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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고불 맹사성기념관

아산 맹씨행단 맞은편에 위치한 고불맹사성기념관은 고불 맹사성 선생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대기와
전해 내려오는 수 많은 청렴이야기 · 맹씨행단의 역사 등 새로운 역사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고불 맹사성기념관

 

 

문정공 맹사성 영정
정부 표준 영정 제80호 / 2008. 2. 4 · 권오창 作

 

 

고불 맹사성전시관 내부

 

 

고불정신(古佛精神)

 

 

신창맹씨의 유래
우리나라 맹씨의 유래는 맹자 40세손 맹승훈이 당나라 말 공자의 상을 모시고 신라로 이주해 온 것에 기원하여 한국계 시조로 삼고 있다
신창맹씨는 고려 이부전서를 지낸 맹의를 1세조로 하며 조적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신창백에 봉해져 본관을 신창으로 하였다
맹사성은 맹의의 4세손이다

 

 

인물 관계도
맹사성의 부인 최씨의 외조부가 최영 장군이다

 

 

동포 맹희도
순창군사(군수)를 지낸 맹유의 아들이자 맹사성의 아버지로 호는 동포이다
고려 말 한성윤 · 전교부령 · 전교령 · 수문전제학 등을 지내고 우이정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맹유와 함께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맹유가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한주(충남 서천 한산)에 은거하게 되었고 후에 온양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조선이 건국되고 권근이 출사할 것을 간곡히 청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모아 강론했다
1750년 영조가 온양 행차시 묘소에 제를 지내고 충효세업 · 청백가성의 어필사액을 내렸다

 

 

고불 맹사성
권근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젊은 나이에 문과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을 시작으로
대사헌 · 의정부 찬성사 · 삼군도전무 · 예문관대제학 ·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세종 대에는 8년간 재상으로 활동하며 청렴한 관료로 명재상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맹사성 연보
1360년 7월 17일, 개경(현 개성)에서 아버지 맹희도와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
맹사성의 탄생설화
맹희도는 흥양조씨와 혼인을 하자마자 과거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의 부인이 어느 날 커다란 태양을 치마폭에 받는 꿈을 꾸고 시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시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급히 아들 맹희도에게 서찰을 보냈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맹희도가 서찰을 받아보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고향 집을 찾은 맹희도가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는 태평하게 앉아 병이 그동안 다 나았으니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맹희도는 아버지 뜻대로 며칠 집에 머무르는 동안 부인이 맹사성을 잉태하게 되었다

 

 

어린 효자 맹사성 ·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희도부토
맹사성이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물도 마시지 않았고 장례를 마친 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효행이 알려져 1399년 11월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
제학 맹희도는 온양군 사람이다
어버이 섬김에 순종하며 · 뜻을 거스리는 일이 없고 · 추울 때엔 따뜻하게 해 드리고
더울 때엔 시원하게 해 드리며 ·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달고 맛있는 음식을 드렸다
아버님 상사(喪事)에 흙을 져다가 분묘를 이루고
그 아래에 집을 지어 항상 분묘 앞에 엎드려 피눈물로 울기를 삼년을 하니 계절의 떼가 자라나지 아니하였고
흰새가 분묘 곁에 깃드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효도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강헌대왕조(태조)에 정문을 내리셨다

 

 

최영 장군과의 만남
맹사성이 다섯 살 되던 해 동네 아이들과 최영의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
이 때 최영이 낮잠을 자다 검은 용이 배나무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놀라 잠을 깨었는데 마침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려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이에 아이들을 꾸짖자 모두가 도망쳤지만 오직 맹사성만이 나무에서 내려와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예를 갖추고 정중히 사과를 하고는 물러났다
최영은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며, 어린 맹사성이 큰 그릇이 되리라 생각하고는
맹사성의 조부 맹유를 찾아가 자신의 손녀와 인연을 맺을 것을 약속하였다
후에 최영의 손녀와 혼인하여 그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1390년(맹사성 31세) · 1392년(조선 태조 즉위) · 1400년(맹사성 41세)

 

 

학문적 스승, 권근
아버지 맹희도가 1365년(공민왕 14)에 이색이 지공거를 맡아 주관한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이색을 좌주로 하는 문생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이색의 문생이었던 권근과 동문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형제와 같이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맹사성과 그의 동생 맹사겸은 모두 권근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대명 외교사절로 파견되다
조선 건국을 전후하여 요동지역 문제로 명나라와 외교적 갈등이 있었으나 요동문제가 안정되자
현실적인 대명외교가 이루어지면서 하정사 · 동지사 · 설정사 등 사절을 정례적으로 보냈다
태종 7년 세자를 하정사로 하는 사절단의 시종관을 수행하면서
당시 명의 황제 성조가 지은 찬불시에 맹사성이 운하여 시를 지어 올리니 성조가 만족하여 사절 일행에게 선물을 내렸다
세종 7년에는 명 황제 인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로 가는 도중 · 인종이 붕어하자 이를 신속하게 조정에 알려 대처하게 하는 한편
상복을 입고 곡림하며 왕이 보낸 표문과 방물을 인종의 빈소에 올리는 등 외교사절의 임무를 무난하게 수행하였다
이처럼 대명외교에 있어 사절로서의 임무 수행뿐만 아니라 외교문제가 성공적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세종의 대명외교를 충실히 보좌하였다

 

 

목민관 맹사성
1401년에는 공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명환조에는 공주목사로 부임했던 시기의 기록이 있는데 치적이 도내 1위를 차지했다는 내용이다

 

 

예악을 정비하다
맹사성은 다양한 학문에 소질도 있거니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음악 이론의 연구와 악기제작 · 새로운 악보 체계를 만드는 등
세종 대 유교적 예악정치의 기초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악과 향악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여 회례악에서 먼저 아악을 사용한 후 향악을 연주하자는 아악 · 향악 겸용론을 제시하여 이를 제도화시켰다

 

 

조대림 사건
이 사건으로 태종은 맹사성과 박안신을 국문하고 극형을 명하였으나
권근 · 이숙번 · 하륜 · 성석린 등이 극형을 거두어 달라 간청하였고 이에 장 100대와 한주로 유배되었다

 

 

1419년(세종 즉위) · 1420년(맹사성 61세)

 

 

음악 전문가로 평가받다
예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드문 인재이기 때문에 음악에 관련된 직책을 주어 서울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1416년(태종 16) 9월 맹사성을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궤장을 하사받다
나이든 뛰어난 신하의 오래된 덕망은 국가에서도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기는 바이며 임금의 예절로써 공경하는 바이다
나이와 덕이 모두 높으니 예수를 마땅히 더해야 되겠으므로 이에 궤장을 내리어 달존을 나타낸다

 

 

1430년(맹사성 71세)

 

 

편찬가 맹사성
조선왕조실록에는 맹사성과 관련하여 총 989건이 보여지는데 그중 세종 대에 429건으로 가장 많다
이는 세종을 도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음악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수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맹사성은 세종 대의 학술 진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속육전 · 신찬팔도지리지 · 고려사 · 태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8년(맹사성 79세 사망)

 

 

태종실록을 보려했던 세종을 말리다
「태종실록」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선왕 태종에 대한 사관과 평가가 궁금하였다
이에 세종이 맹사성에게 실록을 보여줄 것을 청하자 맹사성은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과 선정만이 실려 있어 다시 고칠 것이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 고칠 것이며
사관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맹사성의 말을 들은 세종은 그럴 것이다 수긍하면서 태종실록을 보지 않았다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내리는 일에 찬성하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 · 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이를 아낀다

 

 

군사 총책임자가 된 문신
맹사성은 판좌군도총제부사로 군사 지휘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삼군도진무에 임명되었다
삼군도진무는 시위와 군기를 담당하는 최고군사령관으로 최초의 문관 출신이 임명되었다
맹사성은 세종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뜻을 적극 지지하여
여진족을 토벌 · 회유 · 귀하시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 영토를 확정하는데 뒷받침하였다

 

 

청포단령
2008년 2월 4일 문화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거쳐 맹사성 표준영정의 관복을 복원한 것으로
왼쪽 단령 트임 사이로 비치는 붉은 첩리와 청색의 답호를 그대로 복원하였다

 

 

맹사성 시호문 · 친필 서간문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대접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하게 절조(節操)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한다

 

 

옥적 / 국가민속문화재 제 225-1호
백옥으로 만든 피리이다
몸통을 대나무 세 마디 형태로 깎아 만들었다
구멍은 7개로 고른 음정을 가지고 있다

 

 

갓끈
남성들이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멋을 낸 장식품이다
연수 117개로 흑옥 · 자수정 · 유리 등을 꿰어 만들었다

 

 

금동연화접시 · 금동연화잔 / 고려시대
금동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모양의 접시와 금동잔이다

 

 

백옥방인 / 조선시대 · 국가민속문화재 제 225-2호
백옥으로 만든 네모난 형태의 도장이다
도장 손잡이는 앉아 있는 당사자(唐獅子)를 인면(印面)은 중앙에 죽관(竹觀)을 두고 양 옆에 만산명월 · 일사화풍을 새겼다

 

 

금동연지동자문경갑 / 고려시대
작은 불경을 넣는 휴대용 경갑으로 뚜껑을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앞 면은 연꽃을 잡고 있는 동자를 · 뒷 면은 학과 연꽃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채석포도문일월연 / 조선시대 · 국가민속문화재 제 225-3호
먹을 가는 면 주위에 단풍나무와 포도덩굴을 올린 자색의 벼루이다
두 마리의 원숭이를 사실적으로 나타낸 작품으로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맹씨세적 / 1940년
대를 잇는 적장자 · 적자 등의 인물과 일어난 일들을 총체적으로 적은 책이다
두문동 유사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정죽절비녀 / 조선시대 · 국가민속문화재 제 225-4호
수정을 대나무 뿌리처럼 다듬어 비녀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말아 끼웠다
우리나라 고대 유물 중 순수한 구리판을 사용한 매우 희귀한 비녀이다

 

 

목칠도형 표주박 / 시대미상 · 국가민속문화재 제 225-5
해당화의 밑둥치로 만든 표주박으로 휴대용 잔이다
해당화의 중심 뿌리 부분과 잔뿌리를 살려 안을 깎아 고슴도치처럼 만들고 안팎을 옻칠하였다

 

 

충효세업 · 청백가성 어필사액 현판 / 조선시대
영조가 온양행궁에 머물 때 내린 글씨를 후손들이 새겨 만든 현판이다
충효를 대대로 힘써 왔으며,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명예라는 뜻이 담겨 있다
1750년(영조 26) 9월 22일 하사 어필이다

 

 

중간신창맹씨세보 / 1762년(영조 38)
신창맹씨 가문의 계보를 대대로 모아 엮은 책이다

 

 

행단고택중수유래 / 1964년
고택 중수 시 발견되었으며 고택의 건립연도와 여러 차례 중수에 관한 내용이 담긴 기록물이다

 

 

문장가 맹사성
최고의 관직에 올랐고 은퇴하고는 자연 속에서의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선택했던 맹사성은
자신의 한가로운 심정과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는 마음을 읊은 「강호사시가」를 지었다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최초의 연시조로 「강호가」라는 일련의 자연애시조의 원류가 되는 작품이다
춘하추동의 네 계절에 따라 한 수씩 읊고 있는데
태평세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묻혀 자연경관을 즐기면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맹사성의 흔적
맹사성의 묘소 · 흑기총 · 온양행궁과 온양온천 · 맹사성의 서울 옛 집터 · 맹씨문중정려의 사진 · 위치 · 자세한 설명 등이 있다

 

 

기록으로 본 맹사성

 

 

공주 관민들에게 칭송받다
문정공 맹사성의 목민 행정은 맑고 정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아전들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관아의 건물을 짓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알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부역 동원과 자재 조달 등에 있어서 민폐가 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선비로써 예를 다하다
창녕 부원군 성석린이 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매양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청렴하게 살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았으며 겨울에는 방 안에 부들자리를 깔고 앉았다
좌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맹씨행단 건축 및 중수과정
맹씨행단(사적 제109호)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을 맹사성이 그의 손녀사위가 되는 인연으로 맹씨 일가가 물려받아 살던 곳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던 곳을 행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와 맹사성이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모아 강론하던 곳으로 맹씨행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맹씨행단 배치현황
맹씨행단의 공간구성은 본채 공간 · 가묘 공간 · 문간채 공간 · 후원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채 공간은 고택과 은행나무, 그 사이의 넓은 마당 공간으로 맹씨행단의 중요한 공간적 의미가 있다
가묘 공간은 고택보다 높은 곳에 사당인 세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세덕사는 사방으로 담장을 둘러 다른 영역과 구분하고 있으며 작은 일각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간채 공간은 솟을대문과 연결된 문간채 · 살림집이 있는 공간이다
맹씨행단은 2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담은 고택을, 외담은 살림채 · 문간채 · 사당을 모두 둘러싸고 있다
내담과 외담 사이에 고택의 후원을 조성하였는데 외담 경계 밖으로 고택 남동쪽 120m 거리에 구괴정이 있다

 

 

행단의 건립 · 조선시대의 맹씨행단 · 근대 이후의 맹씨행단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에 의하면
고택을 지은 시기가 고려 충숙왕 17년(1330) 2월 17일이라 기록하고 있고
고려 말에 최영 장군으로부터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가 기거한 이래 대대로 맹씨 후손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
맹희도가 행단에 기거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건립 이후 행단과 관련된 기록은 1964년 12월 보수 공사 시 발견된 대청 후면의 중도리 묵서명 2점과 맹씨세적 뿐이다
맹씨세적에 의하면 맹사성의 손자 세마공이 이시애의 난을 당하여 순천으로 피란하고 막내아들 호군공에게 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기와가 무너지는 일이 생겨 1482년 손좌 건향(동남간의 서북방향)을 정좌계향(정북쪽에서 동쪽으로 15도 되는 방향)으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42년 이후 서쪽의 기둥을 바꾸는 등 여러 번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
근대기 행단의 중수는 호군공의 13세 지손인 면장 용순이 1929년 9월 9일에 중수를 하였고
국가문화재 지정(1963. 1. 21)된 다음해인 1964년
좌우로 덧달려 있던 부엌과 광채를 원형의 구조물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철거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이후에도 서까래와 기와 · 벽체 · 지붕 등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고택 중수유래
맹씨행단 고택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1964년 12월 보수 공사 당시
대청 종도리 장혀와 배면쪽 중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 2건과 맹씨세적에 나와 있는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 등이 있다

 

 

맹씨세적 중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
이 게시문에는 묵서명에 없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맹씨행단을 지은 시기와 1482년 보수공사의 동기 · 1929년과 1964년 보수공사의 동기에 대한 내용과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에 실시한 보수공사 내용까지 기록하고 있다

 

 

대청 종도리 받침장혀 묵서

 

 

대청 후측 중도리 묵서

 

 

고택의 특징
현재의 고택은 정면 4칸 · 측면 3칸의 工자형으로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정면 2칸 중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달았으며, 좌우에는 각각 3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의 정면 창호는 5개의 분합문(들어열개창)과 1개의 외여닫이문으로 모두 정자살로 되어 있다
고택 정면창호의 독특한 형식 · 정자살의 형태 · 두터운 문틀 등에서 오래된 형식임이 잘 나타나 있다
대청과 툇마루는 우물마루 방식을 따랐다
기둥은 대청을 중심으로 전면 3개 · 좌우 측면 2개만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초석은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고 자연석 기단을 쌓고 전후 가운데 2칸 기둥 열에는 자연석으로 한 단을 높여 단을 구성하였다
좌우 구들방 전면으로 하인방 아래로 아궁이가 있고 뒤편 후원으로 굴뚝을 설치하였다

 

 

공포
고택의 공포는 대청 가운데 열에 나타나 있는데 익공양식 발생과정 중 초기적 양식으로 보고 있다
기둥 상부에 짜여진 보 방향의 부재가 완전하게 주두와 짜이지 않아 보머리와 닿지 않은 점과 창방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첨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창방은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거나 창방 위에 부재를 받치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맹씨행단은 이런 창방의 역할을 첨자가 대신한다
또한 조각적인 측면에서도 첨자에 나타나는 쌍S자 무늬는
무위사 극락전(1476년 이후 건립)이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375년 건립)의 쇠서와 유사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보고 있다

 

 

가구
고택의 가구 구조에서 고려 말 조선 초기 양식의 솟을합장과 대공을 볼 수 있다
고택의 솟을합장은 아주 약하게 안으로 굽어진 형태로 상단은 종도리 좌우에서 대서 종도리의 수평이동을 방지하고 하단은 종보에 지지하고 있다
솟을합장은 봉정사 극락전에서부터 17C까지 사용되며, 주로 주심포계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또 대공은 동자기둥처럼 가늘고 긴 사다리꼴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위에 소로를 얹고 종도리 받침장혀를 받치고 있다
이러한 사다리꼴 형태의 대공은 부석사 무량수전(13C)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은혜사 거조암 · 부석사 조사당(1377년) · 해인사 동 · 서 사간고(1488년) 등과 유사하다

 

 

창이 열려 있는 모습

 

 

창이 닫혀 있는 모습

 

 

고택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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