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1791)의
송장군 묘비명으로 추측컨데 송 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송장군 묘비명에는 사당을 만든 지 5~6백년이 지나서 대들보가 부러지고 계단이 무너져 있는 것을
1767년 죽산부사 유언지가 옛적과 같이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1933년 8월 25일 동아일보에는 "후대사람들이 송장군의 충열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수 백 마지기의 위토까지 장만하였으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제향날이면 죽산의 군인들이 취타대를 앞세우고 성대히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죽산면에서는 매년 9월 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송문주 장군 안내판
1231년(고종 18) 몽골 장수 살리타가 구주(龜州 · 現 구성(龜城)를 공격할 때 서북면병마사 박서 휘하에서 성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낭장에 특진되었으며, 1236년(고종 23)에는 죽주방호별감이 되었다
이듬해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백성들과 함께 죽주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몽골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몽골군이 포를 쏘아 성문이 부서졌지만 성 안에서도 포를 쏘며 맹렬히 대항하여 물리쳤다
또한 몽골병이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을 했을 때는 성문을 열고 일시에 기습하여 많은 몽골군을 죽였다
결국 몽골군은 성을 함락 시키지 못하고 15일만에 퇴각하였다
그는 몽골군 공격법을 미리 알고 대비를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이 에 봉해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
충의사로 올라가는 들머리에 있다
충의사 신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신도로 본래 일반인들이 통행하는 길은 아니지만 현재 유일한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다
충의사(忠義祠)
송문주 장군 사당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1791)의 송장군 묘비명으로 추측컨데 송 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송문주 장군의 사당으로 원래는 1칸짜리 건물이었으나
1978년 정면 3칸 · 측면 1칸의 현재의 건물로 중수하였고, 구조는 맞배지붕 익공집 형식이다
충의사(忠義祠) 현판
충의사 송문주 장군 영정 / 2012년 채수도 화 · 김정우 서
고려 죽주산성 방호별감 송문주 좌우위장군 영정
몽골군과의 전투 장면 그림
오른쪽 벽면
송문주 장군은 1236년(고종 23)에 죽주방호별감이 되었다
이듬해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백성들과 함께 죽주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몽골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뒷벽 왼쪽
몽골군이 포를 쏘아 성문이 부서졌지만 성 안에서도 포를 쏘며 맹렬히 대항하여 물리쳤다
뒷벽 가운데
몽골병이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을 했을 때는 성문을 열고 일시에 기습하여 많은 몽골군을 죽였다
뒷 벽 오른쪽
몽골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
오른쪽 벽
결국 몽골군은 성을 함락 시키지 못하고 15일만에 퇴각하였다
그는 몽골군 공격법을 미리 알고 대비를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이 에 봉해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충의사
충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