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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춘당 및 동춘당 종택

동춘당(同春堂 · 보물 제209호)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宋爾昌 · 1561~1627)이 세웠던 건물을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이 38세(1643년 · 인조 21) 되던 해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은 별당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구획된 공간에 멀찍이 물러서 동춘당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는 여타의 조경없이 담장 주변으로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는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다

 

 

동춘당 생애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은 조선 후기 문신 · 학자. 자는 명보(明甫) · 호는 동춘당 ·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이창의 가르침을 받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업을 닦았다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였던 그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인조 말부터 권세를 잡고 있던 공서파(攻西派) 김자점(金自點)을 탄핵 · 파면시키도록 하여 청서파(淸西派)가 집권하도록 하였다

효종과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남인 윤휴 · 윤선도 등이 3년제를 반대하여 기년제를 주장, 논란 끝에 승리하고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65년 원자보양(元子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상소로 사퇴하였다

뒤에 좌참찬 겸 좨주 · 찬선에 이르렀다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이 같았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묘를 비롯하여 숭현서원 · 흥암서원 · 충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동춘당역사공원 입구에 있다

 

 

 

 

송준길 시호교지 및 벼루와 벼루갑

 

 

 

 

대전 회덕 동춘당(大田 懷德 同春堂)

문화재를 알기 쉽게 안내하기 위해 제작된 모형이다

 

 

 

 

대전 회덕 동춘당(大田 懷德 同春堂)

계족산을 등지고 대덕구 송촌동에 위치한 동춘당은 조선 현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준길이 관직에서 물러나 지내던 곳으로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검소하게 지었다

 

 

 

 

동춘당(同春堂) 현판

숭정 무오 모춘 화양동주서(崇禎 戊午 暮春 華陽洞主書)

*

동춘당이란 별당 이름은 송준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만물과 더불어 봄과 함께 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현판 글씨는 송준길의 사후에 우암 송시열이 1678년에 친필로 쓴 것이다

 

 

 

 

대전 동춘당 종택 대문

동춘당은 오른쪽에 있다

 

 

 

 

동춘당 종택(同春堂 宗宅) / 국가민속문화재 제289호

송준길의 5대조 송요년이 15세기 후반에 지었다고 전하며, 이후 몇 차례 옮겨 지었다

현재의 고택은 1835년에 중건한 모습이다

종택은 사랑채 · 안채 · 별당 · 별묘 · 가묘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규모가 크고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에 따로 마루방이 있다

안채는 'ㄷ'자 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부엌 · 안방 · 골방을 배치하였고, 동쪽에는 안쪽부터 건넌방 · 부엌 · 행랑방이 있다

안마당과 사랑채 사이에 내외담을 두어 내외를 구분하였다

별묘에는 송준길의 신위를 모시었고, 가묘에는 제사를 받드는 4대 신위를 모시었다

동춘당 종택은 호화롭지 않고 검소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공간 배치가 넉넉한 기호지방 영반 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춘당 사랑채 · 안채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치고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본래는 사랑채 뒤에 반침이 있어 내외담 역할을 하였는데 썩어서 헐어버리고 난 뒤에 격담을 하였다

 

 

 

 

동춘당 사랑채

정면 6칸 ·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대청이 놓이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 사랑이 배치되고 좌측 1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백세청풍(百世淸風)

사랑채 현판이다

 

 

 

 

사면유산계입진(四面有山皆入盡)

사랑채 편액이다

 

 

 

 

송씨별묘(宋氏家廟) · 송씨가묘(宋氏家廟)

 

 

 

 

송씨별묘(宋氏家廟) · 송씨가묘(宋氏家廟)

 

 

 

 

송씨별묘(宋氏家廟)

조선시대 사묘(祠廟)는 구역 내에서 뒤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배치하는데, 이러한 규범을 잘 따르고 있다

동춘당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송씨가묘(宋氏家廟)

4대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둘 다 똑같이 정면 3칸 · 측면 1칸의 건물로 앞쪽에 퇴칸을 두고 있다

 

 

 

 

동춘당(同春堂) / 보물 제209호

소대헌 · 호연재 고택으로 가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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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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