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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헌인릉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호)

조선 제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인릉을 함께 헌인릉이라 부른다

*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 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세종 승하 후 묘역도 유언대로 이곳 헌릉 서쪽편에 조성되어 18년간 있었는데 제7대 임금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세종의 능을 이장하자는 추진에 따라 예종 원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이장하여서

태종의 능만 남았다가 후에 제23대 임금인 순조가 안장되면서 지금의 헌인릉이 되었다

 

 

헌인릉 · 강남서초과학화예비군훈련장 버스정류장

시점이다

 

 

 

 

남한산 · 검단산

버스정류장 육교에서 봤다

 

 

 

 

농원

인릉 재실로 가다 봤다

 

 

 

 

인릉 재실(仁陵齋室) 행랑청(行廊聽)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주요 시설로는 제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 제례를 주관하는 전사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 행랑채 등이 있다

*

행랑청에는 대문 · 하인방 · 마구간 · 창고 · 집사방 등이 있다

 

 

 

 

인릉 재실(仁陵齋室)

평상시 능참봉(陵參奉 · 종9품) 이 근무하며,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능역을 관리 · 수호하는 사람들의 근무 장소이다

단청은 하지 않았다

*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그 중간 부분이 6 · 25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서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헌인릉(獻仁陵) 안내도

 

 

 

 

헌인릉(獻仁陵) 입구 · 매표소

종합안내도 · 안내해설 안내판이 양편에 있다

 

 

 

 

헌인릉(獻仁陵) 종합안내도

 

 

 

 

서울 헌릉과 인릉 안내해설 안내판

13시 30분 안내해설을 들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빗돌

헌릉(獻陵) · 인릉(陵) 빗돌이 옆에 있다

 

 

 

 

헌인릉 홍살문 · 판위(板位)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

판위는 왕이 능이 있는 구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공간이다

 

 

 

 

향로(香路) · 어로(御路)

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 어로는 왕이 제향을 올릴 때 다니는 길이다

정자각(丁字閣) 옆에 비각(碑閣)이 있다

 

 

 

 

정자각(丁字閣)

왕릉에서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침전이라고도 한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을 차려 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져 있는데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丁(정)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 불렀다

왕릉에는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경우에도 정자각은 하나를 세우고 제향을 함께 지냈다

대한제국 때는 침전 안에 집 모양 장식인 당가를 설치하면서 건물의 규모를 늘려, 건물 모양이 '一(일)'자형으로 바뀌었다

 

 

 

 

신계(神階) · 어계(御階)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 · 향교와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이다

 

 

 

 

예감(瘞坎)

조선시대까지 장대석을 다듬은 형태로 설치되다가 대한제국기 홍릉(洪陵)에서는 통 돌을 방형으로 다듬은 형태로 변화하며

순종의 유릉(裕陵)에서는 지대석 위에 반방전을 쌓아 굴뚝형태로 변화하였다

*

제사를 지낸 뒤에 축문과 폐백 따위를 묻거나 태우는 곳이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비각(碑閣)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보통은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비석 수가 늘어나면 칸 수를 늘려 짓기도 했다

*

인릉에는 구비(舊碑)와 신비(新碑)가 있다

 

 

 

 

인릉 구 비(仁陵 舊碑)

조선국순조대왕인릉 순원왕후부좌(朝鮮國純祖大王仁陵 純元王后祔左)

 

 

 

 

인릉 구 비문(仁陵 舊碑文) 안내판

 

 

 

 

인릉 신 비(仁陵 新碑)

대한 순조숙황제인릉 순원숙황후부좌(大韓 純祖肅皇帝仁陵 純元肅皇后祔左)

광무 3년(기해 1899) 11월에 추존하여 시호를 숙황제로 묘호를 순조라 하였다

*

표수석은 철종의 친필 글씨이다

이번에 세우는 비는 원래의 표석 다음으로 세우고, 전면과 추존하는 기록을 삼가 써서 소자의 작은 정성을 표한다

광무 4년(1900) 월 일

 

 

 

 

인릉 신 비문(仁陵 新碑文) 안내판

 

 

 

 

제수신설도 · 제기류 · 기신제 안내판

 

 

 

 

인릉(仁陵) / 사적 194호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봉분으로서 무덤 아래에 병풍석은 없이 12간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로 석양과 상석 1좌 · 망주석 1쌍 · 석마 각 2쌍을 3면의 곡장으로 에워쌌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과 석마 1쌍 그 아래 무인석과 석마 각 1쌍 · 명등 1좌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헌릉(獻陵) / 사적 194호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이 정자각 뒤로 보인다

 

 

 

 

로(香路)

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왕이 제향을 올릴 때 다니는 길인 어로(御路)가 없다

 

 

 

 

정자각(丁字閣)

왕릉에서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침전이라고도 한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을 차려 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져 있는데 

배위청이 옆으로 돌아 합쳐졌기에 풍판(風板)이 앞면에 있고, 어로(御路)도 옆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신계(神階) · 어계(御階)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 · 향교와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이다

조성된지 오래되어 지반이 내려앉았다

 

 

 

 

비각(碑閣)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보통은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비석 수가 늘어나면 칸 수를 늘려 짓기도 했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太宗 獻陵 神道碑)

처음 건립된(1424) 구비(舊)로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왕조의 왕권을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24년(세종 6)에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고, 글씨는 성개(成槪 ? ~1440)가 썼으며, 전액(篆額)은 권홍(權弘 1360~1446)이 썼다

신도비에 새겨진 글씨는 조선 초기의 서예 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의 귀부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훼손되었지만 이수(螭首)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명나라 석비 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석비 전통을 마련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太宗 獻陵 神道碑)

숙종 21년(1695) 중건된 신비(新碑)로 병화(兵禍)로 1424년 건립된 비에 새긴 글씨가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어려워

숙종 21년(1695) 원래의 비 옆에 신비(新碑)를 설치하였다

 

 

 

 

신위 평상(神位平床)

제향 때 혼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정자각 뒷편에서 보았다

 

 

 

 

신로(神路)

능상(陵上)에서 정자각 신위 평상(神位平床)으로 오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헌릉(獻陵) / 사적 194호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봉분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봉분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헌릉(獻陵)

석양(羊)과 석호(虎) 각 4쌍 · 혼유석(魂遊石) 2좌 · 망주석(望柱石) 1쌍을 3면의 곡장(曲墻)으로 감싸 안으며 봉분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헌릉(獻陵혼유석(魂遊石) · 망주석(望柱石) · 장명등(長明燈)

 

 

 

 

헌릉(獻陵)

그 아래 단인 중간 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 · 마석(馬石) 2쌍 · 팔각형 장명등(長明燈) 2좌가 있다

 

 

 

 

헌릉(獻陵)

그 한 단 아래에는 무인석(武人石) · 석마 각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다

 

 

 

 

헌릉(獻陵)

헌릉은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 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헌릉(獻陵) 정자각(丁字閣) · 비각(碑閣)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헌릉 소전대(獻陵 燒錢臺)

소전대는 태조의 건원릉 · 제2대 정종의 후릉 · 제3대 태종의 무덤인 헌릉에만 있다

소전(燒錢)은 망자의 노잣돈을 마련해 주는 의식으로 화장을 하는 불교사회에서 매장을 하는 유교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유물로

세종대 왕릉제도를 정비하여 이후의 능에서는 소전대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대신해 예감이 설치되었다

 

 

 

 

헌릉 소전대(獻陵 燒錢臺)

제2대 정종의 후릉 소전대는 세종의 지시로 없앴으며 세종 이후에는 예감이 대신하였다

 

 

 

 

헌릉 정자각

소전대(燒錢臺)가 정자각 옆에 있다

 

 

 

 

오리나무 숲 생태탐방로

헌릉과 인릉을 연결하는 길이 270m 데크 길이다

 

 

 

 

오리나무 숲 안내판

대모산의 남쪽으로 유입되는 빗물에 의해 형성된 습지대에 서울시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큰 오리나무 군락으로

2005년 11월 24일 「서울특별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습지에 살고 있는 동물들

 

 

 

 

생태탐방로 쉼터

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습지에 살고 있는 식물들

 

 

 

 

습지에 살고 있는 식물들

 

 

 

 

조선왕릉 습지

조선왕릉 습지는 능역 안을 흐르는 물길(명당수)이 퇴적 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왕릉의 좌청룡, 우백호의 물길이 만나는 장소 및 지형이 낮은 지역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습지로 다양한 습지식물과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

서울 헌인릉을 비롯하여 구리 동구릉 · 서울 선정릉 · 고양 서오릉 등의 왕릉에서 습지가 나타나고 있으며

습지에는 대부분 오리나무 · 버드나무 · 신나무 · 물푸레나무 · 갈참나무 · 음나무 · 때죽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왕릉 숲

조선왕릉 능역의 대부분은 숲 공간으로 능침을 중심으로 나무가 겹겹이 에워싸 숲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잣나무 등을 능역에 많이 심었으며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에는 잔디를 심어 사초지를 만들었다

특히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식재하도록 하는 것은 조선왕릉 능역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특히 오리나무의 경우에는 습지에 강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수종으로 지대가 낮은 왕릉의 진입부에 식재함으로써 물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하였다

 

 

 

 

인릉(仁陵)

생태탐방로로 돌아와 다시 봤다

*

헌인마을 · 서울농업기술센터 버스정류장이 마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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