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의릉~홍릉수목원~세종대왕기념관~영휘원

의릉~홍릉수목원~세종대왕기념관~영휘원 · 숭인원 걷기다

 

 

신이문역 1번출구

시점이다

 

 

 

 

이문동 삼거리

 

 

 

 

 

 

의릉 역사문화관

 

 

 

 

의릉의 주인공과 역사

의릉은 조선 제20대 경종(景宗 1688~1724 · 재위 1720~1724)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1705~1730) 어씨(魚氏)의 능이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종 능 아래쪽에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하나의 능침 구역에 위 · 아래로 능이 있는 동원상하릉 형태이다

1960년대 중앙정보부가 의릉 권역 내에 설치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가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구 중앙정보부)를 서초동으로 옮기면서 2003년부터 본래 왕릉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의릉 금천교(禁川橋)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다

 

 

 

 

비각(碑閣)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의릉 표석은 1724년 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웠던 표석에 1730년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최종적으로 새긴 표석이다

 

 

 

 

조선국 경종대왕 의릉 선의왕후 부(朝鮮國 景宗大王 懿陵 宣懿王后 祔)

 

 

 

 

의릉(懿陵)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단릉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曲墻)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낸 배치이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으로서

풍수지리적으로 생기왕성한 정혈(正穴)에 봉릉(奉陵)한 것이다

석물은 병풍석이 없는 난간석(欄干石) · 혼유석(魂遊石) · 장명등(長明燈) · 망주석(望柱石) · 문무석(文武石)과 석마 · 석 · 석호가 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70년 사적 제204호으로 지정되었다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 사진

옛 중앙정보부가 사용하던 왼쪽 강당(1962년 건축)과 오른쪽 회의실(1972년 건축)이다

1972년 7월 4일, 남한과 북한의 합의에 따른 「7 ·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성 있는 건물로 인정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당시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심미성 높은 건물을 설계하던 건축가 나상진(1923~1973)에 의해 설계되었다

*

7 · 4남북공동성명

첫째.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및 제도적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1972년 7월 4일, 남한과 북한의 합의로 발표한 「7 · 4남북공동성명」이다

 

 

 

 

의릉 향나무 / 나이 160년

상록침엽교목으로 4~5월에 꽃이 피며, 노란 수꽃이 가지 끝에서 긴 타원형을 이룬다

열매는 원형이며 흑자색으로 다음해 9~10월에 익는다

*

찢어지듯 갈라진 줄기로 안쓰럽다

 

 

 

 

서울시 선정 성북구 우수조망명소 안내판

 

 

 

 

북악산 · 보현봉

 

 

 

 

형제봉 · 비봉 · 보현봉 · 만경대 · 백운대 · 인수봉

북한산 마루금이다

 

 

 

 

만경대 · 백운대 · 인수봉 · 오봉 · 신선대 · 자운봉 · 만장봉

북한산 · 도봉산이 우이령 좌우로 있다

 

 

 

 

도봉산

 

 

 

 

북한산

 

 

 

 

천장산 산책로 안내판

 

 

 

 

성북구 방향 · 동대문구 방향 펼침막

 

 

 

 

성북구 안내판

동대문구에서 내려왔다

 

 

 

 

천장산(140m) 정상 아치

군부대로 정상은 오르지 못한다

 

 

 

 

홍릉수목원으로 가는 길이다

 

 

 

 

홍릉 산림과학연구시험림

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홍릉수목원으로 가는 길이다

 

 

 

 

천장산 갤러리 쉼터

홍릉시험림 안내판 · 한국사진작가협회 동대문지부 회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홍릉시험림

 

 

 

 

석조사원의 침식 / 권재화

한국사진작가협회 동대문지부 회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수확의 기쁨 / 송한수

 

 

 

 

어부와 오리 / 김형도

 

 

 

 

천장산 갤러리 쉼터

천장산 안내판 · 한국사진작가협회 동대문지부 회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천장산(天藏山) 안내판

조선시대에 이곳을 두고 하늘이 숨겨둔 곳이라 하여 천장산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왕가의 묘지로 조성되었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무덤인 의릉이 북동쪽에 있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묘가

고종의 승하로 남양주 홍릉으로 합장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소인 숭인원이 있으며 이를 홍릉이라 부른다

 

 

 

 

Zion N'park / 권정욱

 

 

 

 

벽화

 

 

 

 

벽화

 

 

 

 

천장산 하늘길 안내도

 

 

 

 

천장산 하늘길 입구 아치

 

 

 

 

홍릉수목원(洪陵樹木園) / 미래산림전략연구동 · 산림과학관

홍릉수목원은 국립산림과학원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수목원으로

1922년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홍릉 지역에 임업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성되었다

국내외 식물유전자원 총 2,035종 (목본 1,224종 · 초본 811종)을 보유하고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하여, 기초 식물 학문 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다

현재는 주말에 무료개방하고, 주중은 숲해설 프로그램 (월요일 제외) 신청을 통해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개방시간은 동절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 하절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어정(御井)

홍릉에 들렸던 고종(高宗)이 잠시 쉬며 목을 축이던 곳이다

키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어정에서 명성황후의 능에 행차했던 황제가 황후를 그리며 잠시 쉬었을 지도 모른다

 

 

 

 

홍릉터(洪陵址)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왕비 명성왕후가 묻혔던 곳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이곳 천장산 산줄기 아래에 22년간 안장되었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경기 남양주 금곡동 현 홍릉으로 합장되었다

*

명성황후는 경기 여주에서 태여나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여 민씨정권을 수립하고 개국정책을 주도하는 등 정치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다

일본세력을 추방하려 러시아까지 동원했으나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경복궁의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했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증되었다

 

 

 

 

홍릉 전경

홍릉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홍릉 / 1919년

 

 

 

 

홍릉수목원 본관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각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보물 제1805호)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신이 심하게 부식되어 표면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비문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1469년(예종 1) 영릉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과 1738년(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 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 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비석의 받침돌은 찾지 못하였다

1999년 2월에 받침돌을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였다

 

 

 

 

세종대왕기념관 세종대왕 상

대왕의 위업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자문을 받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단기 4298년 3월부터 추진하여 4301년 5월 4일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모셨던 것이다

이제 세종대왕 탄신 육백열다섯 돌을 맞이하여 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좀더 성실히 기리고 대왕의 높은 뜻을 드높이고자

세종대왕동상이전위원회가 문화재청 등 정부의 도움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이 자리잡은 세종공원으로 옮겨 모셨다

 

 

 

 

구 영릉 석물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호 · 문종 2년(1452)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으로 처음에 헌릉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강남구 대곡동)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가 아니라는 논의가 일어나서 예종 원년(1469)에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 갔다

이 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현지 주변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시경 스승 묘비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룡골에서 태어나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년 7월 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1959년 10월 7일 「고 주시경 선생 이장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 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 제막식」을

1960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 참배리에 거행하였다

그 뒤 1981년 12월 12일 국립묘지 국가 제2유공자 묘역으로 다시 옮기실 때 묘비를 비롯한 석물을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 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2008년 7월 31일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문석인

 

 

 

 

무석인

 

 

 

 

수표(보물 제838호)

조선시대에 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기 위하여 수표교 서쪽에 세웠던 수위측정기다

수표는 1441년(세종 23)에 나무로 만들어 처음 세웠고 성종 때(1469~1494)에 돌로 다시 만들었다

현재의 수표는 조선 후기에 청계천 바닥에 쌓인 토석을 걷어내는 준설 공사를 벌인 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청계천 바닥에 직육면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를 기둥 모양으로 깎아 세웠으며 맨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돌기둥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육각 모양으로 만들어 그 표면에 1자에서 10자까지 눈금을 새겼다

한 눈금은 주척(周尺) 1자로 평균 21.5cm 간격이다. 그 중 3자 · 6자 · 9자를 각각 갈수 · 평수 · 대수로 삼았다

이 수표는 청개천을 덮는 복개공사 때문에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농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가뭄과 홍수를 예측했던 과학문화재로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체 높이는 3m다

 

 

 

 

숭인원(崇仁園)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인 의민황태자의 첫 아들 이진의 무덤이다

이진(1921~1922)은 일본에서 태여나 의민황태자 내외가 귀국하였을 때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순종황제의 명에 의해 특별히 원으로 조영된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숭인원(崇仁園) 안내판 · 상설도 해설

 

 

 

 

영휘원(永徽園)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이다

순헌귀비(1854~1911)는 의민황태자 영왕(英王)의 어머니로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후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된 의민황태자는

1907년에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인질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1963년 귀국하였으나, 1970년 병으로 돌아가셨다

신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귀비는 양정의숙 ·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숙명여학교의 설립에 기부하여 근대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청량사(淸凉寺)

천장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사찰로 예부터 4대 비구니사찰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도 이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강점기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하게 되자

홍릉 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고,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 한다

독립운동과 불교 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시로 전해진다

 

 

 

 

경찰서 구내 이발관

이발 6,000원이다

 

 

 

 

청량리역 롯데캐슬SKY- L65오피스텔

청량리역이 마침점이다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천사  (0) 2023.06.28
서울 정릉  (0) 2023.06.28
홍릉수목원  (1) 2023.06.25
서울 의릉  (0) 2023.06.25
경기도 삼남길 제8길(오나리길)  (1) 2023.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