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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불호텔전시관 제1전시실

조선의 개항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영국 · 프랑스 · 미국 · 러시아 등 서구열강은 물론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가며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은

급격한 서양문물의 유입으로부터 자국의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힘과 자본으로 압박하며 개방을 요구했다

강력한 의지로 버티던 조선은 결국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에 의해

1876년 불평등조약이라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부산 · 원산 · 인천(제물포)항을 차례로 개항하게 된다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이 드디어 개항을 하게 되자 외교사절 · 여행가 · 선교사 · 무역업자 등 수많은 외국인들의 방문행렬이 이어진다

특히 인천은 경성 즉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기에 많은 외국인들과 그들이 가지고 오는 신문물의 필수 경유지가 된다

그런데 당시 인천에서 경성까지는 12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온 여행객들은 인천에서 하루를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인천에는 제대로 된 숙박시설이 없었다

낯선 나라 조선에 도착한 외국 여행객들은 열악한 숙박환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당시 인천에서 해운업과 선박운송사업을 하던

일본인 사업가 「호리 리키타로」 부자는 숙박업에 뛰어들어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호텔을 운영했다

1888년 3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을 신축하면서 본격적으로 고객을 맞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호텔로 이름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대불호텔박물관

대불호텔은 인천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호텔이었다

 그 대불호텔이 철거 40년 만에 호텔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그 옆에는 1960~1970년대 인천의 생활사를 알려주는 전시관도 함께 개관했다

 

 

 

 

대불호텔 전시관 안내도

 

 

 

 

대불호텔 1층 전시관

 

 

 

 

옛 대불호텔 유구

1층 전시관 유리판 밑으로 옛 대불호텔의 유구가 보인다

이 유구의 발견이 대불호텔박물관 건립의 계기가 되었다

 

 

 

 

대불호텔의 변천

188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군함 주니아타(USS Juniata)호의 해군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 Woods, 1858~1932)가 남겨놓은 일기장에는

그가 방문했을 당시 막 준공된 대불호텔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2층 목조가옥으로 통상의 일본식여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 해운업자 호시 히사타로는 1887년 이건물을 벽돌조 3층 가옥으로 확장하고,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호텔 영업을 시작하였다

 

 

 

 

중화루(1970년대)

그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의 숙소에서 하루를 머물 필요가 없어지고 

러일전쟁 이후 서구인들의 출입마저 뜸해지면서 대불호텔은 경영난에 빠져 폐업하게 된다

이후 1918년, 뢰(賴)씨 일가를 비롯하여 40여 명의 중국인들이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북경요리 전문점을 창업하였다

중화루는 개점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성장하여, 다시 인천의 대표적 명소가 되었다

 

 

 

 

중화루(1970년대)

1960년대 이후 중화루는 청관거리가 차츰 폐허처럼 변해가는 것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경영난에 빠졌고 결국 1970년대 초에 문을 닫게 되었다

1978년 건물이 철거될 때까지 중화루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내부는 월세집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대불호텔의 기물이나 중화루의 고급 가구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내다버렸다고 한다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 대불호텔의 숙박요금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는 제물포 개항 직후인 1883년에 아들 호리 리키타로와 함께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하여 호리상회를 열고 무역업과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대불호텔 초기 모습

그는 일본거류지 제12호 및 제24호의 부지를 경매로 임대 받은 직후

업무용 건물과 주거용 가옥을 신축하고 서양인을 상대로 숙박업을 시작하였다

 

 

 

 

대불호텔의 숙박요금

대불호텔 개업으로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갖추었지만 객실 수가 11개에 불과했으므로 늘어나는 입 · 출국자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무렵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호텔로는 중국인 이태의 스튜어드호텔(Steward Hotel)이 문을 열었고

1890년경에는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한국호텔(Hotel de Coree)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1890년경 대불호텔의 객실료는 상등실 2원 50전 · 일반실 2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높았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23전이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숙박비가 상당히 비싼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불호텔 기초부 · 건축적 특징

건물은 남북 16.6m · 동서 13.7m의  규모이며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가톨릭 선교(1909)

대불호텔 사진이 있다

 

 

 

 

대불호텔 유리원판

 

 

 

 

대불호텔 1층 전시관 / 대불호텔의 경영난

인천의 대표적인 서양식 호텔로 개항장의 숙박업을 주도하던 대불호텔은 경인철도의 개통으로 결정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초기 인천역의 모습

1899년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이듬해 노선이 경성까지 연결되었고

우마차를 타고 12시간 소요되던 거리가 1시간 40분 내외로 단축되었다

 

 

 

 

인천항과 대불호텔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여행자들은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인천에서 머물며 숙박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서양인들의 왕래가 급격히 감소했던 것도 대불호텔이 경영난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 여행자들이 일본식여관에 비해 비싼 숙박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낯선 서양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불호텔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대불호텔은 결국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대불호텔과 중화루에 대한 기록

인천개항 50년을 기념하여 간행한「인천부사」(1933)에는 대불호텔과 중화루에 대한 비교적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인천부사(1933)

또 한 채의 순 서양식 호텔이 보였지만 이것은 일본인이 경영했다

(주)대불호텔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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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은 현재의 중화루 건물이었고, 명치 22년의 건축이었다

확장된 대불호텔은 건축물을 필요로 하고, 두 채의 구미인 전용여관을 필요로 한 것은 당시 여관 경영이 유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이 본정의 첫 모퉁이가 호리씨 집인데, 그 옆 건물 즉 지금은 중화루로 되어 있는 대불호텔이 우뚝 서 있었고

이는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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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이 영업을 시작해서 반가워한 사람은 여행자뿐은 아니었다

인천에서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었던 인천영사관은 서양인 여행자들의 목적지가 되어 각국 외교관의 숙박 의뢰에 시달렸다

그래서 대불호텔의 개업을 인천영사관 측은 아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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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가 개통되자 교통이 편리해져 여행자들이 인천에서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서구인들도 이제 이 숙소에서 신세를 질 필요가 없어지고, 왕년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문을 닫은 이 호텔은 전세로 넘어갔으나 빌린 사람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대불호텔을 찾은 사람들의 기록과 묘사

당시 대불호텔을 찾은 외국인들의 기록을 통해 호리 히사타로가 1888년 3층 벽돌조 서양식 건물을 신축하기 이전부터

이미 서양인을 상대로 숙박업에 착수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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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5일 도착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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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5일 도착

우리는 소위 고급이라는 라이부츠니 해리스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라이부츠의 침대들은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놓은 것이 고작이었으며

해리스호텔에서는 한쪽 구멍에서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물동이를 달아 매두는 지경이었습니다

(라이부츠는 다이부츠의 오기로 보인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언더우드 회상기

*

대불호텔의 시설들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하게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한국의 다른 객관보다는 훨씬 뛰어났지만, 호텔 지붕은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

숙박하는 손님은 우산이 있으면 그걸 펴서 비를 막았지만 불행히도 없을 경우에는 얼마 못 가서 빗물에 온몸이 흠뻑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플리트 프랑뎅(1852~1926) 한국에서

 

 

 

 

공간지에 기록된 대불호텔

예술 · 건축 종합잡지인 공간지의 1973년 4월호에는 대불호텔이 철거되기 전 모습이 구술 기록과 실내 평면도 · 내부사진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이 대불호텔의 바로 뒤가 해안가가 되어서 남쪽 창으로 내다보면 바로 아래에 바닷물이 찰랑거렸어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해안가에 있는 관광호텔 같았어요"

 

 

 

 

중화루(中華樓) 간판

 

 

 

 

대불호텔

프로젝터 화면이다

이제 2층 제2전시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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