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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금곡역~사릉~사릉역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을 가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검색해 보니 금곡역이 제일 가깝다

그래서 시점은 금곡역이고, 같은 길은 피하다 보니 사릉역이 종점이다

 

 

금곡역

시점이다

 

 

 

 

자전거길 육교

금곡역 앞 교차로 사거리 왼쪽에 있다

 

 

 

 

쑥고개

금곡동 · 진건읍 경계다

 

 

 

 

합성(合城)

적성골과 합다리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송능교 앞에 있다

 

 

 

 

광해군묘 안내판

광해군 묘는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인조 19년(1641)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4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아직 비공개 왕릉이다

 

 

 

 

송능2리 유래 빗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송정리의 송(松)자와 성릉리의 능(陵)자를 따서 「송릉」이라 하고 진건면에 편입되었다

성릉(成陵)은 원래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이다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묘가 이곳에 생기자 능이 생긴 마을이라하여 성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송릉(松陵)은 왕릉이나 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많고 능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송능리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능천

송능교 위에서 봤다

 

 

 

 

금곡사

 

 

 

 

사릉 정문

조선왕릉 세계유산 안내석 · 매표소 · 문화관광해설사실이 있다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비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능)과

후릉(정종 · 정인왕후 능)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능침공간으로 가기 전에 먼저 재실로 간다

 

 

 

 

사릉 재실(齋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졔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 등 관리가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 시설로는 제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 행랑채 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조선왕릉 자연생태전시관

조선왕릉은 풍수사상에 따라 자연 산림 공간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왕릉에 있는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화소(火巢)나 해자(垓字)를 두어 산불이 외부에서 왕릉으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는 등 숲을 엄격히 관리해 왔다

이렇듯 조선왕릉은 입지한 자연환경을 600년 동안 잘 보호하고 관리하여 자연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

전시관 앞에 백송이 있다. 백송은 소나무이면서 하얀 껍질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는 푸른빛이었다가 나이가 들면서 차츰 하얗게 된다

중국 북부지방이 고향이며 조선시대 베이징을 다녀오는 외교사절들이 주로 가져다 심었다

자람이 아주 늦고 옮겨심기도 어려운 귀한 나무이다

 

 

 

 

전통수목 양묘장

이곳에 있는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랑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의 그간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

사릉에선 우리 고유의 전통수목 육성을 위한 전통수목 양묘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우량 종자의 묘목을 생산하여 궁 · 능 · 원에 분양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창덕궁 향나무(제194호) · 서울 삼청동의 등나무(제254호)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제59호) · 용문사 은행나무(제30호) 등의 후손들이 자라고 있다

 

 

 

 

이제 제향공간으로 간다

 

 

 

 

제향공간

조선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이 둘러싸고 있는데

사릉의 소나무들은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능침공간

정순왕후는 여랑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단종 2년(1454)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정업원(지금의 청룡사)에서 생활하였다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 뒤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중종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숙종 24년(1698) 정순왕후로 복위될 때,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였다 하여 사릉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 11기가 남아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하였다

해주 정씨 가족묘역 안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시가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복위 되어 능호를 사릉으로 하였다

사릉 앞에 있던 해주 정씨 묘 2기만 옮기고, 다른 묘들은 석물만 땅 속에 묻게 하였으나 왕권이 약해지는 조선 후기 석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건소나무회와 영월단결회 자매결연 기념식수

강원도 영월 장릉 앞에는 사릉에서 가져다 심은 소나무 「정령송(精靈松)」이 있다

이 정령송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하고 슬픈 사연으로 인해 두 영혼을 합치자는 뜻으로 옮겨심은 소나무다

한 때 장릉과 사릉을 한 곳으로 합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었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묘갈 · 정국공신 해평부원군 신도비

정미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외숙모인 정순왕후 송씨의 시양자가 되기를 자처해 그녀를 극진히 모셨다

*

출입통제구역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린학습원 그린농업대학 비

사릉교차로에 있다

 

 

 

 

불암산 · 수락산 뒤로 도봉산이 보인다

사능교차로에서 사능천으로 가는 길에서 봤다

 

 

 

 

진건읍

 

 

 

 

사능천

이곳에서 사능천을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사능천변 길이다

 

 

 

 

사능본동교

 

 

 

 

사능천

천변에 걷기길을 만드는 것 같다

 

 

 

 

두리개(뒤루) 안내판

마을 뒤쪽에 펼쳐진 들판이라는 의미로 옛날에는 뒤루라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두리개라 불리우게 되었다

 

 

 

 

송능교

 

 

 

 

사능천

공사중이다

 

 

 

 

아베나키

아웃도어 매장이다

 

 

 

 

사릉역 주차장

 

 

 

 

남양주 다산길 · 다산길 13코스(사릉길) 시점 안내판

사릉역 앞에 있다

 

 

 

 

사릉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0.2km, 소요시간 5시간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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