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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광한루원

광한루원(廣寒樓園 · 명승 제33호)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대표적인 정원으로, 천체 우주를 상징하여 조성되었다
신선이 살았을 만한 광한루 · 은하를 상징하는 호수 · 천상으로 인도하는 오작교 · 춘향을 기리는 춘향사 · 완월정 · 영주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광한루의 빼어난 경치를 찬양한 80여 점의 편액에 200여 수의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춘향이와 이도령
이몽룡과 성춘향이 열여섯 되던 해 광한루에서 만나 서로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사랑이 싹트는 연인의 모습을 통하여 사랑의 도시 남원을 상징하고자 하였다

 

 

광한루 북문

 

 

광한루(廣寒樓 · 보물 제281호)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라 불렀다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건물이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하여 광한루(廣寒樓)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된 누각을 1626년에 복원하였다

 

 

광한루(廣寒樓)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 밀양 영남루 ·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 중 하나로
이중에서 가장 긴 역사와 유일하게 인공적인 조경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광한루(廣寒樓)
이렇게 아름다운 누각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같이 몸살을 겪게 되는데
누각 마루 위는 재판소 · 누각 마루 밑은 감옥으로 사용되어 군데군데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편액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광한루(廣寒樓)
누각 뒤에 설치된 계단식 현관 시설은 1877년 추씨 대목장이 뒤쪽으로 기우는 광한루를 지탱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2층 내부엔 김종직 · 정철 · 백광훈 등 조선시대 명사들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출입금지다

 

 

광한루(廣寒樓) 돌기둥
이렇게 아름다운 누각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같이 몸살을 겪게 되는데
1910년부터 18년간 누각 마루 위는 재판소 · 누각 마루 밑은 감옥으로 사용되어 군데군데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1층 돌기둥마다 칸막이를 위해 파낸 홈들이 남아 있다

 

 

오작교(烏鵲橋)
1461년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는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다

 

 

방장정(方丈亭)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섬 · 방장섬 · 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자라돌(鼇石)
한서(漢書)에 발해(渤海)에 유대오(有大鰲)하여 배부삼산(背負三山)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연상해서 호중(湖中)에 삼신산(三神山 · 영주 · 봉래 · 방장)을 선조 15년(1579) 송강 정철이 만든 뒤
이 고장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여기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광한루원 잉어의 유래
옛날에는 누각 앞에 좁다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전라도 관찰사 정철이 은하수를 상징하는 넓은 연못을 만들었다
이곳 연못에는 광한루원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증으로 3,000여 마리의 토종 잉어와 비단잉어가 살고 있다
잉어의 수명이 70~80년 정도이며, 이곳에는 사람 얼굴을 닮은 인면어가 살고 있어 이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다

 

 

개버드나무

 

 

이방 포토존

 

 

월매집
고전문학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으로, 남원부사 이한림의 아들 이몽룡이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던 성춘향에 반하여 월매집을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내용에 따라 월매집이라 하였다

 

 

월매방

 

 

부용당

 

 

행랑채

 

 

장원급제 기원단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지신(天地之神) 일월성진(日月星辰)은 화이동심(和解同心) 하옵소서
무남독녀 춘향이가 죄없이 매를 맞고 옥중에 갖혔나이다
다만 바라옵건대 한양 가신 몽룡 도령이 장원 급제 이루시어
전라감사나 어사로 내려와 내 딸 춘향이를 살려주게 하옵소서 빌고 또 비옵나이다

 

 

행운의 동전넣기

 

 

춘향관(春香館)
춘향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 뮤지컬 · 오페라 · 창극을 소개하고 관련 소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광한루원내 건축물 영상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역대 춘향영정 / 이당 김은호 · 작가 미상

 

 

황희 · 정철 · 정인지 · 신흠 · 신감 · 신익성
광한루와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춘향전 / 춘향을 따라 사랑을 만나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때, 단오일에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광한루에서 그네 뛰는 춘향을 만난다
첫눈에 반해 혼약을 하지만 이 부사가 서울로 가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게 된다
새로 온 남원부사 변학도는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명령하지만 춘향은 거부하고 옥에 갇힌다
그 사이 이도령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고 춘향이 옥에 갇혀 내일이면 죽게된다는 말을 들은 이도령은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어사출두를 하여 춘향을 구하고 오래도록 행복한 일생을 보낸다
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시대, 양반과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 격차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낸 춘향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만고열녀 춘향전(딱지본) / 1950년대 초반 추정

 

 

춘향전 / 1970년 · 박동진 · 김소희

 

 

춘향영화제

 

 

팽나무
조선 명종 13년(1558)에 심어졌던 것으로 광한루원 조성 전 「남산관」 마당에 정원수로 있었던 것을 기증받은 것이다
팽나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운이 허한 곳을 보완해 주는 비보림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마을을 수호하는 당산나무로 심어지고 보호되어 왔다
*
나무 높이 18m · 가슴높이 둘레 3.7m · 수관 폭 20여 m

 

 

완월정(玩月亭)
1971년에 세운 수중 누각으로 현재는 춘향제 등 행사에서 공연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달을 즐기는 정자라는 뜻을 가진 누원 건물로 남원성 남문의 문루 이름인 완월루에서 따온 명칭이다

 

 

영주각(瀛洲閣)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영주각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버드나무
1582년 선조 재위 15년경에 연못을 조성하고 오작교 축조와 함께 심어졌던 것으로 당시 관찰사는 송강 정철 · 부사는 장의국이다
*
나무 높이 25m · 가슴높이 둘레 4m · 수관 폭 25m

 

 

충혼불멸비(忠魂不滅碑)
지리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많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비들이 은거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합동작전을 했다가 공비로부터 희생된 민간인과 청년단원 286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4년 5월 10일에 대한청년단이 비를 건립하였다
현충시설로 지정된 일자는 2003년 9월 15일이며 탑 높이는 1.88m · 가로 0.5m · 부지 면적은 9.9㎡이다

 

 

면장 양공재영시혜비(面長 梁公栽英 施惠碑)

 

 

춘향사당(春香祠堂)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당이다
사당의 대문을 단심문이라 하는데 이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란 의미이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사당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참배객이 찾고 있다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
1931년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 선비들의 충절정신을 춘향사당 건립으로 표현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슬기롭게 피하려는 방편으로 여성을 앞세워 전국의 권번을 찾아 성금을 모금하여 건립하고
그해 6월 20일 단오날 준공식과 함께 최초로 제사를 지냈으며, 오늘날의 춘향제의 모체가 된다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 편액
사당 정문 위에는 자라가 등에 토끼를 태우고 물결을 헤치며 이동하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충성의 표상인 자라와 번뜩이는 기지로 용궁을 탈출한 지혜를 상징한다
*
사당 안에 안치된 춘향영정은 본래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리고 뒤이어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작품을 기증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뽕나무
1855년 경(철종 6) 이상억 부사가 광한루 중수 당시 심었던 것으로 잎은 누에를 기르는데 이용되며, 열매 오디는 술을 담그거나 날 것으로 먹는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부터 뽕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다
*
나무 높이 18m · 가슴높이 둘레 1.6m · 수관 폭 15m

 

 

비석군(碑石群)
과거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 · 관찰사 · 어사들의 사적비 및 선정비 등이다
예전에는 남원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실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 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 형식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부사송후수연영세불망비(府使宋侯守淵永世不忘碑)
조선시대 방부하엽(方趺荷葉) 양식의 묘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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