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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오산 독산성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사적 제140호)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 · 수원 ·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 용진 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과 함께 4일 만에 고쳐 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16년(1792)에는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체제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 안에는 보적사가 있다

내부 시설물로는 성문 5개 · 치(雉) 8개 · 우물 1개 ·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사적 제140호) 안내판

삼남길 스탬프 인증대가 옆에 있다

 

 

 

 

동문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다.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보적사(寶積寺) 3층석탑

독산성 동문 안에 있는 사찰로 지어진 때를 알 수 있는 옛 문헌이나 유물은 없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 3동이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에 따르면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었으며, 1987년에 고쳐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는 석가여래 · 약사여래 ·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비꾸었다

*

보적사라는 이름에는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삶이 어려운 노부부가 쌀이 2되밖에 남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차하게 사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을 먹고 공양한 후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보적사 요사채 주련

 母年一百歲(모년일백세) 어머니 나이 백세라도

常憂八十兒(상우팔십아) 팔십되는 아들 항상 걱정하시네

欲知恩愛斷(욕지은애단) 그 은혜와 사랑 끝날 때를 알고 싶은가

命盡始分離(명진시분리)목숨이 다해야 비로서 끝난다네

 

 

 

 

세마대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먼저 세마대로 올라 이동식을 한 후 독산성을 한 바퀴 돈 후 삼남길을 걷기로 했다

 

 

 

 

보적사

갈림길에서 돌아 봤다

 

 

 

 

세마대(洗馬坮)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로 일제강점기와 6 · 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민관으로 구성된 '세마대중건위원회'에 의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현판이, 남쪽에는 세마대(洗馬坮)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이 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는 샘이 적어 오래 지키기에 어려웠다. 적이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흩날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마대(洗馬坮)

아래는 예전 안내판의 글이다

선조 25년(1592) 12월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이 근왕병 2만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가토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벌거숭이 산에 물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자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려고 백마를 산위로 끌고 가 흰쌀을 말에 끼었으며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 한다

이때 말을 씻었던 높은 대를 세마대라 하며 1957년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로 일제강점기와 6 · 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민관으로 구성된 '세마대 중건위원회'에 의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규모를 복원되었다

 

 

 

 

세마대 건립 중 모습 / 1956년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세마대 / 1977년

 

 

 

 

세마대(洗馬坮) 현판

李大統領閣下 揮毫 (이대통령 각하 휘호)라 써있다

 

 

 

 

세마대 중건기

 

 

 

 

세마대 중건 경위서

 

 

 

 

동탄

66층 메타폴리스아파트 건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남문

멀리 두 개의 치(雉)가 보인다

 

 

 

 

남문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이었으며 남문은 영조 · 정조 · 순조 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문확석이 하나만 보인다)

*

삼남길은 이 문을 나가 왼쪽 길로 따라가야 하지만 성을 한 바퀴 돌고 가기로 했다

 

 

 

 

석산

e편한세상오산세교아파트가 보인다

 

 

 

 

삼남길 이야기 / 정조의 효심이 담긴 독산성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가 찾은 독산성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의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독산성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

 

 

 

 

남문 밖에서 바라본 성곽으로 두 개의 치(雉)가 보인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복원 ·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 중이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유적 안내판

 

 

 

 

발견 : 2013. 11. 21

추정 : 추춧돌 또는 석등 초석

제작연대 : 고려시대로 추정

*

화성 용주사 오층석탑 뒷편에 비슷한 형태의 돌이 있다

 

 

 

 

첫 번째 치(雉)에서 돌아다 본 남문 방향이다

 

 

 

 

두 번째 치(雉)

첫 번째 치에서 봤다

 

 

 

 

암문

서문 방향이다

 

 

 

 

암문

1985년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 개거식 성문을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하였다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에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 개거식 성문을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하였다

 

 

 

 

수로 및 수구

수로 및 수구는 성 안의 물을 빼고 생활 하수를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길이 150cm · 폭 50cm이며

바닥에는 널돌이 깔려 있고 덮개돌은 일부만 남아 있다

수로와 연결된 수구는 높이 52cm · 폭 45cm로 서문과 암문 사이의 성벽에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 14년(1790)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 현릉원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3년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돌탑

치(雉) 안쪽에 있다

 

 

 

 

서문

돌탑과 치가 뒤에 있다

 

 

 

 

북문

성곽 가운데 있다

 

 

 

 

북문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고 사람만 다니던 문이다

1982년 정비하였다

 

 

 

 

랜드마크인 일진전기 타워가 있는 안녕동 방향

독산성은 오산 · 수원 ·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지반 침하로 성곽의 치가 내려앉았다

출입금지다

 

 

 

 

보적사까지 독산성을 한 바퀴 돈 후 다시 남문으로 가는 빅터

 

 

 

 

서오산JC 방향

황구지천의 물줄기 보인다

 

 

 

 

독산성 세마대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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