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8년(1842)에 세워진 행주서원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이룬 권율(權慄) 장군을 모신 곳이다
행주서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기공사(紀功祠)라 하였으나 6 · 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점차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판은 고종 때 무신으로 글씨와 문장이 뛰어난 신헌이 썼다
권율 장군은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32년 전라도 병력을 인솔하여 행주산성에 주둔하던 중 3만명의 왜군과 싸워 2만4천명을 사살하는 행주대첩 전과를 올린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왜군이 철수한 선조 37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 선무공신 1등에 영의정 벼슬을 받았고, 시호를 충장공이라 하였다
행주서원(幸州書院)
권율 도원수의 전공을 기리고 호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사당 건립의 동기는 조선 후기 헌종 임금이 고양지역 왕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양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이때 영의정이던 조인영이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공을 아뢰며 사당을 세워 무공을 기릴 것을 간청하자 이를 쾌히 승낙하면서부터이다
일 년 후 사당이 완공되고 사당 이름은 기공사(紀功祠)라 하였다
기공사는 권율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점차 후학을 가르치는 서원의 기능이 더해져 교육기관으로의 역할도 하게 되면서 그 명칭이 행주서원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행주서원 행랑채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고양지역의 서원이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한강의 범람 등으로 건물이 훼손되어 보수와 중수를 거치다 한국전쟁 때는 사당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1988년부터 부분적으로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1999년에 이르러서야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약 20여 명의 원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행주서원(幸州書院) 현판
고종 때 무신으로 글씨와 문장이 뛰어난 신헌이 썼다
강당(講堂)
행랑채 · 강당(講堂)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
기공사는 충장공 권율 장군의 배향 사당이었으나 행주대첩 당시 함께 싸웠던 권율 장군 휘하 장수들의 공을 기리며
2008년부터는 부원수 선거이 · 조방장 조경 · 선무사 변이중 · 경기수사 이빈 · 충청수사 정걸 · 의승장 처영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제향은 봄 · 가을에 춘향제,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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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비(중건비)
기공사(紀功祠)가 건립된 후 1845년(헌종 11)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에는 행주산성 내의 행주대첩비(초건비) 내용과 기공사 건립과정이 추기로 기록되었다
이 비석은 행주서원이 복원되기 이전 1970년대 행주산성 정화사업으로 조성된 행주산성 내 사당 충장사로 옮겨졌다가 2011년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왔다
행랑채 · 협문(夾門)
화장실 · 협문(夾門)
행주서원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