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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시립박물관 역사1실(선사시대~고려시대)

1946년 4월 1일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인천 송학동 1번지(지금 자유공원)에서 문을 열었다

초대 관장으로는 인천 출신 이경성이 부임하였으며 구한말 독일계 무역회사였던 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 건물로 활용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휴관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 함포사격으로 박물관 건물이 소실되어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4월 1일 박물관 개관 7주년을 맞이하여 송학동 11번지 제물포구락부(지금 중구문화원) 건물에서 복관하였다

그후 1989년 12월 20일 옥련동 청량산 기슭에 800여 평 규모의 건물이 완공되어 1990년 5월 4일 이전 개관식을 했다

 

 

인천시립박물관

 

 

 

 

고인돌

남구 학익동 인천구치소(당시 소년형무소) 서쪽 구릉 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주변 문학산에는 8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며 그 중 3기가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었는데 이 고인돌은 그 중 한 기이다

야외전시장에는 일본 하나부사 조난비 · 문인석 · 잠영공양탑 · 삼층석탑 등과 일제시기 부평에 있었던 조병창에서 가져온 중국 철제 범종 3종도 있다

 

 

 

 

인천박물관 초대 관장인 석남 이경성 관장

1층 휴게실 입구에 있다

 

 

 

 

미술을 만나고

그 속에서 살아와 내 인생은 행복했고

미술 속에서 죽어갈 것이므로

더더욱 행복하다

이경성

*

역시 1층 휴게실 앞에 있다

 

 

 

 

1층 역사실 / 선사시대~고려시대 안내도

 

 

 

 

선사시대의 인천

인천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이는 원당동과 불로동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고 문학동과 강화도에서도 뗀석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유적 분포

인천 150여 개의 섬 중 90개의 섬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된다

 

 

 

 

구석기시대 ·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구석기시대

다각면원구(강화군 창후리 출토)는 특별전시에 출품 중이다

 

 

 

 

신석기시대

사선대무늬토기 / 삼목도 출토

 

 

 

 

청동기시대

청동검 / 남구 학익동 출토

 

 

 

 

간돌칼 / 청동기시대 · 남구 수봉산 출토

 

 

 

 

선사시대 전시실

 

 

 

 

인천 고인돌 분포도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에 정치권력과 계급사회의 형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인천에는 강화도 북부와 서구 대곡동을 중심으로 25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

누름단추를 누르면 불이 들어온다

 

 

 

 

송산유적

영종도 남쪽 해안 모래언덕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송산유적 풍경 그림 · 발굴품

빗살무늬토기 · 갈돌 · 흑요석제 석기 · 가락바퀴 · 간돌화살촉

 

 

 

 

흑요석제 석기 · 가락바퀴

흑요석은 영종도에서 산출되는 석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료를 통해 신석기시대 영종도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원당동 유적

서구 원당동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원당동 유적지 풍경 그림 · 발굴품

민무늬토기 · 바퀴날도끼 · 반달돌칼 · 간돌창(청동기시대)

 

 

 

 

바퀴날도끼 · 반달돌칼 · 간돌창(청동기시대)

 

 

 

 

인천 모이도 조개무지

인천은 얕은 바다와 갯벌이 발달하여 풍부한 먹거리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해안가의 낮은 구릉지대와 섬 곳곳에 조개무지가 분포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인천

신석기시대에는 어로 · 사냥 · 채집에 의한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인천은 얕은 바다와 갯벌이 발달하여 당시 중요한 먹거리인 해산물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어 신석기인들의 훌륭한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 시기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사회계층 구조의 발전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문학동유적

문학경기장 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문학동에서 발굴된 청동기 구상유구는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그 사례가 드문 것으로 선사시대 인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대의 인천

인천은 해안을 끼고 한강을 통하여 내륙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해상을 통한 대외 교통로의 창구 역활을 담당하였다

또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삼국의 쟁패에 따라 지배집단의 교체와 함께 지명의 변화도 빈번하였다

백제 통치시기에는 미추홀 · 고구려 때는 매소홀 · 신라 때는 소성현이었다

 

 

 

 

미추홀 인천

미추홀은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비류가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학산 일대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다

서울 강남의 위례성에 자리한 온조 세력과 지역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초기 백제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문학산성 · 계양산성 · 화계산성 모형

바닥에는 한강 · 임진강 · 예성강의 3강이 만나는 지도가 있다

강 3개가 만나는 곳은 인천이 유일하다

 

 

 

 

동양동유적

계양구 동양동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청동기시대의 주구묘(周溝墓) 1기 · 널무덤(土廣墓) 4기가 조사되었다

 

 

 

 

널무덤

이 무덤은 실제 발굴된 형태 그대로 이전 · 복원된 것이라고 안내문에 있다

 

 

 

 

삼국시대의 인천

인천은 온조와 더불어 백제를 건국한 비류의 도읍지인 미추홀로 역사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는 부족하다

 

 

 

 

고려시대의 인천

고려시대 인천은 국제교류의 관문이었다

해상활동에 기반한 고려왕실은 예성강 하구로 통하는 강화 · 교동 · 자연도(영종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기점을 정비하였다

 

 

 

 

칠대어향(七代御鄕) · 인천

고려 공양왕에 이르러 인천은 「칠대어향」이라 하였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왕에 걸쳐서 왕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고향이었던 사실을 높여 부른 것이다

 

 

 

 

칠대어향(七代御鄕) · 인천

순종 · 헌종 · 숙종 · 인종은 인주이씨 왕비에게서 태여났고, 문종 · 순종 · 선종 · 예종 · 인종 다섯 왕은 인주 이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통일신라 말 인천지역의 해상세력으로 세력을 키워온 인주 이씨는 왕실과 중복된 혼인을 맺으면서 고려 전기 최대의 문벌귀족으로 군림하였다

당시 왕자 · 궁주 가운데 인주이씨 가문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인주이씨의 세력이 커져 독자적으로 외교 사무까지 진행시키자 이에 위협을 느낀 왕권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급기야 이자의(李資義 ·  ? ~ 1095년)가 조카 한산후 윤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1126년에는 인종과의 정면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써 인주 이씨는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자연 묘지명

고려 인주 이씨의 대표적 인물인 이자연(1003~1061)의 묘지명이다

 

 

 

 

강도문화 · 창후리고분군

 

 

 

 

강도문화

강화는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몽골 침입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던 고려왕조의 도읍이었다

이 시기 강화는 해안방어선을 구축하여 몽골에 대항하고 삼별초 항쟁이 시작되는 등 대몽항쟁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대장경 경판 / 고려

강도시대는 몽골과 항쟁하던 고난의 시기였지만

수선사 · 선원사와 같은 국가적 사찰을 중심으로 대몽항전의 정신적 산물인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기도 하였다

1234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상정고금예문이 간행되었으며 상감투각 기법을 이용한 청자를 생산하며

당시 동아시아의 도자문화를 꽃피우는 등 강화에 도읍하던 고려의 문화는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창후리고분군

강화 별립산 서쪽인 창후리에서 발굴된 유적으로 고려 중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친 60여 기의 무덤이 발굴조사 되었다

 

 

 

 

경서동 가마터

1965~1966년 인천시립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발굴하여 알려지게 된 조질청자 가마터다

조질청자란 고급 청자에 비해서 태토와 만듦새가 양호하지 않은 청자를 말한다

또 경서동에서 출토된 청자는 유색이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띄고 있어 고 최순우 선생에 의해서 「녹청자」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청자자배기 · 청자소호 · 청자발 · 청자반구병

 

 

 

 

녹청자

인천 서구 경서동에서 만들었던 녹청자의 제작과정이 그려져 있다

1층에서 역사2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다

 

 

 

 

녹청자

만듦새가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녹황색을 띠는 유약은 고르게 녹아내리지 않아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이 특징이다

경서동에서 제작된 녹청자는 고려의 상류민을 위한 청자는 아니였으며

주변의 민가나 작은 사찰에서 음식이나 음료를 담기 위한 식생활 용기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