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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삼릉

서삼릉은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 · 제12대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

제25대 철종과 철인황후 김씨의 예릉 (睿陵) 이 들어서면서 왕실 묘지가 된 곳이다

 주변에는 후궁이나 대군 · 공주등의 묘 49기와 태실 54기가 있다

 

 

서삼릉 관람안내도

효릉 · 수경원 · 태실 · 경혜옹주 묘 · 경선군 묘 · 경완군 묘 · 덕수장씨 묘는

진입로 · 관람공간 · 넓은 지역에 분산 등의 이유로 비공개다

안내도에도 빠져있다

 

 

 

 

희릉(禧陵) 홍살문

1515년 2월에 세자 인종(仁宗)을 낳은 뒤 그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경복궁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신 장경황후 희릉

원래 중종은 둘째 왕비 장경왕후와 서삼릉에 묻혀 있었으나

셋째 왕비 문정황후는 현재의 선릉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은 땅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종 무덤만 옮기게 한다

그 이면에는 중종을 홀로 옮긴 뒤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힐 속셈이었다

하지만, 지대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한강 물이 재실까지 차올라 다시 땅을 북돋아야했는데 그때마다 큰 비용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사정이 이리되는 바람에 문정왕후는 자신의 바람대로 중종 옆에 묻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모두 11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결국은 홀로 외롭게 묻히게 되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이름에 선릉역이 있다

실제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하여 선정릉이지만 선릉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선릉엔 조선 제 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가 묻혀 있고, 정릉엔 11대 중종이 홀로 묻혀있다

 

 

 

 

희릉 비각(禧陵 碑閣)

 

 

 

 

희릉 표석(禧陵 表石) / 비문 앞면

조선국 장경왕후 희릉(朝鮮國 章敬王后 禧陵) / 비문 뒷면 역문

선소의숙장경왕후 윤씨 · 중종대왕 계비 · 홍치 4년(1491) 신해 7월 6일 탄생

정덕원년(1506) 병인에 숙의(淑儀)에 책봉되고, 정묘(150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을해(1537) 3월 2일에 승하하여 윤 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가정 16년(1537) 정유 9월 6일에 숭정 기원 후 126년(1753) 세움. 숭정 기원 후 1년(1628)

 

 

 

 

비각

능의 석물 등이 옆으로 보인다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안이다

 

 

 

 

예릉(睿陵)

莊祖(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그 비인 철인황후 능이다

배위가 참도 옆에 있다

 

 

 

 

수복방 터(守僕房址)

수라방이 없어져 후에 복원하는 조건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였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신계(神階) · 어계(御階)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 · 향교와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이다

 

 

 

 

비각(碑閣)

다른 것보다 더 높게 지어졌다

두 개의 원형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예릉 표석(睿陵 表石) / 비문 앞면

대한 철종장황제 예릉 철인장황후 부좌(大韓 哲宗章皇帝 睿陵 哲人章皇后 祔左) / 비문 뒷면

철종희윤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장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순조 신묘(1831) 6월 17일 탄생 · 기유(1849)6월 8일 덕완군으로 책봉 · 9일 즉위 · 계해(1863) 12월 8일 승하하였다

재위 14년. 수는 33세. 갑자(1864) 4월 7일 고양 희릉 오른쪽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융희 2년(1908) 칠월에 추존하여 황제로 되었다

후명순휘성정원수년경헌장목철인장황후 김씨 · 헌종 정유(1837) 3월 23일 탄생 · 신해(1851)에 왕비로 책봉됨

계해(1863) 태황제가 자리를 물려받자 대비로 추존되었다. 무인(1878) 5월 12일 승하하였다

수는 42세. 이해 9월 18일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장사지냈다

융희 2년(1908) 무신 7월에 장황후로 추존되었다

 

 

 

 

예릉(睿陵)

영조 대에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의 예에 따라 조성된 조선왕릉의 마지막 능으로, 이후에 조성된 고종과 순종의 능은 모두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장명등 등 일부 석물은 땅에 묻혀있던 중종의 옛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예릉(睿陵)

왕릉의 석물 중 문인석 · 무인석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 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예릉 석물

왕릉의 석물 중 문인석 · 무인석 · 석마 등이 있다

 

 

 

 

문인석

 

 

 

 

무인석

 

 

 

 

석마

 

 

 

 

정자각 (丁字閣)

 

 

 

 

수복방 터 (守僕房址)

능을 관리하는 노비들이 지내는 방이다

 

 

 

 

예릉 금천교(睿陵 禁川橋)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활을 하는 다리다

 

 

 

 

예릉 금천교(睿陵 禁川橋)

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 연못 ·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 정자각 ·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라 한다

 

 

 

 

의령원(懿寧園 · 의소세손) / 효창원(孝昌園 · 문효세자) 제각(祭閣)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며

대군 · 공주 등의 무덤은 묘(墓)로 구분하여 불렀다

 

 

 

 

문효세자 신도비(文孝世子 神道碑)

문효세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조성한 후 효창묘(孝昌墓)로 불리다가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높여졌다

194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정조가 직접 글을 지은 신도비다

 

 

 

 

원침(園寢)

앞쪽이 효창원으로 5세에 세상을 뜬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

뒤가 의령원으로 3세에 돌아가신 영조의 세손이며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다

왕릉에는 후궁 · 왕자 · 공주의 무덤를 만들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를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서삼릉 영역에 후궁 · 왕자 · 태실을 모아 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라 한다

*

의소세손 · 문효세자의 무덤으로 봉분(封墳)이라고도 한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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