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심재영 고택(唐津 沈載英古宅)
소설 상록수의 남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 심재영 선생께서 1930년 지으시고 1995년 소천하실 때까지 평생을 사신 한옥이다
이 고택에서 심재영 선생이 청년시절에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1932년에 심훈 선생께서는 이 고택으로 낙향하시어 1934년 이주할 때까지 「직녀성」 · 「영원의 미소」를 집필하였다
지금은 심훈가(家) 후손이 살고 있다
심재영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나의 강산이여 / 심훈 1926년 5월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줄기
네 품에 안겨 뒹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번만 찌르면 먹장구름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애향가 빗돌
1. 아산만과 송악산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漢谷) 만세!
(후렴) 비바람은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 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2.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3.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지 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자!
*
이 노래는 당시 애국가 곡조에 맞추어 부를 수 있었다
당시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에 맞춰서 불렀다
일제는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심훈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애국가 곡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애국가 형식으로 애향가를 지어주었던 것이다
구절구절이 사무치는 가사였기에 혼자도 부르고 둘이도 부르고 기뻐도 부르고 슬퍼도 불렀다
심재영 고택
심재영 고택
고택 대문
「심재영 고택 1930년 준공」 안내판이 붙어 있다
고(故) 심재영 · 심천보(沈天輔) 문패
심재영 선생 상
심재영 선생(1912~1995)
경성농업을 졸업하시고 낙향하시어 야학당과 공동경작회를 시작하여 낙후된 농촌의 발전에 젊음을 바치신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인물이신 심재영 선생을 추모하며
농촌을 사랑하시던 그 높은 뜻이 후세에 영원히 전수되길 소원하면서 여기에 그 모습을 남기나이다
2016년 5월 1일
그날이 오면
심훈 선생께서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기거하시며 소설 「직녀성」 · 「영원의 미소」를 집필하시고
필경사를 짓고 거처를 옮기셨다
청련시경(靑蓮詩境) / 솔진(率眞) 완당(阮堂) 김정희인(金正喜印) · 19세기 복제품
청련시경은 심훈 선생의 증조부이신 심의붕 선생이 김정희 선생과 교류하여 얻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훈가(家)에서 170년간 소장하다가 종손 심천보 선생이 2019년 5월 10일 예산군에 기증하였다
〈청련시경〉의 글자는 양각으로 새겼으며 제작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김정희가 만년에 직접 쓴 글씨이다
청련(靑蓮)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호를 의미하고 시경(詩境)은 시를 지을 만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장소를 가리키는데
이처럼 청연과 시경이 결합되어 이백이 시를 지을만한 뛰어난 장소를 의미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현판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50호 해초 박학규 선생이 각(刻)한 현판으로 예산군에서 기증하였다
공산노추(空山老錘)
추사는 텅빈 산속에 숨어사는 노승을 일러 공산노추(空山老錘)라 하였다
□자형 고택 안마당
사랑채
1932년 심훈 선생께서 낙향하시어 1934년 이주할 때까지 「직녀성」 · 「영원의 미소」를 집필하신 방이다
안채
심훈 · 심재영 사진
밀레의 만종 · 아산만 방향 사진
청송심씨 가계도
海平尹氏(해평윤씨) · 相珽(상정) 1871~1950
1901~1936 대섭(大燮 본명 심훈(沈熏) · 명섭(明燮) · 友燮(우섭) 1890~1948
은진송씨(恩津宋氏) 재영(載英) 1912~1995
영보(永輔) · 덕보(德輔) · 천보(天輔) 1940
규천(揆天) 1969
그날이 오면 / 심훈
청송심씨종보
《상록수》 쓰신 마음으로 《우리는 누구인가》를 썼다
우리는 누구인가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심훈가 종손 심천보 지음
눈밤 / 심훈
심훈선생기념사업회 심천보 이사장
심천보 이사장
1. 밝은 빛
2. 맑은 마음
3. 즐거운 생활
심훈 전집
빈한아동위해 삼개야학설립 / 동아일보 1937. 11. 1 기사(뉴스)
심천보 선생
아산만 방향
마당에서 봤다
청송심공상정(靑松沈公相珽) 배 해주윤씨(配 海州尹氏) 묘(墓)
심훈의 부모의 묘 · 심재영 고택 입구에 있다
상록수교회(常綠樹敎會)
심훈 선생의 형 심명섭 목사가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게 납북을 당한 후
향리에 내려온 부인 권유희 권사와 심훈가(家) 가족 중심으로 소수의 피난민과 주역주민이 참여하여
1951년 9월 23일 필경사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21년간 필경사를 교회당으로 사용하여 예배를 드린 후 2차 교회당을 거쳐 2001년 4월 16일 지금의 자리에 3차 교회당으로 신축 봉헌되었다
심훈 선생의 이모 윤병영 전도사가 초대와 제8대 담임교역자로 사역하셨고 부곡교회로 설립되었다가
2007년에 심훈 선생의 농촌계몽운동을 신앙적 계몽운동으로 이어가려는 뜻을 담아 당진 상록수교회로 개명하였다
*
(2023. 0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