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교역사관
인천에 자리 잡은 화교의 정착사를 패널과 영상
그리고 그들이 실제 사용했던 생활유물을 통해 알아보는 공간이다
화교역사관
한중문화관 별관 2층이다
니하오! 나의 살던 고향은 산동성(90%)
화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으로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이다
화교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되는데 화인(華人)과 화교(華僑) 그리고 화예(華裔)로 나뉜다
화인은 현지의 국적을 취득하여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은 집단을 지칭하고
화교는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집단을 말한다
화예는 자신을 현지교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단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부계 조상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말한다
인천 화교의 발자취
1882년 조선-청 무역협정 체결부터 2012년 짜장면박물관 개관까지 연표로 되어 있다
1882년~1899년 / 화교사회의 형성
1900년~1937년 / 화교사회의 정착과 변경
1940년~1980년 / 화교사회의 시련과 변화
1990년~2005년 / 청관에서 차이나타운으로의 도약
2006년~현재 / 다문화의 상징, '중국인 마을'로 성장
왜 인천으로 모였을까요?
한국 역사에서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는 백제 근초고왕 때(372) 인천의 능허대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그 후 100여 년간 인천 지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인천의 영종도에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을 세워 중국 사신을 접대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덕적도와 옹진반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는 2~3일 정도에 횡단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라는 이점이 있었다
1883년 인천과 상하이의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1달에 한 번 배가 들어오는 상황을 계기로 인천에 중국인들이 내항했다
1년 뒤 선린동 일대의 구릉지대 약 5천 평 규모의 청국 조계가 설정되면서 화교의 이주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출입관리를 위해 청국영사관 등을 위시한 관리들이 인천에 거주하였고 이러한 상황에 인천에 청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인천을 자신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세력권이 되었다
개항 개척기의 상징 싼바다오(三把刀)
싼바다오는 채도(菜刀 식칼) · 전도(剪刀 재단칼) · 체도(剃刀 면도칼)의 세 종류의 칼로서 각각 요리 · 재봉 · 이발기술을 의미한다
노동자로 왔다가 돈을 조금 모은 사람들은 이 업종들에서 좀 더 안정적이고 수입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무역상을 하다가 일본 상인에게 밀려 망한 사람들도 이 업종들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화교의 직업이 크게 무역 및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 · 도시 주변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농민 · '쿨리'라고 불리는 부두 노동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만보산사건(1931) · 중일전쟁(1937) 등으로 화교들의 활동과 입지가 위축되기도 했고
광복 후 1948년 한국정부가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화교들의 사회활동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때문에 대다수 농업에 종사하던 화교들은 손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경쟁력을 갖춘 중화요리 사업에 주력하였는데
1970년대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신흥재벌이나 경제 및 정치계 인사 등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중화요리점이 번성하였다
비단 천 · 재단 가위
개항 개척기의 상징 싼바다오(三把刀) 중 전도(剪刀 재단칼)
청국 조계지의 형성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가장 먼저 일본이 거류지를 조성했고 중국이 그 다음 해인 1884년 4월 조계지를 마련하였다
중국조계는 처음에 선린동 일대 5천여 평에 자리잡은 뒤 3차례 확장해 지금의 차이나타운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조계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위축되어 점차 잡거지가 되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인천부 지나정(支那町)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중국인들과 옛날과 같은 친선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에서 선린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1977년 행정동이 북성동과 합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국 조계지
청국 조계지
공화춘 · 중화루 간판
1920년대에 이르러 인천 화교의 인구는 1,800여 명으로 증가하고 중국 무역액의 8할을 좌우하였다
이는 화교상들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천항을 본거지로 활용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인천의 청요리집이었던 공화춘 · 중화루가 서울 장안까지 회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이곳은 흰 벽과 붉은 기둥이 옹기종기하고 청요리집이 즐비했으며
다양한 계층의 손님이 경인철도를 타고 이곳에 와서 한 잔 마시고 가는 것이 당시 서울 멋쟁이들의 풍류였다
특히 설 명절 때의 청관놀이는 대단했는데, 집집마다 긴 장대에다 폭죽을 수백 개씩 매달아 연쇄 폭발시켜 눈과 귀를 현란케 하고
높은 나무다리를 타고 삼국지나 서유기의 인물탈을 쓴 가장행렬은 인천에서 자란 사람들의 가장 인상적인 추억거리였다고 향토의 원로들은 말하고 있다
중의사로서의 삶
중의사 고시 합격증
요리사로서의 삶
중화루 사용 식기류(1960~70년대)
공화춘 사용 주전자(1960년대) · 장항아리(근대) · 신선로(1960~70년대)
요리용 화로(근대) · 술통(근현대)
화교학교 교사로서의 삶
인천화교 중산중학교사 발령장(1988년)
인천 화교 소학교 졸업장(1973년)
화교들의 생활풍속
결혼증서(1976년)
위패와 위패함(근대)
관우화상 · 제단(근현대)
화교의 전통 놀이문화
전통악기(현대)
홍빠오
붉은 색 봉투에 돈을 넣어 주어 받는 사람을 축복한다
인천화교협회와 화교 단체 교류활동
화교 단체 행사용 리플렛
재운을 기원하는 장식 소품과 족자들
장식 소품(현대)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
1990년대 세계화 추세와 한중수교를 계기로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였다
물론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아 가장 전통이 있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또한 개항장 지역의 역사와 근대문화유적이 재조명되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 했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화교
한국에서 취업 등의 생업을 이어가는 데에 제도적 제약에 부딪힌 화교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생업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1 · 2세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화교 3세대들은 제도적 제약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부모를 보며 성장하였다
이후 더 이상 제도적 불이익에 구속받지 않게 된 이들은 본인의 미래에 대한 선택에 기회가 다양해졌으며
이러한 이유로 화교 3세대들은 중국이나 일본 · 미국 등 해외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한중수교와 새로운 물결
한국 화교들은 많은 부분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한화(韓華)라고 일컬으면서 한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 화교의 지위가 회복되고 토지소유제한 규정이 풀리는 등 각종 규정 및 차별적인 제한들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대기업 사원 · 전문직 · 사업가 · 유학생 등으로 이루어진 신화교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 그 수는 이미 구화교의 5배에 이르렀다
세계화상대회 WCEC
세계화상대회 출범은 화교기업의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원리'와 '문화적 동질성의 결합'이 토대가 되고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계화상대회는 대표적인 화교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성공한 화교계 정치가 · 저명한 학자 등을 초청해 강연 및 연구발표를 하는 독특한 성격의 회의이다
이의 지속적인 개최는 화교기업의 다국적화에 있어서 순수한 경제적 논리보다는
문화적인 공유를 토대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한층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화교네트워크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화교들은 2년에 한 번씩 한 자리에 모인다
많은 화교 네트워크가 있지만 가장 영향력있고 주목받는 화교 네트워크는 바로 세계화상대회이다
한 · 중문화축제
한중문화축제는 한 · 중수교 10주년을 맞아 차이나타운의 활성화, 양국의 우호증진 등을 위해 2002년부터 열렸다
행사기간 동안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문화향기를 느낄 수 있는 전통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된다
한중문화축제는 중국의 3대 명절(춘절 · 노동절 · 국경일) 중 하나인 중국 노동절(4월 30일~5월 2일)에 맞춰 개최되며 양국간 문화협력에 기여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한해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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