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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류자신 선생 묘

류자신 선생 묘(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

류자신(柳自新 1541~1612) 선생은 주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지언(止彦) 본관은 문화이다

공조판서 류잠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증호조판서 정승렴의 딸이다

이담의 문인으로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태릉참봉 · 돈령부 직장 · 내자시 주부 등을 거쳐

선조 5년(1572) 호조좌랑에 올랐다가 형조좌랑으로 옮겼으며

선조 8년(1575) 김포현령 · 선조 30년(1597) 한성부 판윤 · 선조 32년(1599)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587년 셋째 딸이 광해군 비가 되었고 1608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영돈령부사에 임명되고 문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왕을 호종하였으며 평양에서 동궁(광해군)을 배종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관직과 봉호가 추탈되었다

 

영모재(永慕齋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

1885년(고종 22)에 건립된 류자신의 재실인 영모재 뒤로 류자신 묘역이 보인다

 

 

 

 

영모재(永慕齋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영모재는 가옥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영모재의 전면은 칸마다 2짝 씩 세살문을 설치하고 양 측면과 후면은 화방벽 위에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1885년(고종 6)에 지었다

 

 

 

 

안채

1869년(고종 6)에 지은 시흥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가옥으로

초석과 목재를 다듬은 수법, 대청마루의 희귀한 8각기둥, 부드러운 추녀 등을 볼 때 서울의 이름난 목수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로 트인 ㅁ자형 가옥이다

 

 

 

 

영모재

왼쪽부터 영모재 · 안채 · 문간채이다

 

 

 

 

류자신 묘역

묘역은 옥녀국부형의 명당으로 정면에 군자봉이 위치하고 있다

묘의 배치는 위로부터 류잠(부친) · 류덕신(돈령부도정 · 둘째 아들) · 류희갱(진사 · 큰 아들) · 류자신 자신의 묘의 순서로 되어있으며

류자신의 묘는부인인 봉원부부인 동래정씨와 합장이다

 

 

 

 

류자신 묘

부인 봉원부부인 동래정씨와 합장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역 내에 배치되어 있는 석물들은 4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의 마멸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훌륭한 문화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류자신 묘

상석 옆 양쪽에 향로석 이외에 또다른 받침돌이 있다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세호도 보인다

 

 

 

 

류잠(부친) · 류덕신(돈령부도정 · 둘째 아들) · 류희갱(진사 · 큰 아들) 묘

류자신 묘 윗쪽이다

 

 

 

 

류희갱(진사 · 큰 아들) 묘

 

 

 

 

류덕신(돈령부도정 · 둘째 아들) · 류희갱(진사 · 큰 아들) 묘

좌우로 있는 쌍 묘는 보았는데 앞뒤 묘는 처음이다

 

 

 

 

류잠(부친) 묘

 

 

 

 

류자신 묘역

옥녀국부형의 명당으로 정면에 군자봉이 위치하고 있다

묘의 배치는 위로부터 류잠(부친) · 류덕신(돈령부도정 · 둘째 아들) · 류희갱(진사 · 큰 아들)

류자신 묘의 순서로 되어있다

*

류잠 묘 뒤에서 봤다

 

 

 

 

류자신 신도비(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
류자신 묘역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현 위치에서 동쪽 약 1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자손의 번영을 위하여 광복 직후에 당시 돈 8만원을 들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귀부는 화강암을 비신과 이수는 한 장의 백대리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총 높이는 약 410cm · 귀부는 길이 273cm · 높이 87cm · 폭 187cm에 이르며 비신은 높이는 273cm · 폭 114cm · 두께 35cm의 규모이다
귀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두꺼운 입술에 송곳니가 드러나 있고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큰 특징이 있다
귀갑을 두른 등 위로는 연화좌대를 마련하여 육중한 비신을 받치고 있으며
이수의 전 · 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의 형태를 생동감 있데 조각해 넣었다
신도비문은 진원부원근 류근이 짓고 병조참의 오정이 썼으며 지중추부사 김상용이 전을 올렸다
오정은 당대의 명필인 죽남 오준의 종제로 특히 해서에 능하였으며
인조 10년 우의정을 역임한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로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건립연대는 1617년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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