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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용동

인천 중구 용동은 전철 동인천 남부역 길 건너 왼쪽으로 인천항이 개항하기 이전에는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 지역이었으며

1903년 제물포지구에 부내면을 신설할 때 용처럼 생긴 용고개 마을이라 하여 용현 또는 용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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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약속이 있어 오전에 약속 장소에서 가까운 용동 「능인사」를 찾았다

 

 

동인천역 5번출구

시점이다

 

 

 

 

SINCE 1972 인현통닭삼계탕

동인천역 5번출구에서 직진하면 오른쪽 첫 번째 골목에 있다

 

 

 

 

노점상

시계밧데리 교환 · 면도기 수리 · 가스 주입 등을 하는 노점상으로 오래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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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역에서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다

 

 

 

 

예전 술집이 많았던 골목이다

 

 

 

 

가천 이길여산부인과 기념관

빈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 1958년 산부인과를 개원하여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자 했던

가천 이길여 회장의 산부인과가 있었던 자리 위에 세운 기념관이다

 

 

 

 

용동큰우물

1883년 인천 개항 무렵 조성된것으로 전해지는 지름 2.15m · 깊이 10m의 우물로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인천시민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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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기와 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용동큰우물 현판은 이 때 인천 출신 당대의 최고 서예가였던 동정 박세림이 썼다

 

 

 

 

우현 고유섭 생가 터 빗돌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한 고유섭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1운동 때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도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있었다

 

 

 

 

동인천길병원

용동큰우물과 가천 이길여산부인과 기념관 방향이다

 

 

 

 

우리은행 건물인 하얀 건물이 보이는데 굴뚝은 무슨 용도였는지 모르겠다

 

 

 

 

24시 미니슈퍼

 

 

 

 

아꼬운 케이크

한국라이스베이킹아카데미 인천지사

아꼬운 케이크는 우리 쌀만 사용하는 쌀베이킹 공방이다

 

 

 

 

초가집칼국수

80년대엔 칼국수거리란 팻말이 들어설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젠 타산 맞추기 힘들어 문 닫은 집이 많다

이 집도 60년 전통의 집이다

 

 

 

 

용동권번(龍洞券番) 각자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용동권번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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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들이 있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가 된 이화자와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 일본인보다도 일본 노래를 잘 불러 일본요정으로 단골 출장을 다닌 이화중선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 ·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한 박미향 등이 있다

 

 

 

 

용동권번(龍洞券番) · 소화6년 수축(昭和六年修築) 각자

일본 유학까지한 인텔리 여배우 복혜숙도 토월회 활동 때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 공연에 나섰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와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서울로 떠나면서 그를 남겨놓으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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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사무소는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하지만 지역문화단체로부터 한소리 듣자 며칠 후 시멘트를 벗겨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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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이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또 1925년 7월 부천군(현 인천 남구)부근 수해를 입자 용동권번에서는 식료품으로 그들을 도왔고

1946년 4월 15일엔 인천권번 대표 김본건이 광복 후 중국에서 귀환한 전재민 동포들이 있는 수용소를 방문해

기생들이 모은 구호금 1만 원을 전달했고 동명학원에도 1만 원을 기부했다

이밖에 영화보통학교 운동장 확장 비용도 마련하는 등 사회 참여도가 높았다

 

 

 

 

신신예식장 터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신신예식장이 자리했던 삼성요양병원 부근에 용동권번이 있었다고 한다

 

 

 

 

능인사

능인사의 역사는 곧 개항으로 시작된 인천 근대 불교의 역사다

1883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을 시작으로 외세 각 열강들이 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은 세계 각국과 교통하는 조선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옛 지명인 제물포 · 배다리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인천 연안부두의 명성과 함께 중국 등으로 통하는 항구가 번성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스님들의 해외 방문이나 중국 교류 등을 위해 인천 거점의 사찰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 능인사의 시작이다

*

능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 설악산 신흥사 인천포교원이다

 

 

 

 

능인사 법당 내부

능인사는 앝은 구릉지 맨 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용두산이라 하였다

혹자는 능인사의 지리적 위치를 용의 머리, 그리고 지금의 월미도 위치를 용의 꼬리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사찰 우측 아래에는 용동큰우물이 있다

이는 용동 · 용동큰우물 · 용두산 · 월미도 등의 명칭과 능인사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능인사는 기독교 · 천주교 · 성공회 · 천도교 등 각종 종교 성전과 더불어 항만 근처 지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1884년 능인사의 시작은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고, 강연 등을 통해 주체적인 도심 포교 활동을 실시하였다고 전한다

1917년 제작된 「조선 오만분의 일 지형도」에는 오늘날의 능인사 자리에 사찰을 뜻하는 卍자 표시가 되어있어 개항 이후 지속되어 온 사찰임을 증명한다

 

 

 

 

법당 불상 뒷편

용동절 등으로 불리었던 이 사찰은 1921년 건봉사가 인천에 「능인포교당」을 등록하며 비로서 오늘날의 능인사로 이어진다

포교당은 조선시대의 산사(山寺)를 벗어나 도심에서 대중과 직접 마주하는 사찰로 도심 포교의 의지를 보여주는 근대불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전국 30본산 중 하나인 건봉사 역시 도심포교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행하였는데

능인포교당은 1913년 평양 · 1915년 간성에 이어 건봉사에서 3번째로 세운 포교당이며 또한 인천에 최초로 세워진 불교 포교당이기도 하다

 

 

 

 

능인교당 신중탱화 / 인천 유형문화재 61호

신중도는 불보살을 호법하는 여러 신중들을 그려 넣은 불화이다

이 불화는 가운데 위태천을 중심으로 양 옆에 범천 · 제석천이 합장하고 있다

이는 19세기부터 이어진 신중도의 도상 중 하나이다

화면 하단 가운데 불화 내력을 기록한 화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정 11년(1922) 음력 9월 30일 조성하여 인천 능인교당에 봉안하였다고 적혀있다

불화를 조성한 금어는 김보응 · 출초는 김일섭 스님이라고 쓰여있다. 이는 20세기의 유명한 금어 보응문성 스님 · 금용일섭 스님을 뜻한다

두 스님은 금오당 약효의 뒤를 이어 20세기 마곡사 화파의 화맥을 계승한 당대 최고의 화승들로 이 불화는 두 화사가 동시에 참여하여 의미가 깊다

후일담으로 일섭 스님께서는 보응문성 스님과 만난 첫해 조성한 불화로 의미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칠성탱화 · 산신탱 · 신중탱을 같이 조성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문성 스님과 일섭 스님이 협업한 최초의 불화로 근대 불교미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불화이다

 

 

 

능인교당 현왕탱화 / 인천문화재 자료 제24호

현왕은 지옥의 10대왕 중 염라대왕을 뜻하며 한국에서는 19세기부터 염라대왕의 심판 장면만을 묘사한 현왕도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불화는 가운데의 현왕을 중심으로 좌우의 앞쪽에서 서류를 들고있는 판관들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간략화 현상은 20세기 불화의 특징 중 하나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화면 하단 화기에는 세존응화 2959년이라 하여 북방불기를 사용하였다

용리 능인교당 현왕탱을 1932년 2월 5일 봉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금어는 석성화경스님으로 적혀있다

석성화경 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나

보응문성 스님과 일섭 스님 · 석성화경 스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문성 스님의 화맥을 이은 화승임을 알 수 있다

능인교당 신중탱화 조성 10년 후에 조성한 그림으로 보응문성 스님으로 대표되는 마곡사 화맥이 능인교당 불사에 적극 참여한 것을 증명해 준다

 

 

 

 

예전 개항기 인천우체사 터

현재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에는 개항기 때 인천우체사가 있었다

우체사가 이전한 후에는 김휘관 양조장이 소성소주를 생산했었고

그후 1958년 중구 중앙동 58은행 자리에 있던 조흥은행 인천지점이 이 터로 이전해 건물을 새로 짓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이 합병되고 상권이 침체되자 건물은 헐리고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학다방 · 서울양복점 

번성했던 시절 경동거리에는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했었고, 학다방은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방 중 하나다

 

 

 

 

동서대약국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 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십여 개의 개인 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 강화 ·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로 사가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약국이 동서대약국이다

 

 

 

 

인천기독병원

1923년, 1년간 인천에 주재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이 개설한 70여 평 부지에 일반진료소가 생겨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 · 1931년에는 인천부인병원이 개원했다

일제는 1940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여선교사들이 내한하면서 재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전쟁 후 정문에는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라는 간판도 함께 걸렸었다

 

 

 

 

싸리재(丑峴)

이곳 사거리가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옛날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1913년 · 1917년 두 차례 언덕을 깎은 싸리재다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독일보청기)

1898년 1월 28일 인천~한성간 최초로 전화선을 가설하여 1900년 경인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또 1902년 3월 30일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 1일에는 인천~한성간 자석식 전화 12회선을 설치해 교환 업무를 개시했다

 

 

 

 

인천흥업주식회사

길병원과 칼국수거리 갈림길 삼거리에서 봤다

 

 

 

 

인천흥업주식회사

건축 연도가 1910년대라는 설과 건축양식이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 인천미두취인소 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1930년이라는 설이 있다

인천흥업은 일종의 대부업체였다

 

 

 

 

가천길대학 부속 동인천길병원

1958년 5월 이길여박사는 친구와 함께 「이길여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병원은 적산가옥 2층 10평 남짓한 목조 건물이었다

 

 

 

 

교동쌀상회

 

 

 

 

별빛교회

 

 

 

 

세칭 「깡시장」 뒷편 주차장

깡시장은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송림동 · 숭의동 · 용현동 등지의 과수원에서 수확한 과일을 팔았던 곳이다

특히 여름에 서울 오류동에서 달기로 소문난 오릿골 참외나 청참외를 팠았다

이로 인해 이 시장을 참외전거리라 불렀다

지난 1982년 동인천과 숭의동간 2km 가량의 도로 확장과 1998년 인천시가 주차장 마련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다수의 상인들은 송림동 동부시장과 숭의 철교 인근 청과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인천에서 배다리로 가는 길이다

 

 

 

 

(사)글로벌 희망나눔 인천본부

 

 

 

 

화순상회

오래된 건물에 세 자리 전화번호가 시멘트로 성형되어 있다

무슨 건물일까?

 

 

 

 

화순상회(和順商會) 전화(電話) 667번

전화 국번도 없이 3자리 전화번호다

 

 

 

 

인현동 기찻길 옆 쪽방촌 골목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140여 개의 집들이 철로를 따라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근처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낮인데도 앞을 막은 건물과 방음벽으로 인해 골목은 어둡다

 

 

 

 

동인천역 개발로 넓어진 골목

그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일명 「똥골」이라 불린 사창가가 나온다

7, 80년대에는 낮이고 밤이고 역 광장에 포주들이 나와 있었다

 

 

 

 

이 사창가는 그 옛날 용동 기생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흘러 들어오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집창촌이라 하기에는 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홍등을 밝히는 집이 남아있다

 

 

 

 

동인천역으로 가는 좁은 길에 강냉이 · 뻥튀기 · 사탕 등 추억의 과자를 파는 가게가 있다

 

 

 

 

동인천역 1번출구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 · 다시 1955년 동인천역으로 개명했고 1957년에 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19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인천백화점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이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지금은 새로 리모델링 중이다

 

 

 

 

송현동 수도국산 아파트단지

마침점인 동인천역에서 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1km, 소요시간 1시간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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