

 

 

 

왕자 · 왕녀 묘

 

 

 

 

대군지묘(大君之墓)

고종  · 명성태황후 민씨 3남의 묘로 초장지는 서울 숭인동이다

*

상석  · 장명등이 앞에 있다

 

 

 

 

망주석 ·  문석인

 

 

 

 

숙의 묘(淑儀墓)

조선 국왕의 후궁(後宮) 묘 5기와 완친왕묘 1기를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한곳에 모아 조성한 묘역이다

각각 봉분에는 상석과 묘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일부 묘비석 뒷면에는 묘가 옮겨진 때와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곡장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숙의 묘(淑儀墓) 안내판

 

 

 

 

왕자 · 왕녀의 태실

 

 

 

 

완화군(完和君 완친왕) 묘

대한제국 1대 고종의 장자 완화군(완친왕)의 묘로 초장지는 서울 하월곡동이다

 

 

 

 

숙의 나씨 묘(淑儀 羅氏 墓)

조선 16대 인조의 후궁 숙의 나씨의 묘로 초장지는 고양군 신도면이다

 

 

 

 

소의 강릉 유씨(昭儀 江陵劉氏) 묘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소의 유씨의 묘로 초장지는 모른다

 

 

 

 

숙의 밀양박씨(淑儀 密陽朴氏) 묘

 

 

 

 

 · 귀인 묘(嬪  · 貴人 墓)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왕과 황제의 의 후궁(後宮) 묘 16기를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한곳에 모아 조성한 묘역이다

각각 봉분에는 상석과 묘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일부 묘비석 뒷면에는 묘가 옮겨진 때가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곡장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 귀인 묘(嬪  · 貴人 墓) 안내판

 

 

 

 

 · 귀인 묘(嬪  · 貴人 墓)

 

 

 

 

귀인 밀양박씨 묘(貴人 密陽朴氏 墓)

조선 25대 철종의 후궁 귀인 박씨의 묘로 초장지는 포천시 선단동이다

 

 

 

 

보현당 해주 정씨 묘( 寶賢堂 海州 鄭氏 墓) · 

대한제국 1대 고종의 후궁 보현당 정씨의 묘로 초장지는 서울 월곡동이다

 

 

 

 

 · 귀인 묘(嬪 · 貴人 墓)

회묘 앞에서 봤다

 

 

 

 

회묘(懷墓) 안내판

조선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의 묘이다

폐비 윤씨는 윤기견의 딸로 1473년에 성종의 후궁이 되었고, 1476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투기의 죄로 왕비로서의 품위를 잃었다하여 성종과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 1479년에 폐위되고 1482년에 사사(賜死)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윤씨의 제사를 허락하고 묘의 이름을 회묘(懷墓)라 하였으며

1504년 갑자사화 이후에는 왕후로 복위되어 시호를 제헌왕후라 하고 회묘를 회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에게 내려진 모든 호칭을 없애어 지금의 회묘가 되었다

회묘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회묘(懷墓)

상계 · 중계 · 하계의 3계가 있다

 

 

 

 

회묘(懷墓)

 

 

 

 

장명등

 

 

 

 

혼유석

 

 

 

 

혼유석 고석

 

 

 

 

난간석

 

 

 

 

망주석

 

 

 

 

문석인 · 석마

 

 

 

 

무석인 · 석마

 

 

 

 

석호 · 석양

 

 

 

 

정문으로 가는 길이다

 

 

 

 

서삼릉 안내도

효릉 · 조선왕실 태실  · 분묘군은 이번에 개방되었다

 

 

 

효릉 · 조선왕실 태실  · 분묘군 안내도

 

 

 

 

효릉 · 조선왕실 태실권역 관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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