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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월미문화관

월미문화관은 전통생활문화전시관 · 궁중문화전시관 · 기획전시실을 운영하여

국내외 관광객에게 다양한 한국문화의 체험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조성하였다

월미공원 입구 왼쪽 언덕에 있다

*

기획전시실 《월미공원 조성》이다

 

 

월미문화관

 

 

 

 

 

인천의 역사

인천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이는 원당동 · 불로동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고

문학동과 강화도에서 뗀석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신석기시대에 인천은 천혜의 식량자원인 바다와 갯벌을 배경으로 인간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그 결과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보고를 이루었다*월미문화관 입구에 있다

 

 

 

 

인천의 역사 / 인천의 이름

미추홀(백제) · 매소홀(고구려) · 소성현(통일신라 경덕왕) · 경원군(고려 숙종) · 인주(고려 인종)

경원군(고려 공양왕) · 인주(조선 태조) · 인천(조선 태종 13년 1413)

*

1392년(태조 1) 경원부가 인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인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460년(세조 6)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현왕후 외향(外鄕)이라 해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김포굴포지가 남아 있는데 김포굴포는 인천 쪽의 서해와 김포 쪽의 한강을 연결하려던 운하계획이다

고려시대 이후 조운하는 데에서 중도에 강화 손돌목과 같은 험로가 가로놓여 있어

안전한 운송이 어려웠는데 이 험로를 회피할 방도로 강구된 운하계획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계획되다가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 착수되어 양편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시켜

40리에 달하는 운하를 팠으나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원통현을 뚫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기획전시실 월미공원 조성》

 

 

 

 

월미도

군사요충지에서 시민의 품으로

 

 

 

 

월미도 지명의 유래

월미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에 처음 나왔다

어을미도(魚乙未島) · 어을미도(於乙未島) · 어미도(魚味島) · 제물도(濟物島) · 돌도(突島)

월성(月星) · 돌미도(突尾島) 등으로도 불렸다

흔히 달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도(月尾島)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

 

 

 

 

바닷길의 관문 월미도 월미행궁이 지어지다

병자호란 때 미처 강화도로 피난할 틈도 없이 몽골 기마병이 길목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겪은 조정은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을 개척했다

서울 - 영등포 - 인천도호부 - 월미도 - 영종도 - 강화도의 경로였다

 

 

 

 

수난의 시대

1866년 프랑스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에 군함을 파견했다

조선 공략에 나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들은 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제물포를 강제로 개항시켰다

이후 월미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후 서양 세력들은 조선지도를 제작할 때 월미도라는 지명 대신 로즈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때문에 월미도가 한때 장미섬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조선 제일의 유원지 월미도

일본의 조선통치가 본격화되던 1918년 무렵 인천부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고

월미산 중턱에 회주 도로를 뚫어 공원을 조성, 월미산 곳곳에 벚나무와 아까시나무 등을 심고 가꾸었다

또한 북성지구에서 월미도 사이에 길이 1km인 왕복 2차선 제방둑길을 축조해 육지와 연결하였다

1920년대에는 월미도 북쪽 해안에 해수욕장도 개장했으며 관광지 개발이 본격화 돼 월미도 조탕과 풀장이 들어섰다

이후 월미도는 조선 최고의 첨단 위락관광지로 이름이 높았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1945년 8 · 15해방 직후 월미도는 군사지대로 징발돼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군사작전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의 첫 목표지점으로 월미도가 선택돼 집중포화를 맞음으로써

월미도는 가장 큰 상처를 겪은 섬이 되었다

전쟁 이후 월미도 한가운데 위치한 월미산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였다

 

 

 

 

시민의 품으로

전후복구기를 거치면서 월미도 해안 매립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돼 주거지와 횟집거리가 들어섰고

1988년에는 문화의 거리로 정비돼 수도권의 해양관광지로 다시 각광을 받기도 했다

2001년 10월 13일 50여 년간 군부대가 주둔했던 월미산을 인천시가 매입 후 월미공원을 조성하여 개방했다

 

 

 

 

인천시민의 추억 월미도

 

 

 

 

1920년대 월미해수욕장

멀리 월미조탕 모습이 보인다

 

 

 

 

1920년대 월미해수욕장 전경

 

 

 

 

월미산 정상에서 바라 본 월미조탕

 

 

 

 

1920년대 월미조탕 전경

 

 

 

 

월미조탕 풀장 전경

 

 

 

 

인천시가에서 바라 본 인천항 월미도 철교

 

 

 

 

월미도에 이르는 제방둑길(축제도로)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한 일본인은

벚나무와 아까시나무 등을 심어 거리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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