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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예산 보부상박물관 상설전시실

예산 보부상박물관

내포지역의 지리적 · 문화적 특징, 보부상의 삶과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다

내포 지역은 서해안을 따라 발달한 바닷길을 통해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또한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물길로 포구가 발달하고

대량의 물자 수송이 이루어졌으며 그 주변으로 장시가 발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오일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인 보부상의 삶을 조명하고

유물을 전시 · 수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으로 2020년 7월 개관하였다

예산 · 덕산 · 당진 · 면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보부상 단체인

예덕상무사의  보부상 유품(국가민속문화재 지정)을 관람할 수 있다

 

 

예산 보부상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 / 예산홍보관

내포 이야기 · 보부상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내포 이야기는 내포의 자연지리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역사와 문화적 특징

내포 지역의 독특한 생활민속문활를 살펴볼 수 있다

*

보부상 이야기는 보부상의 기원과 역사

상업의 발달과 지방 장시의 활성화로 전국 물자유통망이 갖춰지면서

조직화되기 시작한 보부상의 활동 · 보부상단 조직의 규율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예도의 고장

예산의 시대별 변화를 보여 준다

 

 

 

 

예산 10경

 

 

 

 

내포 이야기

내포는 택리지에 표현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포의 길을 걷는 보부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내포의 지명 유래

내포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을 뜻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는 충남의 서북부 지역을 특정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내포 지형은 해안선이 매우 불규칙하여서 크고 작은 만과

밀물이 육지에 깊게 올라오는 하구를 형성하고 있다

아를  「안개(안쪽 / 바다와 육지가 닿는 곳)」 라고 하며 내포는 안개의 한자식 표현이다

 

 

 

 

내포(內浦)

어제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땅 내포

그 이야기들은 역사가 되어 내포의 오늘을 만든다

 

 

 

 

역사서에 나타난 내포

어제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땅 내포 이야기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땅 / 내포의 범위와 특성

차령산맥은 충청남도 땅을 가운데로 갈랐고

동남쪽의 광덕산과 서북쪽의 가야산이 그 시작과 끝이 되었다

내포는 이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쪽 해안까지 뻗어 있는 방대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태안 · 서산 · 홍성 · 예산 · 당진과 더불어 보령 · 아산의 일부 지역을  아우른다

이러한 내포는 전체적으로 해발 200m 이내의 저지대가 넓게 분포하며

가야산에서 하천이 갈라져 서해로 흐르면서

편마암 산지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영양염을 바탕으로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했으며

바다를 활용한 어업을 비롯해 포구를 통해 경제 · 문화 등의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다

또한 한양과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한양 사대부들의 경제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내포지역 포구

 

 

 

 

내포 지형변화와 발전

내포지역의 바다는 대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조차가 6~9m에 달하였으므로

조수의 운동에 따라 토사의 자연적인 퇴적이 이루어져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갯벌의 발달

조선시대부터 이러한 내포의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드는 해안 간척도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나아가 내포의 구릉지 개발과 해안 간척을 통해 확보된 농경지는

이 지역에 새로 이주하는 사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

아산만 · 삽교천 · 대호방조제 사진이다

 

 

 

 

포구의 고장, 내포

내포 지역은 복잡한 지질 구조와 오랜 침식으로 인하여 매우 복잡한 지형을 이룬 가운데

서쪽 해안 지역은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으로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을 형성했다

이러한 특성으로 바다가 육지까지 들어오게 되며 자연스럽게 포구가 발달하였다

《택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지에는 내포지방에 있던 포구와 나루가 기록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에도 아산부터 결성까지 내포지역의 포구 44개소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모든 것이 내포로 모이고

내포로부터 흩어지다

 

 

 

 

불교문화의 전래

5세기 말, 중국의 문화가 백제의 수도 공주(이후 부여)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내포를 거쳐야 했다

물론 중국과 백제를 연결한 항로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그리고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등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거대 불상이 백제의 수도인 공주나 부여가 아닌 내포에 분포한다는 점은

당시 내포가 중국 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이자 백제 불교의 발상지요 중심이었음을 말해 준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내포 천주교의 시작

내포는 주민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천주 신앙공동체로 교회가 창설되었다

그 중심 조직은 1785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곤자가 1759~1801)에 의해 조직된 「여사울 신앙공동체」였다

천주교가 이 지역의 문화로 자리잡은 데에는 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 등

초기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고향이 각각 당진 · 청양 등 내포 일대였다는 점에 있다

결국 내포는 전국에서 한양 다음으로 신도가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초기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성교전서 / 조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

1887년 만주 삼양의 문광서원에서 발행했다

 

 

 

 

걸출한 인물의 고향 / 내포의 인물

 

 

 

 

내포의 인물

 

 

 

 

농업

예로부터 내포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최고의 미곡 생산지로 권문세도가는 이곳에 논과 밭을 마련했다

오늘날 삽교천 일대에는 궁(宮)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 데

당시 왕실에서 내포지역에 수많은 궁방전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포지역은 해안과 수량이 풍부한 하천을 통해 서울 등지로 물자를 수송하기 쉬웠다

 

 

 

 

기지시 줄다리기 모형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으로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 마을에서 500여 년 동안 이어져왔다

 

 

 

 

어업 / 풍어제

내포는 바다에 접한 곳이 넓게 분포한 까닭에 일찍부터 바다와 관련된 생업활동이 활발했다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갯벌이 넓게 발달한 까닭에

갯벌을 이용해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인 자염 생산과 가까운 바다에서 행해지는 연안어업과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원양업 모두가 행해졌다

 

 

 

 

보부상 이야기

길 위의 사람 보부상을 만나다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늘어선 길 보부상은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접하고 들여왔던 앞선 사용자이자

누구의 이야기든 귀담아 듣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사람과 지역, 나라를 잇던 소통의 매개체다

 

 

 

 

내포의 문화예술 / 내포의 인물지도

 

 

 

 

보부상의 기원

보부상의 역사는 상고시대까지 올라간다

물론 보부상이라는 정확한 명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와 완문(完文) 등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이전에 부상(負商)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백달원 위패

위패는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는 나무패이다

백달원 위패에는 「두목백토장군달원선생위(頭目白兎將軍達元先生位)」라고 새겨져 있다

백달원은 부상단(負商團)의 우두머리로 행상인의 힘을 모아 조선 건국에 기여하고

그 공으로 부상청(負商廳)의 첫 5도도반수(五道都班首)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현판 / 20세기 후반

예덕상무사의 역대 임원의 신위가 모셔져 있던 곳에 걸었던 나무판이다

 

 

 

 

보부상의 상징

 

 

 

 

보부상 조직의 유래

보부상 중 조직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선을 세운 태조와 관련해서 세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태조가 고려 말 함경도 만호로 있을 때

백달원의 도움을 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각 주군에 임방(任房)을 설치하고

침식 · 질병의 치료, 장례 등을 자유롭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태조가 함경도 행상들을 이용하여 새 왕조를 건설하였기에

8도에 상민 단체를 조직케 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태조가 즉위한 이후 안변에서 석왕사를 증축할 때 백달원이 동지 80명을 인솔하여

쌀과 자재를 운반하고 삼척군에 있는 5백 나한을 옮겨 모신 공로로

지금의 개성군 발가산에 임방을 설치하여 옥도장을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보상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고종 13년(1879) 8월에 발포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에 의해서이다

 

 

 

 

패랭이 / 조선

패랭이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쓰던 모자로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일반적인 패랭이와는 달리 보부상이 쓰던 패랭이는 양 옆에 목화솜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촉작대

끝에 쇠로 만든 촉을 박은 작대기로 물미장으로도 부른다

지게를 받치는 지게 작대기이자 유사시에는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다

 

 

 

 

보상 · 부상을 합친 전국단위 상단 형성

17세기 중엽 이후 상업의 발달과 지방 장시의 활성화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전국 물자 유통망이 갖추어졌다

장시를 떠돌던 행상들도 조직화되어

18세기 중에는 장시에서 거두는 세금이 지방 군현 재정의 한 축을 이루었고

19세기 후반 자체 조직과 운영체계를 갖추면서 전국 단위의 보부상단을 형성하였다

이후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행상업을 관장하고 상품 유통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로 인해 보부상의 지역 조직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관할 기구의 변천과 주요 연표

1866년 병인양요 발발 · 부상들이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에 참여

1883년 3월 전국의 보상과 부상을 삼군부에 통합

1883년 7월 관제 개편으로 삼군부가 해체되자 보부상을 통리아문으로 귀속

1883년 8월 해상공국 설립

1885년 8월 해상공국을 내무부에 속하게 하고 상리국으로 개칭

1894년 7월 상리국을 농상아문 상공국으로 잠시 귀속

1895년 3월 상리국과 산하각 임방을 모두 해체

1897년 3월 경도청 출신 보상들이 상무회의를 조직

1899년 5월 「상무사장정」 공포 이후 6월 상무사 설립

1904년 상무사 해체

 

 

 

 

대한제국 상업징표 / 1899년

상무사에 소속된 상업인임을 증명하는 신표(信標)

허가번호 · 주소 · 임원명단 · 발행가격(엽전 1냥) 등의 내용을 기록

 

 

 

 

보부상 신표

보부상들이 가지고 다니던 신분증

팔각형태 중앙에 상(商)자 · 테두리 안쪽에 사괘(四掛)와

황실보호(皇室保護)를 새겼다

 

 

 

 

보부상의 독특한 상업유통문화 / 팔도의 오일장을 무대로 성장

향시는 교역의 장소로 주변의 농민 · 수공업자 · 상인들이

일정한 날짜 및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는 곳이었다

상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5일마다 소규모 장시가 열리는 정도였는데

가까운 마을이 연결되어 시장을 열다 보니 커다란 지역 시장권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15세기 말 남부지방에서 먼저 향시가 개설되었고

순조 때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한편 향시가 발달하며 각 지역의 상업 중심지에서 물품을 구입해

「전국 어디에서나」 장시가 열리는 고을을 찾아 이동하면서 상업활동을 벌인 보부상이 나타났다

이들에 의해 고립되었던 농촌의 장시는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되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 상인들과 유통환경

 

 

 

 

길 위의 삶, 보부상

「1리(厘)를 보고 5리(里)를 뛴다」는 말이 있다

보부상의 상행위는 신선한 물건을 확보하고

빠른 시간 내에 공급하는 경쟁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잣거리와 길을 오가던 보부상에게 장터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인 것이다

이러한 장터는 교통과 수송수단 · 유통경제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는 보부상들에게 장터는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던 생활 터전이며

다양한 지역문화를 접했던 소통의 공간이었다

 

 

 

 

조선팔도 지도 / 조선

조선시대 제작된 채색필사본 조선팔도 지도이다

함경도 · 평안도 등 북쪽 지역이 상대적으로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으며

도별로 다른 색깔을 사용하고, 각기 다른 도형을 사용해 군현명을 구분하였다

지도 우측에 각 도의 목(牧) · 군(郡) · 현(縣) · 역(驛)의 숫자를 기록해 놓았다

 

 

 

 

보부상 영수증 / 조선 · 휴대용 벼루함 / 조선 · 담뱃대 / 조선

 

 

 

 

산가지를 이용한 계산법

 

 

 

 

산가지 / 조선 · 필낭 / 조선

 

 

 

 

장돌림 상인 보부상 / 거상 김만덕

누구도 꿈꿀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한 조선 최초 여성 CEO

 

 

 

 

보부상들의 주 활동무대가 된 장터

다양한 물건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는 보부상들의 주 활동무대였다

그곳에는 주막 · 객주 · 장옥 · 포목점 · 푸줏간 등이 있어 다양한 물물이 교환되었고

물건의 도량형을 잴 수 있는 도구들을 볼 수 있다

 

 

 

 

여가와 오락이 있는 장터

인형극을 볼 수 있다

 

 

 

 

장돌뱅이의 조직과 정신

 

 

 

 

보부상

단결력이 강하고 나라에 많은 봉사를 했기 때문에 4계명을 중하게 여긴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관가에 고발하기 전에

보부상에서 자체적으로 장문형의 자치율법으로 다스린다

 

 

 

 

장돌뱅이 돈이 왜 구린지 알아?

보부상이었던 고(故) 유진룡 님의 구술을 적엇다

*

객주 / 김주영

보부상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자력갱생의 강력한 조직

 

 

 

 

예덕상무사 봉산면 사동본소 역원방명록 · 임원록 · 에덕면상무사 임원방명록

 

 

 

 

선생안(先生案) / 조선

본문은 절목(節目) · 선생안(先生案) ·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안 명단에는 접장 · 본방공원 · 별공원 ·반수(班首)라는 직책이 부여되어 있다

선생안에 기재된 인원은 40명 · 좌목에 기재된 인원은 90여 명에 달한다

 

 

 

 

에덕면당사읍임소소임안 / 1883년

예산 · 덕산 ·면천 · 당진 등 네 읍 임방이 함께 만든 내용을 수록하였다

그 중 벌목(罰目)에는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은 자 볼기 50대」

「선생에게 무례한 자 볼기 50대」 등

조직 내에서 지켜야 할 규율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예산임방절목

예산 절방에서 자체 기강 확립을 위해 만든 절목으로 한성부에 올려 완문을 받은 것임을 밝혔다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은 자 볼기 50대」 등 14개 조의 벌목과 「신구접장교체규식

초상 때를 대비한 초상 때를 대비한 「초상시부의전마련기」와 「비방청부전기」 등이 있다

 

 

 

 

보부상의 조직과 공문제

공사가 끝나면 집사장이 공문제를 지고 행렬의 선두에 선다

청금록을 비롯한 선생안 완문 절목 등 보부상단의 공문과 인장은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사가 올려진다

이후 도회청에 당도한 공문궤는 똑같은 절차를 밟아서 시재접장에게 인도된다

공문제사가 전부 끝나면 신구 임원간의 사무인계가 이루어지고

공문인장 기물 등 구 임원이 보관했던 것을 신 임원이 보관하게 된다

인계인수가 끝나면 이틀간에 걸친 공식행사인 총회는 막을 내리게 된다

 

 

 

 

보부상 정신 · 규율 · 약속 · 4가지 약속

매년 보부상에게는 채장이 발급되었다

이는 보부상들이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신분증으로

보부상들은 언제 어디를 가든지 이를 지녔다

이러한 채장 앞면에는 소속 임방 · 주소 · 성명 · 출생일이 기록되고

뒷면에는 보부상의 사계명이 적혀 있다

*

사계명은

물망언(勿妄言) · 물패행(勿悖行) · 물음란(勿淫亂) · 물도적(勿盜賊)이다

 

 

 

 

보부상 전통문화 계승

 

 

 

 

내포지역 3개 상무사 권역 고지도

내포의 북쪽은 예덕상무사 · 중간은 원홍주등육군상무사 · 남쪽은 저산팔읍상무사가 분할하는 형태이다

예덕상무사는 예산 · 덕산 · 면천 · 당진을 담당했으며

원흥주등육군상무사는 홍주 · 오천 · 결성 · 보령 · 청양 · 대흥(현 예산군 대흥면)

저산팔읍상무사는 한산 · 서천 · 비인 · 남포 · 임천 · 부여 · 홍산 · 정산을 담당하였다

 

 



세상의 눈에 비친 보부상

보부상 관련 문서인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와 「완문(完文)」에는

보부상의 역사와 활동 등을 기록하고 있다

보부상들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난이 평정된 후에 공을 인정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내포 보부상의 꿈 그리고 길

내포 보부상들은 오늘도 걷는다

지도 위에 새로운 길을 내며 어제와 내일의 만남을 위한 오늘을 걷는다

걷고 또 걷고 지구 세 바퀴쯤 더 걷다보면

드디어 쌂의 끝자락에서 뒤돌아 보게 된다

이제껏 걸었던 길 위의 선명한 발자국을 앞으로 걸어나갈 내일의 첫 발걸음을

 

 

 

 

길 위의 삶 보부상

 

 

 

 

보부상

 

 

 

 

보부상

 

 

 

 

보부상

 

 

 

 

보부상

 

 

 

 

보부상

 

 

 

 

보부상

 

 

 

 

장돌뱅이 노래

​짚신에 감발치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이 고래고래 지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쳐가며 돌도부장사하고 해질 무렵

손 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 다음 날 저 장에서 다시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