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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와대~경복궁

지난 8월 초, 청와대 개방 1주년 기념전시 관람시 영빈관은 행사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경복궁 건청궁 특별 개방 전시와 함께 걷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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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선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 초대, 장(招待, 場)

경복궁에선 건청궁 특별 개방 전시가 있다

 

 

청와대, 국민 품으로 배너가 있는 경복궁 담을 끼고 걷는다

경복궁역이 시점이다

 

 

 

 

보안여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맞은편 예스런 적벽돌 2층 건물로 1930년대 지어진 적산가옥이다
보안이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부터 썼다. 당시부터 문학하는 사람들이 장기 투숙하며 글을 썼다
1936년 창간한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있다. 초대 발행인 서정주 외에 김동리 · 김달진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보안여관에서 장기 투숙하며 작품을 썼다. 생명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보안여관의 문학적 색채는 광복 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들의 기를 받겠다는 듯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작가들이 장기 투숙하며 글을 썼다
청와대와 가까워 청와대 직원들의 숙소나 면회 장소로도 쓰였다
하지만 9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여관의 역할을 조금씩 잃었다
2006년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에서 인수했다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2007년부터 전시장으로 운영 중이다

 

 

 

 

경복궁 돌담

굵은 플라타나스(버즘나무)가 줄지어 있다

 

 

 

 

청와대(靑瓦臺)

서울의 중심부이자 구도심인 경복궁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918~1392)부터 궁궐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1392~1910)에는 경복궁의 후원이 있었다

고종 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문무가 융성하길 기원하는 의미로 경무대(景武臺)라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이 자리에 총독 관저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 사령관이 머물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푸른 기와집이라는 뜻의 청와대로 이름을 개칭했다

1991년 지금의 본관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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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1주년 기념 전시인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과 초대, 장(招待, 場)》이 열리고 있다

 

 

 

 

청와대(靑瓦臺)

청와대, 국민품으로

 

 

 

 

청와대 영빈관(迎賓館)

1970년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들이 증가하였으나 청와대 내에 만찬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를 공간이 마땅치 않고

국가 위상과도 걸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청와대 내에 대규모 행사장을 갖춘 지금의 영빈관을 마련하였다

영빈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5,904㎡ 규모로 1978년 1월 15일 착공하여 같은 해 12월 22일 건립되었다

견고한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로서기둥 원석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채취한 화강암이다

특히 전면에 있는 이음새 없는 4개의 돌기둥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1개 중량이 60톤에 달하고 높이 13m에 둘레가 3m에 이른다

또한 건물의 내부 벽은 무궁화 · 월계수 · 태극무늬를 형상화하여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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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 이희호 여사 기념식수와 청와대 영빈관 정비 빗돌이 계단 양편에 있다

 

 

 

 

영빈관(迎賓館) 1층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빈관은 국빈이 방문하였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었으며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층은 접견실로 외국 국빈의 접견행사를 치르거나 대규모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2층은 만찬장으로 대규모 오찬이나 만찬행사가 열렸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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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 지하층은 출입금지 지역이다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에서 열리는 건청궁 특별 개방 전시》를 보러 간다

 

 

 

 

광림문(廣臨門)
신무문에서 유형문으로 가기 전 동쪽으로 난 문이다

 

 

 

 

광림문(廣臨門) 현판
광림(廣臨)’은 「널리 내려다 봄」을 뜻한다
현재의 현판은 2005년 태원전 복원 공사 때 만들어졌다

 

 

 

 

팔우정(八隅亭) · 집옥재(集玉齋) · 협길당(協吉堂)
경복궁 후원격인 향원정 연못 북쪽편에는 중국풍의 건물인 집옥재 · 협길당 · 팔우정이 자리잡고 있다

 

 

 

 

집옥재(集玉齋)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 ·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이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집옥재(集玉齋) 현판

 

 

 

 

집옥재 답도(踏道)

 

 

 

 

지옥재 계단 서수(瑞獸)

 

 

 

 

협길당(協吉堂)

 

 

 

 

협길당(協吉堂) 현판

협길당은 「길하고 화합하는 당」이다

 

 

 

 

집옥재 뒤편이다

 

 

 

 

집옥재 봉황 문양

 

 

 

 

건청궁(乾淸宮)

1873년(고종 10) 처음 지어졌다. 건립 초기에는 임금의 초상과 글씨 등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또한 고종(재위 1852~1907)이 경복궁 후원(현 청와대 자리)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신하들을 만나기도 했던 장소였다

건청궁이 경복궁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었던 시기는 1885~1896년까지이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경복궁 전각 830여 칸이 타버려, 왕실이 창덕궁으로 옮겨 갔다

1885년(고종 22)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아직 불에 탄 전각이 모두 복구되지 못했으므로

고종과 명성황후(1851~1895)는 건청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건청궁은 이때부터 조선의 정책이 결정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고종의 개화정책 중 하나인 전기가 처음 설치된 곳도 건청궁이었다

 

 

 

 

건청궁(乾淸宮)

왕의 처소인 장안당 · 왕비의 처소인 곤령합 · 별채인 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옥호루(玉壺樓)

명성황후가 일상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7년간 왕실 의사로서 왕비를 모신 미국인 앨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성품이 부드럽고 친절하며 조선 여성의 미를 갑춘 미인이라고 회상하였다

1895년 2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만주까지 침략하자 조선 왕실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국내에서 철수시키려 하였다

이에 일본 군부는 왕실을 압박하는 비상사태를 만들기 위해 10월 8일 새벽에

민간인 복장을 한 한 일본 장교들이 건달들을 끌고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락에서 태우고 남은 뼈를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시신을 안치하고 국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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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합 대청 남동쪽의 두 칸이 누마루이다

 

 

 

 

복수당(福綏堂)

건청궁의 별채이다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후원 향원지 가운데 둥근 섬에 있는 육모지붕의 이층 정자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깃불이 켜진 곳이 향원정 일대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7년만인 1887년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2년이 빨랐다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청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 휴식 공간이다
경회루와 함께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 후원 가운데에 가장 주목받는 장소다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뜻이다

 

 

 

 

영훈당(永薰堂)

경복궁 흥복전 북쪽에 위치한 영훈당은 「향기가 영원히 이어지는 당」이다

 

 

 

 

12지신상

 12지신은 자(쥐) · 축(소) · 인(호랑이) · 묘(토끼) · 진(용) · 사(뱀) · 오(말) · 미(양) · 신(원숭이) · 유(닭) · 술(개) · 해(돼지) 등

열 두 동물을 사람의 몸과 동물의 머리로 표현한 신장(神將)이다

12지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후 방위와 시간 개념으로 불탑(佛塔) · 무덤의 호석(護石) · 불화 및

여러 생활유물에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12지는 통일신라 성덕왕릉 호석의 12지를 본 따 만든 것으로, 방위에 따라 원형으로 설치되었다

조형물 상부에는 조선시대 나침반인 윤도(輪圖)를 그리고 바닥에는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삼태극(三太極)을 표현하여

12지가 지닌 시간과 방위 개념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경복궁 7080 추억의 거리

1970~1980년대 서울지역 동네 골목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앞 정겨운 구멍가게 · 문방구 · 만화가게를 지나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목욕탕까지 이어지는 거리에는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꾸러기만화

만화책을 빌려주거나 읽고 갈 수 있도록 한 가게이다

만화가 최고의 오락이었던 1970~1980년대, 만화가게는 학생들의 방과 후 필수 코스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과 한편에 자리한 컬러 TV를 통해 그때 그 시절 인기 만화를 다시 볼 수 있다

 

 

 

 

종합전파사

텔레비젼 · 라디오 · 전축 등을 수리하고 판매하는 곳으로 1980년대 가정용 전자제품이 활발히 보급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텔레비젼 · 라디오를 통해 유행했던 가전제품과 시대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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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다방

디스크자키(DJ)가 틀어주던 노래를 들으며 차를 마시는 곳으로 철학과 사랑을 논하는 만남의 장이었다

쌍화차 · 도라지위스키가 적힌 메뉴판과 공중전화기 · 메모지가 있는 다방의 분위기 속에서 당시 유행했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오촌댁(梧村宅) / 1848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1리

조선 후기 이 지방의 중산층 가옥 형태를 잘 보여주는 가옥으로남병혁씨로부터 기증받아 옮긴 것이다

오촌댁이라는 명칭은 영양남씨(英陽南氏) 남용진(1887~1912)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출신의 재령이씨(載寧李氏)와 혼인하면서 붙여진 택호에서 비롯되었다

건물 이전을 위한 해체 과정에서 「도광이십팔년무신삼월이일신시입주상량동일시(道光二十八年戊申三月二日申時立柱上樑同日時)라고

적힌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립연대는 1848년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중앙에 마당이 있는 □자 형태로, 지붕의 용마루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안채와 사랑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거주공간으로 네 개의 방(안방 · 상방 · 사랑방 · 문간방)을 비롯해 안마루(안대청) · 사랑마루(사랑대청)

정지(부엌) · 물건을 넣어 두는 도장방(방에 부속된 수장공간)과 고방(창고방)이 있다

외부 출입은 뒤쪽을 제외한 세 방향이 다 가능하며 뒷마당에는 장독대를, 오른쪽 마당에는 디딜방아간과 우물 · 화장실을 배치했다

 

 

 

 

돌하르방

대개 제주 내 읍성(邑城)의 문 앞에 설치되어 성문을 지키는 수호신이면서 민간 신앙의 대상물이기도 했다

돌하르방은 「돌할아버지」란 뜻으로, 우석목(偶石木) · 무석목(武石木) · 백하르방 · 옹중석(翁仲石)이라고도 한다

구멍이 많은 현무암을 사용해 입체감이 강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 눈망울을 하고 벙거지 모자를 머리에 꾹 눌러쓴 모습이다

현재 제주도 내 45기의 돌하르방은 제주도 지방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돌하르방은 제주시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동자석 · 벅수 · 문인석

동자석은 무덤 앞에 세워져 죽은 자의 시중을 들어 영혼을 위로하고 무덤을 지키는 석상이다

벅수는 장승의 다른 이름으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 경곌르 표시하거나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문인석은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석상이다

좌우에 한 쌍을 세우는데, 머리에 복건을 쓰고 손에 홀을 지녀 문관임을 나타낸다

 

 

 

 

돌솟대

 

 

 

 

장승

 

 

 

 

동십자각(東十字閣)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정면 3칸 ·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사모지붕건물으로

경복궁의 궁담(宮墻) 동남 모서리에 위치했던 망루로서 1880년 무렵에 건립되었다

 

 

 

 

박인환 집터 빗돌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던 장소이다

1955년 첫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렸다

 

 

 

 

중학천 석축 유구

현재 전시된 석축 7단 중 하부 3단은 물길조성공사 중 발굴된 조선 중후기의 석축을 원형대로 보존하였고

상부 4단은 인접 재개발 현장에서 출토된 옛 돌을 활용하여 10m의 전시공간을 마련하였다

조선 중후기에 축조된 기존 석축은 새로이 조성된 물길보다 1m 아래에 묻혀 있으며

석축 유구는 도로 폭이 좁고 주변의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완전 복원을 할 수 없어

일부를 유구전시공간으로 조성하여 흔적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중학천 석축 유구 안내판

 

 

 

 

종로 청진 2 · 3지구 / 시전행랑(市廛行廊)

시전은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된 어용 상설시장으로 시사(市肆)라고도 한다

 

 

 

 

종로 청진 2 · 3지구 / 시전행랑(市廛行廊) 안내판

 

 

 

 

종로타워빌딩

종각역 1번출구이 마침점이다

 

 

 

 

걸은 거리 5.7km · 소요시간 3시간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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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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