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水落山 637m)은 노원구 상계동 · 의정부 장암동 · 남양주시 별내면 경계에 있으며
동쪽 사면의 금류계곡에는 옥류동 · 금류동 · 은선동의 세 폭포가 있어 아름답다
수락산 이름 역시 물이 떨어진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설 · 바위들이 깎아지른 듯하여 수락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
수락산 동서 횡단했다. 지난 해 11월 남북 종주에 이은 횡단이다
수락산 마당바위 입구 버스정류장
전철 당고개역에서 버스로 왔다. 예전 의정부에서 올 때보다 가까워졌다
시점이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오른쪽 들머리로 간다
장작난로가 있는 식당과 술집들이 있다
'방 있습니다'란 안내판을 보니 장작불 때는 산장에서 밤을 보내고 싶다
증시충정이공신도비(贈諡忠定李公神道碑)
이홍술(李弘述 1647~1722)은 조선 후기 왕족 출신 무신 · 정치인으로시호는 충정(忠定) · 자는 사선(士善)이다
1675년(숙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대장 ·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기여했다
목호룡에 의해 경종의 암살 미수범의 한 사람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신도비는 1814년(순조 14)에 세워졌으며, 직사각형 모양의 받침돌에는 복련(覆蓮) 문양을 새겼으며, 비신은 대리석 · 뚜껑돌은 팔작지붕이다
비문은 이의헌이 짓고 · 김조순이 썼으며 · 이당이 새겼다. 현재 묘역은 남아 있지 않다
마당바위
"청학리 마당바위 마을에 있는 바위로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마당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라서 마당바위 또는 한자식 이름인 장암(場巖)이라고 불린다"
*
안내판 내용이다
옥류폭포
예전 20대 초반 4발 아이젠을 처음 사서 신고 일부러 이곳으로 올랐던 기억이 난다
향로봉 마루금
향로봉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리프트다
수락산 숲속음악회
동절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4시다
안에선 음악 소리가 난다. 하산할 때 시간 맞는 산객은 좋겠다
은류폭포가 있는 계곡 옆 계단이다
은류폭포
바위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아래로 빼꼼 보인다
금류폭포로 가는 길이다
폭천정사 터(瀑泉精舍址) · 길가생쉼터
파란 천막집이 「길가생쉼터」인데 예전 동봉 김시습(東峯 金時習)의 폭천정사 터(瀑泉精舍址)다
매월당집(梅月堂集)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방랑하던 김시습이 1471년(37세)부터 1481년(47세)까지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의 간폭정기(看瀑亭己)에 의하면 옥류폭포 옆에 간폭정(看瀑亭)을 지었는데
그 5리 위에 매월당구지(梅月堂舊址)가 있다고 하였다
*
뒤쪽 하얀 얼음이 금류폭포다
금류폭포
폭포 위로 오르는 계단이다
금류동천(金流洞天)」 암각문
폭포 윗쪽에 있는 바위로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는 암각문이 있다
해서체로 새겨진 이 암각문에는 글자의 필획의 힘이 놀랄 만하다
끝부분에 "도광 정유 오월(道光 丁酉五月)"이라 쓰여진 것으로 보아 1873년(헌종 3)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전체 크기는 가로 610cm · 세로 140cm이고 자획의 크기는 가로 130cm · 세로 140cm이다
*
눈에 덮혀 안보인다
내원암(內院庵) 성절 · 승절
1693년 숙종은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에 영조를 얻었고
그 뒤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坡)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올린 뒤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출산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
북한산 목정굴(지금의 금선사)에서 농산 스님의 100일간 관음기도로 태여났다
삼성보전(三聖寶殿)
내원암 요사
삼층석탑인 모양인데 지붕돌과 상륜부만 남았다
수락산장 · 샘터
산장 양 옆으로 지은 가건물이 지저분해 눈에 거슬린다
수락산장
문은 잠겨있고, 양쪽 가게도 손님이 없어서인지 문이 닫혀 있다
마루금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마루금으로 올라 오른쪽에 있는 정상 옆 봉이다
도솔봉
철모바위 · 코끼리바위 뒤로 희미하게 보인다
수락산 정상
수락산(637m) 정상석
정상 오른쪽 봉에서 이동식을 했다
동막봉 · 도정봉 · 608봉
정상에서 봤다
직진 기차바위 · 오른쪽 청학리 · 왼쪽 석림사
동서횡단이라 석림사 방향이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기차바위가 있는 바위봉이다
석림사 · 전망대 방향안내판
안내판을 보니 10m 앞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맞은 편 도봉산 방향은 안보인다
동막봉 · 도정봉
기차바위
기차바위를 로프로 내려오는 사람이 보인다
석림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계곡 길이다
석림사 큰법당
대웅전이 아니고 큰법당 · 주련도 모두 한글로 써있다
석림사의 옛 이름인 석림암은 원래 반남박씨 재궁절이어서 석림사라고 하면 잘 모르고 박씨네 재궁절이라고 해야 통했다고 한다
노강서원 입구
서계 박세당 · 정재 박태보 등의 약력 등이 안내되어 있다
노강서원(鷺江書院)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에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하다 죽음을 당한
정재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 지방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1695년(숙종 21)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하였다
노강서원(鷺江書院)
노량진 노강서원은 6 · 25 전란으로 소실되어
1969년 의정부시 장암동 지금의 위치에 아버지인 서계 박세당 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했던 청절사 옛 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
노강서원(鷺江書院) 현판
1695년 묘우(廟宇)에 사액을 받았고, 1754년(영조 30)에 중건하여 1791년(정조 15) 「노강(鷺江)」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다
반남박씨 대종회 경기북부지회
노강서원 옆에 있다
청풍정(淸風亭)
노강서원 아래에 있던 정자인데, 박세당이 청절사를 지을 때 함께 세워 후학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서계 박세당 고택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 선생이 저술 활동을 하던 건물이다
조선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
오른쪽 윗쪽으로 묘역도 보이는데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서계 박세당 묘역
이곳 주민에게 알아보니 산으로 돌아가면 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근처에 여러 마리 개가 풀려 있어 그냥 돌아왔다
수락산
마침점인 장암역에서 봤다
도봉산
장암역에서 봤다
*
20대의 자신을 만나러 먼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거리 8.7km, 소요시간 4시간 4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