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씨행단(사적 제109호)은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 · 1360~1438)의 집안이 살던 곳으로
지역 안에는 고택과 세덕사 · 구괴정 ·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아산 맹씨행단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고불 맹사성기념관
고불 맹사성 선생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대기와 전해 내려오는 수 많은 청렴이야기 · 맹씨행단의 역사 등 새로운 역사 사실을 접할 수 있다
아산 맹씨행단 맞은편에 있다
회화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4m · 둘레 120cm · 나이 약 320년 · 지정일자 1982. 11. 10
홍예교를 건너면 맹씨행단이다
문간채
맹사성 고택
문간채를 들어서면 외담과 내담이 있다
맹씨 고택
오른쪽 계단을 통해 본채 공간으로 들어간다
쌍행수(雙杏樹) 보호수
1982년 11월 1일 도(道) 나무로 지정된 수령 640년된 은행나무다
쌍행수 한 그루는 높이 40m · 둘레 580cm · 다른 한 그루는 높이 45m · 둘레 850cm로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아산 맹씨행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으로 봉직한 맹사성이 1380여 년경에 심은 것이다
당시 맹사성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곳을 행단이라 칭하였다 한다
쌍행수(雙杏樹) 보호수
우측 나무는 2~300여 년 전부터 싹이 원목 옆 사방으로 자라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 것이며
1987년 원목의 구멍이 부패하여 외과 수술을 받았다
맹씨 고택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2월 무민공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실제로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
세덕사가 오른쪽에 있다
맹씨 고택
1388년(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이 죽은 뒤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맹사성은 최영의 외손녀 사위다
맹씨 고택
1482년(성종 13) · 1642년(인조 20) · 1814년(순조 14) 그리고 1929년에 각각 건물을 손질하여 고친 기록이 있으며
고택 가구부에 남아 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이 견실한 고법을 가지고 있어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된다
맹씨 고택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자형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90.72㎡(27.5평)이다
정면 2칸 중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달았으며 좌우에는 각각 3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맹씨 고택
대청의 정면 창호는 5개의 분합문(들어열개창)과 1개의 외여닫이문으로 모두 정자살로 되어 있다
고택 정면창호의 독특한 형식 · 정자살의 형태 · 두터운 문틀 등에서 오래된 형식임이 잘 나타나 있다
대청과 툇마루는 우물마루 방식을 따랐다
고택의 공포는 대청 가운데 열에 나타나 있는데 익공양식 발생과정 중 초기적 양식으로 보고 있다
기둥은 대청을 중심으로 전면 3개 · 좌우 측면 2개만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
맹씨 고택
초석은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고 자연석 기단을 쌓고 전후 가운데 2칸 기둥 열에는 자연석으로 한 단을 높여 단을 구성하였다
좌우 구들방 전면으로 하인방 아래로 아궁이가 있다
맹씨 고택
뒤편 후원으로 굴뚝을 설치하였다
세덕사(世德祠)
두문동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조선조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맹유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유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閒民)으로서 충절을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사방으로 담장을 둘러 다른 영역과 구분하고 있으며 작은 일각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세덕사(世德祠)
가묘 공간은 고택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세덕사(世德祠) 현판
세덕사(世德祠) 내부
두문동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 조선조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맹씨 고택
내담 안의 본채 공간이다
남문
구괴정으로 가는 문이다
구괴정(九槐亭)
남문을 나오면 오른쪽에 있다
배방읍
태화산 · 망경산 품안에 있다
구괴정으로 가며 봤다
구괴정(九槐亭)
조선 세종 때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 · 권진과 함께 느티나무를 세 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구괴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6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 그루 중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5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좌우측 두 그루의 나무다
구괴정(九槐亭)
이곳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복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을 살폈다
구괴정(九槐亭) 삼상당(三相堂) 현판
삼정승이 국사를 논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구괴정(九槐亭) 현판
정자 내부에 걸려 있다
구괴정(九槐亭) 현판
외담 남문
구괴정에서 돌아오며 봤다
세덕사 · 맹씨 고택 · 문간채
남문을 내려오며 봤다
문간채
밖으로 나오며 봤다
회화나무 보호수
홍예교를 건너면 고불맹사성기념관이다
문화관광해설자의 집
홍예교를 건너며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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