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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

교동나들길 (1)

교동도는 강화군 섬 중에서 강화본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서해와 예성강 · 임진강 · 한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던 곳이다
특히 고려 때는 수도 개경이 가깝고 중국을 오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 역활을 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섬이다
이번에 20km의 교동나들길이 새로 개발되었기에 걸어 보았다

 

 

창후리 해상여객터미널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다

 

 

 

 

창후리 해상여객터미널

 

 

 

 

창후리 선착장

화개 9호를 타고 간다

 

 

 

 

석모도

선착장 왼쪽이다

 

 

 

 

교동연륙교가 건설중이다

선착장 오른쪽이다

 

 

 

 

강화 별립산 · 고려산

갈매기들이 따라오는 배에서 봤다

 

 

 

 

교동면 쌍룡리 장승
교동 월선포 선착장에서 오른쪽 길로 잠시 걸으면 있다
앞에 자전거가 가시는 길로 가야 하는데 강화나들길 지도를 프린트해 사용하다 보니 왼쪽 길로 갔다

 

 

 

 

상룡리 마을회관
강화나들길 지도에는 이곳을 거치게 되어있다

 

 

 

 

암튼 지도따라 읍내리로 걸어가는데 햇빛이 대단하다

 

 

 

 

석모도

상주산이 바다 건너로 보인다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교동지역 목민관인 수군 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39기가 세워져 있다
1991년 관내에 흩어져 있던 비를 교동유림에서 이곳으로 이전 관리하고 있다
향교에서 화개사로 올라가는 삼거리 길목에 있다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조선 영조 17년(1741)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 고구리 생깃골에 있던 것을 남쪽으로 옮겼다

향교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윻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동 · 서무를 두었고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 · 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 · 외삼문이 있다

 

 

 

 

노룡암(老龍巖)
교동현 관아 동헌의 북쪽 층계에 있었던 작은 바위로
숙종 43년(1717년)에 이봉상이 ‘老龍巖(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49년(1773년)에 손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순조 20년(1820년) 통어사 이규서가 ‘虎距巖將軍灑風(호거암장군쇄풍)’이라는 글제를 새겼다
돌 아래쪽이 깨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성전약수(聖殿藥水)
대성전 서쪽에 위치한 약수로 발견된 연대는 모르나

고래(古來)로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약수로 특히 위장병 환자가 복용하면 좋은 물이다

 

 

 

 

개구리참외

관리사무소 옆이다

 

 

 

 

화개사로 오르는 길이다

 

 

 

 

화개사 소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4m · 둘레 1.6m · 나이 200년 · 지정일자 2008. 8. 7 · 관리자 교동면장

 

 

 

 

화개산 들머리

들꽃이 활짝 폈다

 

 

 

 

화개산 봉수대
현재 가로 4.6m · 세로 7.2m · 높이 1.2m의 낮은 석단만 남아있다

 

 

 

 

화개산 정상목
고구저수지가 아래로 보인다

 

 

 

 

개성 송악산
고구저수지 너머로 희미하게 보인다

 

 

 

 

화개산 정상 정자

산불감시초소가 옆에 있다

 

 

 

 

화개산 정상 정자

 

 

 

 

석모도 상주산

 

 

 

 

북벽 망루
정상 밑으로 있다

 

 

 

 

강화 별립산 방향
창후리로 오가는 배가 보인다

 

 

 

 

화개산성

북벽 망루에서 봤다

 

 

 

 

화개산성 위로 걷는다

 

 

 

 

화개산성
조선 명종 때 교동도 화개산에 쌓은 1013m의 내성과 1155m의 외성의 이중구조로 축조된 포곡식산성이다

 

 

 

 

화개산 정상 · 면사무소 방향안내판

 

 

 

 

효자묘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으나 삼국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병환 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청주골에서 살았던 효자 신씨가 아버지의 공양식 제공을 대가로

교동현의 군사로 징발된 부유한 집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모병되어 종사하게 되자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에 노심초사하여 고목근현(현 고읍마을)으로 이사하여 아들과의 약속을 삶의 목표로 삼고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그 약속은 아들이 전투에 살아남아 있다면 산성의 북루에 해가 지기 전 하얀 적삼을 누대에 달아 생존을 아버지께 알리기로 한 것이다
그 시절에는 봉화나 수기신호로 아군이나 내륙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던 때라
어느날 이를 수상히 여긴 수장이 적삼 수기를 못달게 하였으므로 아들이 죽은줄 알고 상심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아들을 취조하던 중 이 사실을 알게된 수장이 그 아버지의 시신을 산성 내에 안장하고 삼년시묘를 허락하여 종사함은 물론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수장과 병졸의 아침묘소 참배를 생활화하여 참배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효의 근본으로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
현재는 관리가 필요한 듯...

 

 

 

 

벤치 쉼터




천화문(天華門)

 

 

 

 

한증막
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둘레 15m · 직경 4.5m · 높이 3m · 면적 3.8평이다
마른 솔가지 등으로 안에 불을 지펴 온도가 높아지게 되면 재를 꺼내고 무성한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낸 후 옆 시냇물로 몸을 식혀 한증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선조들의 병환과 피로를 다스리는 민간요법으로 이용되어 온 시설로써 여럿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규모로 1970년 대까지 사용되었다
현대 찜질방의 근원이며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있는 시설이다

 

 

 

 

연산군 유배지(위리안치)
조선 10대 연산군이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이곳에 유배와서 11월 8일 역질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2달가량 위리안치되었던 곳이다
교동도는 급한 바다 물살이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할 수 있고, 한양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쉽사리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때에는 21대 희종 · 22대 강종 · 30대 충정왕 · 32대 우왕 · 33대 창왕 무려 다섯 명의 왕과
조선 때에는 광해군 · 안평대군 · 영창대군 ·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
철거된 집들인지 암튼 쓰러진 집들 가운데 연산군 유배지였음을 알리는 빗돌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위리안치는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이다

 

 

 

 

고구리 날머리로 가는 길이다

 

 

 

 

화개산
교동 방앗간엔 고추 자루가 수북히 쌓여 있다

 

 

 

 

느티나무

 

 

 

 

고구리교회

 

 

 

 

교회 종탑

 

 

 

 

숙소와 저녁을 위해 교동면사무소쪽으로 가며 봤다

 

 

 

 

교동이발관
숙소를 정하고 식사를 위해 대룡시장을 돌다 만난 1박 2일에 소개되었던 이발관이다
대룡시장은 6 · 25 때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하던 골목인데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무상으로 지원해준 나무와 합판을 사용해 주춧대를 놓고 가게를 지었다고 한다

 

 

 

 

중앙신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로 돌아 온 느낌을 주는 신발가게다

 

 

 

 

교동다방 · 정육점

*

교동파크가 마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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