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정순왕후의 사릉에 이어 정순왕후 유적지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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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定順王后 · 1440~1521)는 조선 6대 단종(1441~1457)의 비(妃)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자 조선 최고의 여인에서 노비로 신분이 강등되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는 그녀가 64년 세월을 홀로 살아간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창신역 4번출구
창신역 엘리베이터 오른쪽 비탈길로 올라야 한다
시점이다
정순왕후 유적지 종합안내판
창신역 4번출구 앞에 있다
정업원 옛터 90m 방향안내판
창신역에서 돌아오르는 비탈길 끝이다
정업원 터 · 청룡사
정업원 터(淨業院址 ·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5호)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에서 물러난 후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년(영조 47)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했다
정업원 터(淨業院址 ·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5호)
단종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업원은 왕실가 출신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곳으로 단종비는 이곳에서 시녀 3명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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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업원구기 비각(淨業院舊基 碑閣)
정면 1칸 · 측면 1칸으로 무익공계 양식으로 팔작지붕이다
정업원구기 비각(淨業院舊基 碑閣)
정조의 친필 편액이 보인다
정업원구기 비각 편액
《전봉후암어천만년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前峯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
「앞 산 뒷 바위 천만 년을 가오리 신묘년(영조 1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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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친필 편액이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 1771년 / 영조47)
정순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나 살았던 정업원 터에 영조가 78세 되던 해에 친필로 세운 비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뒷면
황조정덕16년 신사6월초 4일 후 251년 신묘 9월초 6일입 전후개친서
(皇朝正德十六年 辛巳六月初四日後二百五十一年 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라고 새겨져 있다
삼각산 청룡사(三角山 靑龍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
청룡사(靑龍寺)
옥수동 미타사 · 보문사 탑골승방 · 청량리 청량사 와 함께 서울 4대 비구니 도량 중 제일 오래되었다
조선시대 양반가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면 거처하던 사찰로 고려 말에는 공민왕비 혜비(惠妃)
조선 초에는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머물렀으며 단종비 정순왕후도 이곳에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룡사(靑龍寺) 편액
부산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현대 서예계의 거목이자 예서체의 달인인 오제봉(吳濟峯 · 1908~1991)의 글씨다
청룡사 대웅전(大雄殿)
1036년(정종 2)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하여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1973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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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와 지붕이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심검당(尋劍堂)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왼쪽 대웅전 · 오른쪽 우화루다
심검당(尋劍堂) 편액
우화루(雨花樓)
우화루는 석가모니가 설법을 할 때 꽃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는 뜻이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기 전날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우화루(雨花樓) 편액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글씨다
명부전(冥府殿)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 중 하나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청룡사 진홍 스님
청룡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청룡사에서 나와 왼쪽 언덕에서 왼쪽은 자주동샘 · 오른쪽은 동망봉가는 길이다
숭인교회
서울명신초등학교
자주동샘 25m 방향안내판
삼선현대힐스테이트아파트 101동 앞이다
비우당(庇雨堂)
「겨우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商山)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가 여기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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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창신동 쌍룡2차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시대 실학자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저서 「지봉유설」을 지은 곳으로 알려졌다
비우당(庇雨堂)
조선 초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柳寬 · 이수광의 외5대조)이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띨꼬?"라 농담을 하여 유재상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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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줏빛 풀의 계곡에 있는 샘물」이라는 뜻으로 자주동샘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단종비가 시녀들과 함께 샘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저고리 옷고름 · 댕기 등에 자주색 물감을 들이는 일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단종비를 돕기 위해 여인시장 상인들이 옷감 염색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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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당에 가려진 자주동샘
비우당을 옮겨 지을 때 꼭 이 자리여야 했는지?
자지동천(紫芝洞泉)
지금은 샘물이 말라있지만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샘이다
예전 자주동샘의 빗돌이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지봉선생 비우당(芝峯先生 庇雨堂) 옛 터 빗돌
예전 너럭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예전 원각사
단종의 넋을 천도하는 사찰이었는데 땅이 시유지인 관계로 사찰은 나가고 지금은 도서관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비우당 옆에 있다
청룡사
자주동샘에서 동망봉으로 가다 봤다
창신쌍용아파트 앞 절벽이 보인다
예전 청룡사 노스님이 저 절벽으로 인해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많이 오나 보다 하셨다
동망각(東望閣) · 정자
동망봉 앞에 있다
동망각(東望閣)
성북구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 사이 청량사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부른다
동망봉은 조선시대에 어린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영월로 귀양가 있을 때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청룡사에 기거하면서 매일 산 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평안을 빌었던 곳이다
지금은 보문동 지역 주민들이 매년 가을 길일을 택하여 동망각에서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마을 주민들의 무사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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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보문동6가 209-192호에 목조 건물로 있던 동망각은 보문제3구역주택개발사업으로 철거되고, 2017년 1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배봉산
정자에서 봤다
동망봉(東望峰)
예전 공원으로 꾸미기 전인 20여 년 전 이곳에서 정순왕후의 제를 지내던 분이 있었다
지금은 동네 주민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동망봉(東望峰) 빗돌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가려 전망이 없다
비운의 왕비 · 단종비 정순왕후 그림이야기
그림이야기 첫 번째
남산
동망봉 동쪽은 아파트 때문에 전망이 없지만 다른 쪽은 볼 수 있다
정순왕후 기념공간
지상 1층에는 정순왕후 기념공간 · 주민 커뮤니티 공간 · 다목적 화장실 · 지하 1층에는 공원 관리실 · 다목적실이 만들어진다
예전 공원관리사무소 자리다
동망정(東望亭)
동망봉이라 부르게 된 유래에 따라 정자를 건립하여 동망정이라 하였다
동망정 동남쪽 방향
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동망봉 절벽
조선 영조는 1771년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이곳 바위에 새기게 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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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공사 때 이곳 바위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 집터
철근 시멘트와 축댓돌이 보인다
축대돌탑
노태우정권 때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잠실 · 성남 등지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 때 살던 집들의 축댓돌로 돌탑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돌탑이 여러 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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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이 서린 탑이다
여인시장이 있던 동묘로 가는 길이다
창신동 · 숭인동에 봉제공장이 많다
동묘 풍물시장
동관왕묘(東關王廟 · 보물 제142호)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동묘라고도 한다
삼국지의 등장인물인 관우의 혼을 기리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 건축됐다
본래 서울에는 관왕묘가 동서남북 네 곳에 지어졌는데, 그 중 동쪽 관왕묘가 제일 크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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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는 공사중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전 여인시장 터
여인시장은 동묘 남쪽 싸전골(미전동 · 米廛洞)에 있던 채소시장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궐에서 쫓겨나 정업원에 살적에 이웃 부녀자들이 송씨를 도와주려 했으나
정순왕후 송씨와 가깝게 지내면 조정에서 주목하게 되므로 푸성귀조차 드릴 수가 없자
정순왕후에게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해 부녀자들만 모이는 장이 섰다고 한다
이 시장은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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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관광고등학교 정문 왼쪽 공중전화 박스 옆에 「여인시장 터」라는 빗돌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영도교(永渡橋)
영도교는 단종비 송씨가 단종을 영월로 떠나보낸 이별의 다리다
당시 청계천에 있던 다리 중 가장 동쪽에 있던 다리로 정순왕후로서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배웅한 셈이다
단종과 생이별했을 때 18세였던 그녀는 64년을 홀로 살다 82세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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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가 숨질 때, '백발 노인이 된 나를 당신(단종)이 몰라볼까 걱정이다'라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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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책에 영도교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이별 다리라고 영리교(永離橋)라 불렀는데 청계천 복원공사 후 영도교로 이름하였다
청계천
영도교 위에서 봤다
동대문역
마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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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교가 정순왕후 유적지 걷기 마침점이지만 동묘 풍물시장을 천천히 구경하며 동대문까지 걸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7.6km, 소요시간 4시간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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