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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불호텔전시관 제2전시실

대불호텔전시관 제2전시실(2층)은 근대 호텔과 신문물로 개항기의 모습

근대 이전의 숙박시설 · 인천에 세워졌던 일본식 여관 · 인천에 세워졌던 서양식 호텔의 서비스

증기기관차와 철길 · 근대 호텔의 모습 · 근대의 커피 이야기 · 개항기 신문물 · 근대문물의 수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근대 호텔과 신문물

제2전시실 입구에서 봤다

 

 

 

 

개항과 대불호텔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 · 여행가 · 선교사 · 상인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진과 기록으로 당시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大佛)호텔은 처음에는 2층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으나

곧이어 3층 서양식 벽돌 건물을 신축하고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어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을 고객으로 맞아 들였다

 

 

 

 

2층 객실

예전 대불호텔 내부 기록이 없어 그 당시 호텔을 참고해 만들었다

 

 

 

 

고대 신라 · 고려 · 조선의 숙박시설

 

 

 

 

고대 신라의 숙박시설

최초의 숙박시설 〈우역(郵驛)〉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역(郵驛)은 신라 소지왕 9년(489) 국가 문서의 송달과 관물의 운송

출장 관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숙박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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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숙박시설 신라관

중국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왕래가 빈번해지자 당나라에는 신라인들이 이주해 살면서

신라방 · 신라원 · 신라소 · 신라관이라는 각종 시설이 생겨났다

이중 신라관은 신라 사신이나 유학생, 그리고 승려 등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여관이었다

 

 

 

 

조선시대 역관들의 숙소(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 맞이)

조선시대의 다양한 숙박시설

외국 사신들의 숙박시설 관(館)과 원(院)

관은 외국 사신과 사절 일행들이 머물던 숙소이자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만든 국영 숙박시설이었다

명나라 사신이 머물던 태평관과 모화관 · 여진 사신이 머물던 북평관 · 일본사신이 머물던 동평관과 왜관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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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여행자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 성격의 숙박시설이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하였고 동대문 밖의 보제원 · 서대문 밖의 홍제원 · 남대문 밖의 이태원 등이 지명으로 남았다

 

 

 

 

상인들의 숙박시설 객주와 여각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 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물건의 보관 · 운송 · 금융업은 물론 숙박업을 겸하던 상업기관으로 객주와 여각이 있었다

객주와 여각은 취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규모의 대소 · 영업장소 · 자본 규모에 따라 구별되었지만 대부분의 업무가 유사하여 보통은 구별없이 통용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에는 개항장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외국 상인들의 거래를 중개하며 독점권을 강화하는 등 대외무역의 담당자가 되었다

1889년에는 인천항 등지에 정부에서 지정한 독점적 객주가 큰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여각이 객주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자본이 필요했다

 

 

 

 

나그네가 쉬어가던 주막

주막은 식당과 주점 그리고 여관의 기능을 겸비하던 숙박시설로 나그네가 잠시 쉬어간다고 하여 봉놋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관용적 성격의 관 · 원이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객주 · 여각과는 달리 가장 대중적인 숙박시설이었다

 

 

 

 

고려 · 조선의 숙박시설

교통통신기관 겸 숙박시설 「역참」과 다양한 숙박시설 관 ·  · 점과 객주

고려시대에는 역참제가 발달하면서 공문서의 전달이나 공물의 수송 등 공무로 오가는 관리들에게 교통 및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고 역마(驛馬)를 두었다

역참제(驛站制)는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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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공무여행자 및 관리들을 위한 관과 원, 일반여행자를 위한 점(주막)이 설치되어 숙식을 제공하였다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객주와 여각이라는 새로운 숙박 형태가 나타났다

 

 

 

 

인천에 세워졌던 일본식 여관

 

 

 

 

아사히야 여관

1905년 현재의 인천 중동우체국 건너편에 위치하였던 3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기와집으로 6 · 25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아사오카여관

본래 일본인이 운영하던 천강루라고 하는 요리집이었으며 1891년 개업하였다고 전해진다

언제부터 여관으로 바뀌었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1920년대 후반에 발행된 지도에는 여관으로 표시되어 있다

4층으로 된 일본식 목조 기와집이다

 

 

 

 

 

스이쯔여관

최초의 민단사무소 후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층 목조건물이었다

대불호텔과는 반대로 고객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하나야여관

대불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일본식 목조 3층 건물이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건물의 면적을 줄여서 탑모양처럼 조성했다

 

 

 

 

 

인천에 세워졌던 일본식 여관의 위치

 

 

 

 

철도의 개통과 숙박업의 변화

호리상회가 호텔업에 착수할 때는 인천항을 통해 드나드는 유럽인들이 매년 증가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개업하자마자 인천의 대표적인 숙박업소로 부상하였다

1888년 총 209명이었던 서양인 입 · 출항자는 1897년에 이르러 637명으로 증가하였다

경인철도 부설 이전에 인천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교통 여건상 대부분 인천에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으며

출항자 역시 미리 인천으로 와서 배편을 기다려야 하였다

 

 

 

 

인천역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인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우각현(쇠뿔고개)에서 기공식을 거행한 후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 33.2km에 달하는 구간이 개통되었고

그 후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1900년 7월 8일 노량진- 경성 간 5.8km 구간이 개통되면서, 인천에서 경성까지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 모갈형 기차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우마차로 12시간 소요되던 경성과 인천의 거리가 1시간 40분 내외로 단축되었다

배에서 내린 여행자들은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경인선 기차에 오르는 승객

이후 경부선 ·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대도시 철도역을 중심으로 호텔업이 발전하였고, 인천의 숙박업은 쇠퇴하게 되었다

 

 

 

 

인천에 세워졌던 서양식 호텔

해리호텔 Harry's hotel

1884년 9월 의료선교사 알렌이 처음 한국 땅에 당도했을 때 당구대 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술회했던 호텔이다

그러나 Harry's hotel은 Horry's hotel의 오기로 벽돌 건물을 신축하기 이전 호리의 집에서 숙박업을 하던 대불호텔의 초기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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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 Daibutsu hotel

다이부츠호텔은 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으로 호텔 주인의 덩치가 큰 불상을 연상시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불호텔은 개항기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망록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이다

서양인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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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호텔 Steward's hotel / 이태호텔 Yee Tai's hotel

대불호텔과 불과 몇 걸음 되지 않는 비스듬한 대각선 자리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던 스튜어드호텔이 있었다

기록에 따라서 이태호텔로 표기되거나 중국식 표현인 이태잔(怡泰棧)으로도 쓰여 있다

개항기 서양인들의 기록에 대불호텔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다

대불호텔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서양식 호텔이며 아래층은 잡화점, 위층은 호텔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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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호텔 Hotel de coree

대불호텔, 스튜어드호텔과 함께 전성기를 누린 서양식 호텔이다

객실 수가 소규모였던 것을 보면 숙박시설에 주력하기 보다는 살롱과 같은 기능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호텔의 위치는 지금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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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호텔 Oriental hotel

인천의 서양식호텔 중 하나로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디 인디펜던트」지에서

이 호텔의 연회장에서 디너파티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호텔이 존속했던 기간은 매우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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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나스호텔 Terminas hotel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발송한 기밀문서를 통해 실체가 확인된 호텔이다

임페리얼호텔의 주인인 물리스(M. Moulis)가 인천에 숙박할 때 항상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호텔의 소유주는 센트럴호텔(Central hotel, 나중에 패리스호텔)의 주인이자 1909년에 손탁호텔을 인수하여 운영했던 보에르(J. Boher)였다

 

 

 

 

서양식 호텔의 서비스

인천의 여관은 화양(和洋 · 일본식과 서양식)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최상등은 대불이라 하며 구미인은 모두 이곳에 숙박하고 독일인의 여관(꼬레호텔)에는 하등객뿐이라고 이른다

숙박료는 서양여관 1일 금 2원 · 일본여관은 1일 금38전이상이다

알프레드 에드워드 조지 카벤디쉬(1859~1943)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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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삐이노 씨는 상하이의 라바곳 양과 로마 가톨릭 성당에서 결혼하였는데

이 달 22일 저녁에 이 행사를 위해 정성껏 메뉴가 마련된 오리엔탈호텔에서 그들의 우인들을 위해 디너파티를 열었다

디 인디펜던트(1898.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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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방 하나를 쓰게 된 언더우드 목사는 의사 소통이 걱정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은 잠시 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영어와 일어 · 조선어가 능숙한 일본인 호텔리어가 직접 편의시설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불호텔은 시설뿐만 아니라 다국어가 가능한 호텔리어들을 양성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큰 호응을 얻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가 되어 입에 맞는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셨다

호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언더우드 회상기

 

 

 

 

축현역

 

 

 

 

축현역

 

 

 

 

인천역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에 의해 건립되었고 초기 운영 역시 히사타로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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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식 호텔 손탁호텔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설계했다고 하는데 러시아풍 2층 양옥에 25개 욕실이 딸린 객실을 갖추고 있었다

2층은 귀빈용 객실로 이용했고, 아래층에는 일반 객실과 주방 · 연회장 · 식당 · 커피숍이 있었다

정동 공사관 거리에 위치한 관계로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이곳 식당에 모여 손탁의 프랑스 요리와 커피를 즐기며 친교를 나누곤 했다

 

 

 

 

호텔 안의 커피숍

1902년 독일인 손탁(1854~1925)이 세운 손탁호텔은 개화기 각국 외교사절들과 대신들, 개화파의 사교장이었는데

오늘날 호텔식 커피숍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한다

그런데 대불호텔에 투숙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서양 음식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 실린 상점의 판매목록 광고를 보면 제물포를 통해서 커피를 비롯한 서양음식이 수입되어 유통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대불호텔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커피가 제공된 호텔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국영호텔 철도호텔

우리나라 국영호텔은 철도호텔에서 시작되었으며 철도를 이용하는 여객의 편의를 위주로 한 호텔이 대도시 역사 부근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철도호텔은 처음에는 관광사업의 필요성보다는 일본과 대륙간의 육교적 조건으로 개설되었다

1912년 7월 부산 철도호텔이 철도국 직영으로 개업을 했으며 같은 해에 신의주 철도호텔이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국영호텔의 첫 출발이다

계속해서 1915년에 금강산에 금강호텔 · 1918년에 내금강에 장안사호텔 · 1925년에는 평양 철도호텔이 신설되었다

 

 

 

 

최초의 민간 호텔, 반도호텔(1957)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호텔로 을지로 1가 현재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반도호텔은 국내 최초의 본격적 상용호텔로 일본인 노구찌에 의해서 1936년 착공, 1937년 4월 27일에 개관하였다

지하 1층 · 지상 8층 건물인 반도호텔은 미국의 스테틀러호텔의 경영방식을 도입했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한 당시 한국 최대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반인들에게 여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 되었고 호텔사업도 일본인들에 의해 독립되었다

 

 

 

 

양탕국을 아시나요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

브라질, 멕시코, 과테말라 등 남미 국가에서는 커피를 수출하고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 러시아 등에서는 수입하고 있다

*

외국 사정에 밝았던 유길준은 그의 저서인「서유견문」(1895)에서 커피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음료인 커피는 가배 · 가배차 · 가비차 · 양탕국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일찍부터 우리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조선호텔 엽서

 

 

 

 

조선호텔(1953)

 

 

 

 

개항기 근대문화

 

 

 

 

왕실과 커피

이곳에 도착하면 차와 커피와 과일이 접대되며 그리고 나서 좀 더 아담한 전용공간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는 왕비마마에게로 인도되었다

애니 엘러스 벙커(1860~1938)

*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요리되었으며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 퀘일 · 야생오리와 꿩고기 · 속을 채워 만든 쇠고기요리

야채 · 크림 · 설탕에 버무린 호두 · 과일 · 적포도주와 커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

이 기록을 통해 당시 궁중에서도 간단한 접대용으로 차와 커피를 제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전해온 먹거리

서양에서는 맥주와 포도주 · 위스키 등 양주와 가배차 또는 양탕국이라고 불린 커피

양과자 · 통조림 · 빵과 버터 ·  · 커다란 품종의 사과 ·  · 복숭아 · 포도 등이 들어왔다

일본에서는 우동과 단무지 · 초밥 · 인공조미료 · 왜간장 · 눈깔사탕 등이 들어왔다

 

 

 

 

월섬회사 회중시계와 광고지(1900) · 안경과 안경집(1905) / 증기선을 타고 온 서양 도깨비

근대문물의 도입은 개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개화란 문명개화를 통해 신문물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특히 물건 그 자체보다 제도나 시설의 변화를 나타내며 이는 시간적인 통제를 동반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이양선 · 황당선 · 괴물 배라고 불린 증기선을 타고 온 서양인들로 인해 많은 신문물이 유입되었다

 

 

 

 

플레이트 필드 카메라(1880) · 인천항에서 찍은 사진(1896)

고종이 먼저 머리를 깎고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 모양(단발)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서양 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고친 한복을 입었다

 

 

 

 

개항기 신문물, 근대 문물의 수용

개항 이후 조선으로 들어온 수많은 외교관 · 여행가 · 선교사 · 장사꾼들과 함께 서양의 근대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통신 · 교통 · 전기 · 의료 등 각 분야에서 근대시설이 갖추어지면서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인천은 개항장이었던 만큼 이러한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도입될 수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복도 끝에 있는 방이다

 

 

 

 

복도 오른쪽 방 규모가 왼쪽에 비하여 협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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